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멘트에 박힌 못 하나를 발견했다. 녹슬어 못쓰게 된 못이 구부러져 있었다. 못이 녹슬어 있는 꼴이 꼭 사람이 나이가 든 것처럼 보였다. 시간의 개입을 인간은 받는다. 그 개입을 거부하거나 뿌리치지 못한다. 운명보다는 숙명에 가깝고 '신'적이다. 이 세상의 순수한 것들은 전부 무섭다. 그래서 시간은 무섭다. 시간은 순수의 가장 꼭대기에 있다.
순백의 검은 순수. 그게 시간이다.
시간이 개입을 하면 모든 것이 그렇게 된다. 못의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 또한 시간이 개입을 했기 때문이다. 못은 어쩌자고 공기와 수분으로 녹이 슬어 가고, 인간은 어째서 늙어가는 것일까.
그랬더니 저 앞에서 사르트르가 나타나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을 했다. 흥, 돌아가신 양반이 잘도 일어나서 참 말 많으시네. 하지만 프랑스어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든 못이 비슷하게 녹슬지는 않는다. 역시 사람도 모두가 똑같이 늙어가지는 않는다. 인간은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라고 사르트르가 블란서어로 말했다. 인간은 한 가족이라도 전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못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사용되는 곳이 다르듯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못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요. 구부러진 못을 보고 인간을 형상화할 수는 있어서 못에는 메타포가 있지요? 하지만 이데아는 없다고요.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이데아, 이상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나는 쏘아붙였지. 부쳤지, 가 맞는 말인가. 암튼 그렇게 톡 쏘았지. 장 폴 사르트르, 흥. 이름이 멋져서 자꾸 맗하게 되는 이상한 이름의 양반.
아주 아름다운 못이 있다고 치자.
몹시 비싸 보이고 세상에 몇 없는 못이다.
부르는 게 값인 이 못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부러움을 받는 것이 못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못을 가진 사람이다.
이 못의 본질은 인간이다.
그 아름다운 못도 못생기도 울퉁불퉁한 손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다.
요컨대 아름다운 곳으로 가면 그 풍경과 경치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건 그 경치를 보고 있는 당신이다. 주체와 주체아에서 우리는 대부분 주체는 보지만 주체아는 인식하지 않는다. 주체아가 존재하기에 주체를 본다. 주체아가 되는 당신, 당신이 병들고 아프다면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내 말에 사르트르는 안경을 한 번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묘한 사람 같으니라고.
좡 풜 사르틔르의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애무하면 육체는 살이 된다’를 나는 사랑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애무는 애무에서 벗어난 애무였다. 피부를 살갗이라 부를 수 있는 애무.
사르트르 아저씨가 노벨 문학상을 거절하면서 철학가들에게 노벨 문학상의 영예가 돌아가지 않고 있지만 장 풜 사르트르 아저씨, 뭐 어쩌라고 다. 정말 너무나무 미치도록 좋다.
장 폴 사르트르가 비스듬히, 몸에 녹이 슬어 시간의 개입을 무시하고 있다.
녹슨 못이 머리에 박힌다.
녹슨 못
못은 서서히 허리를 구부려 세월을 박는다
그렇게 굽은 등에 슬픔이 내려앉는다
더 이상 펴지지 않아도 못은 울지 않는다
못은 그렇게 슬픔을 박는다
단단하게 박힐수록 못은 녹물 색으로 물들어간다
못은 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구름이 눈물을 흘릴 때 기대어 잠시 울고 녹슬어 간다
구부러진 못의 등으로 기쁨이 흐른다
못은 그렇게 기쁨도 박는다
또 조금 허리가 구부러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못은
세월을 박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
못은 허리를 구부려가며
못 쓰게 된 마음에 못 쓸 관계를 연결해 박는다
못은 늘 함묵하고 시간을 박는다
못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허리가 구부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