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 본격적인 겨울이 오면 겨울 노래를 들으며 귤을 까먹고 하얗게 변한 마당을 쳐다보는 일이 즐거웠다. 본격적인 겨울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난 후의 겨울을 말한다. 초딩이나 중딩때에는 크리스마스 전의 겨울은 온통 크리스마스에게 잡아 먹혀 버려서 온통 형형색색 불빛과 캐럴을 듣지만 딱 칼로 자르듯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난 후의 겨울은 많은 겨울 노래를 들으며 보낼 수 있었다.


겨울의 마당은 차갑다. 지나치게 세제를 많이 넣은 빨래처럼 새하얀 마당은 참으로 냉랭하다. 그런 마당의 틈으로 비죽 올라오던 잡초들도 보이지 않기에 마당은 그야말로 하얗게 표백된 세계다. 등에 담요를 덮고 귤을 까먹으며 하얗게 표백된 마당을 보며 듣는 이승환 2집은 겨울의 노래였다.


이승환 2집은 1991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한 정규 2집 앨범이다. 앨범의 두 번째 곡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은 대중적으로 히트를 쳤고 아직까지 여기저기에서 불리고 있다. 좋은 노래는 세대와 시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1집의 쓸쓸함과 고독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 같지만 2집은 좀 더 여러 사운드를 담아냈다. https://youtu.be/Vh7_a98wMKQ


이승환은 데뷔 전에 록 밴드와 헤비메탈 밴드에서 활동했다. 그 경험 때문인지 공연을 지금까지 고집을 한다. 이제는 팬들의 고령화로 인해 몇 시간씩 지속되는 이승환의 콘서트를 즐겨야 해서 체력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승환은 골수팬이 확보된 덕분에 90년대 초에도 티브이 활동보다는 공연 중심의 활동을 이어갔다.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하려니 막막하기만 했어요. 경제적인 여건은 물론 변변한 PR계획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팬들에게 제 노래를 직접 들려주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칠 때까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그래도 만약 사람들이 외면한다면 그때는 음악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라고 1991년 3월 당시의 인터뷰를 회고했다.


앨범 표지에서 엘리베이터 안의 고개 숙인 여자와 그 앞을 스치는 이승환으로 여겨지는 남자의 스침은 어떤 표현일까. 하고 예전에 한참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2집의 노래들을 죽 듣다 보니 노래들은 만남, 행복, 그리고 헤어짐,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움 속에 지내온 가슴 아픈 추억 속에 느껴지는

따뜻한 기억이 나를 감싸고 있지만 어찌해야 할런지

이대로 지내기에는 너무 답답해

생각을 해봐도 당신을 알 수 없는데

난 정말 세상은 그렇고 그런 걸까 누구나 이렇게 가는 걸까

내가 웃어본지도 오래된 것 같아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간직했던 아름다운 추억들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갔네 나의 모든 것


https://youtu.be/DsYamtUad1I 먼 시간 속의 추억


A면 4번 트랙의 노래 ‘먼 시간 속의 추억’의 가사다. 가사를 보면 만과 헤어짐, 그리고 추억을 하는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앨범의 표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이나 인기를 얻었던 노래 ‘너를 향한 마음’은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노래가 대단했던 건 티브이 출연이 없어서 티브이 가요 프로그램의 수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레코드 판매량을 중심으로 집계하는 차트에서는 91년 9월에 1위를 기록했다.


1991년 10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환은 같은 해 3월 작곡가 이수은에게서 받은 데모 테이프에서 이 곡을 선택했지만 음반 녹음으로 만난 이후 연락처를 잃어버려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이승환이 발라드 베스트 앨범을 다시 녹음할 때 연락이 되지 않아 허락받지 않고 ‘너를 향한 마음’을 재 녹음한 것으로 1998년에 이수은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소송은 기각되었고 이후에 베스트 앨범 대반에서는 이 곡을 삭제했다고 한다. https://youtu.be/26lw0_Z8oAA


재미있는 사실은 초반, 재반 커버가 다르다고 하고, 3반은 제조사가 달라진 앨범이 이승환 2집이다. 찬은 당시 이승환을 관리해주었던 OKM 인터내셔널 로고와 함께 ‘이승환II’라는 글씨만 적혀 있는 음반이었고, 같은 발매일이 찍힌 재반이 지금 보이는 익숙한 디자인의 커버라고 한다.


이승환 2집을 들으며 귤을 까먹는다. 귤은 껍질이 얇지 않아서 손가락을 푹 넣으면 잘 까진다. 귤이 맛있어서 5개 정도는 그냥 연달이 먹었다. 배가 부른 지도 모르며 귤을 맛있게 까서 먹는다. 이승환은 하숙생을 비트를 강하게 해서 부른다. 노래가 좋다. 그리고 ‘나는 나일뿐’을 들으며 어깨를 들썩들썩해본다. 어쩐지 표백된 마당도 리듬을 타는 것 같다. https://youtu.be/KHlZ_6NQkKA


마당을 쳐다보는 건 그저 보는 것이다. 그때는 시간이 막대한 자산이었고 시간이 흐르는 건 사막 거북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린 변주 같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노래는 ‘이 밤을 뒤로’가 흐르고, 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가사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불러본다.


언제부턴가 엇비슷해진 나의 하루하루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그런 마음에 귀를 기울여

내가 원하는 걸 찾으러 꿈결로 가나

https://youtu.be/CaJBjbChdog


가나,에서 리듬을 타줘야 한다. 오후의 아무도 없는 시간. 담요를 등에 덮고 귤을 까먹으며 마동을 보며 이승환의 노래를 들었다. 조금 있으면 동생이 엄마와 집으로 오고 그러면 이 고요한 자유의 시간이 깨질 것이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이 시간을 즐겼다. 마당의 화단에 있는 나무의 마른 가지가 바람에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것마저 그림처럼 보였다. 새 한 마리 없고 누구 하나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세상은 분명 이런저런 이유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을 텐데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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