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컵라면을 오랜만에 먹었다. 맛이 옛날에 먹던 맛 그대로 있었다. 가격도 다른 컵라면에 비해, 제일 작은 튀김우동 컵라면이나 사리곰탕 면에 비해서 저렴했다. 작은 컵라면도 이제 천백 원이나 하는데 도시락 컵라면은 구백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시락 컵라면은 고등학교 때 정말 질리도록 먹었다. 일주일에 3, 4번은 도시락 컵라면에 밥을 말아서 먹었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서 한 달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물론 공부를 하기 위해서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한 것은 아니고 그저 버스를 타고 북적북적 학생들 틈에 끼어 40분 이상 등하교를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고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여러 학교가 같이 있는 곳에 있어서 수많은 학생들이 우글우글했다. 게 중에는 김태희가 나온 여고도 있었다. 나는 사진부로 우리의 아지트가 김태희가 나온 여고의 뒷골목에 있는 투다리였다. 단속이 뜨면 투다리 이모가 주방에 우리를 숨겨주었다.


아무튼 등교를 위해 아침에 버스를 탔는데도 여러 학교의 아이들이 바글바글 하니까 저녁의 냄새가 났다. 여고가 둘, 남고가 둘, 중학교가 몇 개나 붙어 있어서 버스를 잘못 타면 좋은 냄새 대신 그런 홀아비 청소년의 냄새를 맡으며 40분을 으 한 상태로 가야 한다. 하교는 좀 달랐지만 비슷했다. 그때 나에게서도 이런 냄새가 나는 거 아니야? 하며 독서실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서실 생활이 더 한 냄새를 풍기게 만들었고 독서실에서 잠다운 잠은 전혀 자지 못했다. 그래서 잠은 주로 수업시간을 이용했다.


생각해보니 공부를 한 기억이 없다. 부모님을 잘 도 속였다. 공부한답시고 독서실로, 일요일에 학교로. 돈 좀 주세요.라고 해서 얼마씩 받은 돈을 아껴서 필름을 구입하고, 사진을 찍고, 선배에게 맞고, 점심시간에 놀고, 쉬는 시간에 먹고, 수업 마치면 교류하는 여자 학교 애들과 명목상 만나서 놀고. 공부를 했다는 기억이 전혀 없다. 그래도 미술 시간만큼은 또 열심히 해서 미술 점수는 잘 받았지만 그건 다 중학교 시절 얘기다. 고등학교,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미술 시간 따위 자율학습이거나 없다.


친구 중에는 밥만 도시락으로 싸오는 놈이 있었다. 아주 큰 도시락 통에 밥만 넣어서 온다. 밥만 들고 학교에 가면 뭐든 어떻게 된다는 주의였고 맞아떨어졌다. 반찬을 집어 가도 화를 내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고, 그 녀석의 밥을 몰래 먹어도 그 녀석 또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가 독서실에서 먹고 자는 동안 학교 매점에서 도시락 컵라면을 두 개 사서 하나는 그 녀석을 주고 그 녀석은 밥을 반 덜어서 나의 도시락 컵라면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자주 먹었다. 도시락 컵라면에 밥을 말아서 먹을 뿐인데 점심시간에 먹는 그 맛은 정말 맛있었다. 먹고 나서 점심시간에 뭐 좀 놀고 나면 배가 금방 꺼졌다. 그때의 사진을 보면 말라도 참 말랐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당최 살이 찐 아이들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만큼 공부와는 참 거리가 먼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는 말이다.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책 보는 게 참 좋은데 그때는 공부하면 왜 그렇게 질색팔색을 했을까. 자율학습시간에도 제대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무서운 선생님이 야자 감독을 할 때에도 아이들과 눈이 맞으면 뭐 어때, 라며 간도 크게 도망을 갔다.


분명 다음 날에 걸려 엉덩이를 몽둥이에 내줘야 하는데도 그때는 헤헤 거리며 목숨 걸고 야자를 도망쳐 간 곳이 고작 투다리나 오락실이나 교류하는 여고의 사진부 암실이었다. 투다리에서 생맥주를 실컷 마시고 나와서도, 오락실에서 열심히 오락을 하고 나와서도, 사진부 암실에서 시답잖은 사진 이야기를 하다가 나오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락 컵라면을 먹었다.


이상하다, 다른 컵라면도 먹을 법 한데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도시락 컵라면이었다. 그것에 여자 남자 할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먹어본 팔도 도시락은 뚜껑에 쓰여 있는 대로 세월이 지나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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