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향인가 그거다. 죄다 맛있어


요즘은 귤도 다 맛있어. 좀 시그랍고 그래줘


찬바람이 불면 이불을 덮고 따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 귤 까먹으며 만화책 '마스터 키튼'을 읽고 있으면 세상 행복했다. 마스터 키튼은 현직 보험조사원이지만 전직 영국육군특수부대 SAA출신이라 키튼에게 들어온 사건 조사를 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멋지고 또 멋졌다.


우와 하면서 마스터 키튼을 읽으며 귤이 주는 그런 분위기와 맛과 멋이 있었다. 리어카에서 한 봉지 가득 귤을 담아와서 방에 풀어놓고 그대로 까먹으며 만화책에 빠져드는 그 늪 같은 시간이 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귤은 씨그랍고 세그라워서 한 번 침이 죽 나와서 만화책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흐르는 침은 빨아 당겨도 무게 때문인지 결국 만화책에 얼룩을 만들고 만다.

 

귤은 막 까먹을 때는 모르지만 먹고 나서 일어나면 배가 불러 터질 것만 같다. 가끔씩 친구들과 귤배 채우곤 했다. 미친놈들. 그런 귤의 자리를 요즘은 오렌지나 천혜향이 차지했다. 예전의 씨그랍고 쎄그럽던 귤이 있던 것과는 달리 요즘의 오렌지나 귤은 너무나 달고 다 맛있다. 정말 설탕과 꿀에 푹 담갔다가 꺼내 놓은 것처럼 전부 달고 맛있다. 그래서인지 귤배 채우기가 요즘은 겁이 난다.


누가 그랬던가. 독과 꿀은 같은 것이라고. 누가 그랬더라? 분명 책은 아니고 어딘가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영화 속 어떤 캐릭터가 말한 것 같은데. 기억 속 끈을 잡고 당겨본다. 뚜뚜뚜 매트릭스의 그 세로로 떨어지는 문자기호처럼 기억이 우후죽순 떨어지더니 아 그래! 라며 누가 말했는지 떠올랐으면 좋겠다. 생각이 날듯 말 듯 한 게 사람을 오금저리게 한다. 이럴 때에 보통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냥 잊게 된다. 인간이란 참. 흥.


귤 하면 생각나는 소녀가 있다. 5학년 때 같이 귤을 까먹으며 같이 만화책을 보던 여자애가 있었다. 우리가 친했던 건 둘 다 맞이라는 거였다. 그 애는 오빠나 언니가 없었고, 나는 형이나 누나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라디오를 끼고 살았고 더불어 팝을 줄창 듣는 그런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나는 클럽활동을 했는데 담당 선생님이 팝을 많이 들어서 수업이 마쳐도 클럽활동하는 반에 남아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팝을 듣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애도 같이 클럽활동을 했다.


그 애는 반은 달랐지만 같은 동네였다. 같이 학교에 가고 같이 하교해서 동네까지 같이 왔다. 얼굴은 기억이 안 난다. 예뻤으면 좋겠다. 5학년이 예뻐봐야,라고 하겠지만 5학년이니까 예뻤으면 좋겠다. 둘이 친해지고 첫겨울이 왔다. 5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우리는 그 애의 집에서 귤을 까먹으며 나란히 엎드려 만화책을 봤다. 그러다가 그 애의 엄마가 나갔다 올테니 동생 데리고 집 잘 보고 있으라고 했다.


우리는 네,라고 대답을 하고 같이 엎드려 있다가 그 애가 우리 곡석 할까?라고 해서 그 애의 남동생을 데리고 우리는 소꿉놀이를 했다.

5학년이면 소꿉놀이, 방언의 고유명사 곡석을 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되었다.

그 애의 남동생은 우리의 자식이 되었고 까먹은 귤껍질을 가지고 밥과 반찬으로 만들어 그릇에 담아서 배역 놀이를 했다.

나에게 아바 앨범이 있어서 그걸 틀어 놓고 배역 놀이를 하자고 했는데 엄마, 아빠는 티브이를 본다며 음악 듣기는 포기하고 티브이를 틀었다.


배역 놀이에 심취해 있다가 이젠 불 끄고 전부 자자.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내일도 회사에서 늦게 들어와요?

그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노동자였기에 야간에 야근이 잦았다.

응, 내일도 늦게 끝나.

내일 일 마치고 술 마시지 말고 집으로 와요.

우리는 그런 배역 놀이를 하며 키득키득거렸다.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부부는 잠들 때 손잡는 거야.

그 애는 그러면서 나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작은 손이 나의 손을 꼭 잡았다.

5학년이었지만 마치 결혼을 한 것 같았다.

결혼을 하면 이렇게 따뜻한 손을 잡고 매일 잠들 수 있구나.

결혼이란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지만 우리의 결혼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았다.


겨울방학에 내내 붙어 다니는 그 애는 6학년이 되어서 전학을 갔다. 요즘처럼 스마트폰도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헤어지기 싫은 마음과 연락할 수 없는 불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 앞 집의 2학년 영채는 대구에 있는 친구와 아이패드로 화상대화를 하며 나에게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누구야? 대구에서 친구가 물었다.

우리 옆집 삼촌이야, 내 사진으루 인형 만들어 준 삼촌.

안녕하세요. 꺄르르르르.


오늘은 영채와 귤을 까먹었다. 요즘 귤은 다 맛있다. 귤만 가득 실어서 파는 리어카도 요즘은 거의 없어졌다. 이러나저러나 귤을 실컷 까먹을 수 있는 겨울이라면 조금은 행복하고 약간은 낭만적이다. 나에게는.


귤은 먹을 때 하나씩 까먹는 재미가 있는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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