비빔밥 한 번 먹어봐, 맛있을 거야.

술 마시고 속이 좋지 않은데 비빔밥은 무슨 비빔밥이야?

아니야, 의외로 비빔밥이 만취에 괜찮아.


그때 우리는 낮부터 마신 술 때문에 저녁이 되어서는 초주검 상태였다. 아직 바닷가에는 희미하나마 해의 기운이 자동차 보닛 위에 남아서 다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올라왔다. 맥주를 네 캔씩 사서 몇 번이나 마셨는지 모른다. 화장실도 몇 번이나 갔는지 모른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낮부터 바다를 보며 맥주를 밤이 올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우리는 바닷가로 나왔고 그때부터 편의점과 가까운, 화장실에서도 가까운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이야기를 끝없이 했고, 입을 다물고 바다를 한참이나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노래도 불렀다.


라디오 헤드 노래 불러줄 수 있어?

라디오 헤드 노래를 여기서 불러라고?

응, 여기서 불러줘.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서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을 틀었다. 그녀는 내가 부르는 렛 다운은 좋아했다. 발음이 엉망이었지만, 특히 그녀가 듣기엔 더더욱 엉망인 나의 발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15년을 살다가 왔기에 나의 발음은 엉망으로 들렸겠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을 내가 너무나 좋아한다는 걸 그녀가 알고 있었다.


우리는 렛 다운을 흥얼거렸고, 맥주를 마셨고, 드라이 앤 하이를 렛 다운을 다 부르고 나면 불렀고, 맥주를 마셨고, 카마 폴리스를 또 불렀다. 맥주가 떨어지면 편의점에서 네 캔을 사들고 와서 마셨다. 화장실을 다녀왔고 맥주를 마시다 이번에는 킨의 노래를 불렀다. 에블바디 체인징을 불렀고, 맥주를 또 마셨고 디스 이즈 라스트 타임을 불렀다. 또 맥주를 마셨다. 맥주로 취하니 속이 좋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 좋지 않았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머리를 맞대고 큭큭 웃었고 그러다가 맥주를 마시고 바다와 하늘이 닿는 곳을 같이 바라봤다. 이 죽일 놈의 아이패드 배터리는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우리는 또 킨의 노래를 불렀다. 둘 다 킨의 노래를 좋아했거든. ‘더 러브즈 알 루징’을 부를 때 누군가 벤치 옆으로 와서 노래를 같이 따라 불렀다. 외국인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아메리칸으로는 보이지 않고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곳에서 온 사람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녀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영국인이었다. 정확히는 영국이 아니라 웨일스다. 이 외국인도 킨의 열렬한 팬이었다. 킨은 영국밴드니까.


예전에 말이야,

킨이 신인일 때 말이지, 우리나라 서태지의 기괴한 태지 콘서트 1회를 했는데 그때 왔었거든. 근데 얘네들이 말이야, 노래를 부르고 흥에 겨워서 큰 소리로 아! 리! 가! 토!라고 했지 뭐냐.


물론 이 말은 전부 그녀가 번역을 해 주었다. 그랬더니 외국인은 정말?라고 한국어로 말했다.


킨에서 중추적인 역할이 키보드잖아. 피아노 천재 팀 말이야 팀 녀석. 그 녀석이 원래 콜드 플레이의 키보드 자리에 가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옆에서 그녀가 착실하게 번역을 해 주었다.


킨은 록 밴드인데 기타가 없다. 그런 밴드가 몇 있다. 옆 나라 일본의 엄청난 밴드 글레이에는 드럼이 없다. 킨에서 중심부 연주는 전부 건반이 하는데 라이브를 보면 노래 한 곡 연주하고 나면 팀 녀석은 아마 근육통에 몸살 걸려 일주일은 못 일어날 것만 같다. 우리는 그렇게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물처럼 마셨다.


외국인 녀석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캇이라 하자. 스캇이 끼어들고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걸 가르쳐 주었다. 스캇은 잘 받아먹었다. 가끔 외국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보면 느끼는 게 얘네들은 말이 많아서 그런지 술이 됐는지 멀쩡한지 그 경계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캇 녀석도 눈동자가 풀렸는지 술이 취했는지 어떤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비빔밥 좀 먹어봐.

에이, 무슨 비빔밥이야. 물이나 좀 줘.


우리는 식당에 앉아 있었다. 우리 앞에는 비빔밥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비빔밥을 주문했다. 바닷가에는 24시간 식당이 있고 통유리로 된 테이블에 앉으면 밤바다가 바로 보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지 않았다. 그냥 나란히 앉고 싶었다. 바닷가에서 술이 취해 먹은 음식이 하고많은 것 중에 비빔밥이라니.


그렇지만 그녀가 야무지게 비벼 놓은 비빔밥을 한 숟가락 먹으니 자동적으로 계속 퍼먹게 되었다. 생각을 해보니 우리는 정오부터 자정까지 맥주를 마셨다. 마신 맥주는 오줌으로 다 나오고 술기운만 몸속 어딘가에 붙어서 이렇게 나를 괴롭혔다. 오색찬란한 비빔밥을 비벼 놓으니 참기름의 냄새에 혹하여 바닥이 보일 때까지 고개도 들지 않고 퍼 먹었다. 스캇은 어디 갔냐고 물으니 한참 전에 갔다고 했다. 녀석, 여행 중이라는데 외국인들은 보통 서울을 여행하는데 여기 바닷가까지 오다니. 나의 비빔밥을 다 먹고 나니 그녀가 옆에서 턱을 괴고 나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너는? 너는 안 먹어?


내 말에 그녀는 웃기만 했다. 비빔밥은 비빔밥의 맛 이외에 오색찬란한 색감의 맛이 있었다. 그녀가 옆에 앉아 있고 창문 너머 밤바다가 빛나고 있고, 식당의 낮은 색온도가 비빔밥의 빈 그릇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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