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이 맛있는지 끓여 먹는 라면이 더 맛있는지 물어보면 이거다,라고 대답하기 나는 애매하다. 짜장면과 짬뽕 중에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엄빠 중에 누가 더 좋아?라고 물어보는 건 –라고 보니 대부분 어린이가 엄마가 더 좋다고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컵라면도 뜨거운 물이 있어야 하고 끓여 먹는 라면도 물을 끓여야 한다. 컵라면은 물을 붓고 3분이라지만 끓이는 시간도 있으니 그렇게 따지면 라면은 이거나 저거나 시간적으로 따지면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식기 전에 라면을 먹으니 먹는 시간 역시 비슷하다.
오로지 맛으로만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다. 선택 장애라는 건 이럴 때 겪는다. 별건 아니다. 별거 없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별거 아닌 거에 매달리고 집중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도 이런 걸 물어보지 않는다. 멍청한 어른이 엄빠 중에 누가 더 좋아?라고 물어본다.
컵라면은 간단하게 먹는 음식의 대명사인데 나는 컵라면을 편의점보다 집에서 더 많이 먹는다. 편의점은 좀 이상한 곳이라 분명 컵라면을 먹으러 들어갔지만 눈에 들어오는 오만가지 맛있는 것들이 유혹을 하는 바람에. 집에는 늘 컵라면이 몇 개 있고 집에서 컵라면을 먹을 때가 더 많다. 컵라면에 계란을 하나 탁 깨트려 넣으면 흰자가 다 익지 않고 이렇게 약간은 덜 익어서 계란의 비릿한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맛이 나는데 그게 맛있다.
끓여 먹는 라면에 계란을 넣으면 노른자는 터트리지 않더라도 흰자는 어떻게든 다 익어 버리는데 컵라면에 넣은 계란의 흰자는 끝까지 그 덜 익은 맛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렇게 뜨겁지 않은 밥에도 날계란을 깨서 비벼 먹는 것도 좋아한다. 거기에 간장이나 와사비를 풀어서 휙휙 비벼먹는데 내 입에는 맛있다. 물론 옆에서 으 하는 표정이지만.
이렇게 컵라면에 날계란을 깨트려 먹는 맛은 늦가을 토요일 오후가 좋다. 늦가을의 햇살이 힘을 서서히 잃어 가면서 나무와 벤치에 내려앉을 오후의 시간에 고요와 적막이 가득한 집에서 차가워지는 베란다의 문틀을 잡고 있다. 온 집안이 적막으로 휩싸이고 밖은 서서히 온도가 떨어지며 푸석한 늦가을의 정취가 한가득 거리에 깔린다.
차가운 문틀을 한 번 만지고 돌아서서 물을 끓인다. 가스레인지가 켜지는 소리가 일순 적막을 깨트린다. 화악 불이 올라오는데 나는 가만히 서서 주전자에 불이 닿는 모습을 본다. 파란불은 날름날름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주전자가 달아오를 때까지 핥아댄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적막이 흐르는 늦가을의 집 거실도 좋지만 그 적막을 요란하게 깨우는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가 좋다. 주전자는 물이 끓어오를 때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우는 소리를 낸다. 평소에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모든 고요를 없애는 마법을 펼친다.
지금부터 적막이란 없다.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붓는 순간 맛있는 냄새가 모든 공간을 채운다. 날계란을 하나 탁 깨트려 넣는다. 그리고 김치도 조금 넣는다. 날계란이 들어가서 면이 익는데 3분보다 좀 더 시간이 걸린다. 면이 익을 동안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도 라면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눈을 감은 그때 그 방에서 나는 일부러 잠이 들곤 했다. 사람이 죽은 곳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얼마간은 아버지가 눈을 감은 그 방에서 똑같이 눈을 감고 잠이 들곤 했다. 이상하다던가 기분이 별로라든가 그런 건 없었다. 아버지는 컵라면은 안 드셨다. 오직 끓이는 라면이었다. 어찌나 라면을 좋아했던지 회사 가기 전에 라면을 늘 끓여 드시곤 했다.
그리고 나 먹으라고 밥그릇에 좀 담아 놓고 출근을 하셨다. 눈을 뜨면 온통 불어서 죽이 된 그 라면을 나는 숟가락으로 퍼 먹곤 했다. 맛있을 리 없지만 맛있었다. 아버지는 라면 끓이는 스타일이 확고했다. 그래서 그 라면 냄새에도 고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까지 생각하다 보니 컵라면이 다 됐다. 이제 입천장에게 미안해하며 먹는 일만 남았다.
컵라면 먹으며 듣기 좋은 노래 본 조비의 베드 오브 로지즈 https://youtu.be/NvR60Wg9R7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