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공포영화 마니아만큼 많이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무서워하면서 극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공포영화에 시선을 두는 것은 매운 음식을 찾는 것과 흡사하다고 나는 늘 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을 땐 매운데 먹고 나면 더 땡기기 때문에, 나는 싫지만 애인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저 매운맛이 맛있어서. 이 매운 맛에 공포영화를 기입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다. 상업적으로 공포영화는 적정 수준의 손익분기점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기에 머리만 굴려 공포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대체로 점프 스케어와 사운드로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인간의 뇌는 상대가 뭔지 모를 때 공포를 느끼고 생존에 위협을 받을 때 극한의 두려움을 받게 되도록 진화가 되었다. 공포는 인간 감정의 저변에 깔려 있는 초석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무서운 이야기는 단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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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서 시원한 카페에 지인들과 모였다. 날은 청명하고 무더웠고 카페 안은 에어컨으로 시원했다. 음료도 시원해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모임으로 모였기에 이야기를 하다가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모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낮에 운전을 하는데 입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서 뺐는데 여자 머리카락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잡고 빼니 긴 머리카락이었다. 한 번에 빠져나오지 않아 당긴 다음 다시 손가락으로 집어서 뺐다. 머리카락은 아주 흑발이고 3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때 빵 하는 경적이 울려 앞을 보니 중앙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놀라서 핸들을 돌렸다. 이상하다? 오늘 오전부터 여자를 만난 적도 없고 여자가 있는 곳에 가지도 않았다. 지인들과 만나서 커피를 마시기에 오전에 들리는, 여자 직원이 있는 카페에도 가지 않았다. 입에서 빼 낸 머리카락을 창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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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고 나니 웃으며 듣던 지인들이 조용해졌다. 카페의 안에서 보는 카페 밖의 날은 화창했고 몹시도 무덥고 맑은 날이었다. 지인들 중에 한 명이 얼굴에 땀을 흘렸다. 너무 무더워서 그런가. 그러더니 모임도 덜 끝났는데 그 사람은 일어나서 가야 한다며 가버렸다. 나머지 지인들도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하게 음료만 마셨다. 나는 화장실에 좀 갔다 온다고 하며 일어나서 카페의 화장실로 갔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는데 입안이 또 꺼끌꺼끌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으니 여자 머리카락이 입속에 있었다. 잡아서 당기니 어딘가에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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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야기로 각본을 쓰고 다듬어서 휴대전화로 10분 미만의 영상으로 제작을 해도 꽤 무서운 단편영화가 될 것이다. 누구나 입속에 머리카락이 들어가 본 경험이 있고, 긴 머리카락이 목 너머의 어딘가에 걸려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까지 상상하게 되면 그 이상의 상황과 장면을 누구나 상상할 여지를 둔다. 머리카락이 입속에서 느껴질 때는 유리를 긁는 듯한 사운드를 삽입한다. 무서운 이야기는 어쩌면 단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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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길었지만 영화 ‘샤이닝’도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소설가 잭은 아내 웬디와 아들인 대니와 함께 덴버에 있는 오버룩이라는 호텔의 관리를 5월까지 하게 되는데, 잭은 이전 관리인이었던 그래디의 유령을 만나게 되고 그래디가 그랬던 것처럼 점점 미쳐가는 잭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도끼로 토막을 내려 한다는 내용이다. 스티븐 킹은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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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편견일 수 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은 스티븐 킹 자신이 너무 재미있어서 너무 좋아서 너무 자신의 글에 빠져서 썼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읽어 본 몇 권의 장, 단편 소설들에게서 사람들이 이렇게 흥분하며 빠져들 정도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국식 대사와 유머, 같은 것들이 번역을 거쳐서 그런지 빠져들지는 못했다.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트루먼 카포티의 초년 소설 ‘차가운 벽’같았다. 하지만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정말 퐁당 빠져서 읽었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특유의 공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물론 나의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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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이 무서운 이유는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잭이 살인마로 변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서 익숙함이 빠져나가고 낯선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고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흔한 점프 스케이도 없이 공간이 주는 장대한 우울감이 영화를 보면서 보는 이들의 몸속에 이입이 된다. 잭으로 분한 잭 니콜슨의 미쳐가는 연기는 분장을 한 공포 유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섭다. 무엇보다 아들인 대니가 자신의 입속에 살고 있는 작은 유령 토니와 이야기를 하는 장면과 대니가 칼을 들고 있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섬뜩하게 한다. 세상 귀엽고 깜찍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대니의 연기를 보라, 아니 저 아이가 저 칼을 들고!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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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릭 감독은 당시에는 없을, 드론이어야만 가능한 촬영기법으로 초반 영상을 장식한다. 장대함과 웅장함이 주는 고요와 고독, 그것은 곧 결락으로 몰아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독일의 사진 거장,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거대 사진을 보는 듯한 미로의 모습, 성곽 같은 호텔을 덮어버린 엄청난 눈과 눈이 쌓인 미로 속을 헤매는 대니와 도끼를 들고 대니를 쫓는 잭. 이 모든 것들이 짜임새 있게 연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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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영화를 썩 달가와하지 않은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샤이닝을 다양하게 해석한 다큐멘터리 영화 ‘룸237’을 보면 큐브릭의, 큐브릭만의 샤이닝 세계관이 벽 너머의 또 다른 벽처럼 뚜렷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한다. 샤이닝은 그저 공포영화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역사적인 사실과 대학살, 그리고 개척자의 미쳐가는 정신과 삶을 고스란히 샤이닝에 녹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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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룩 호텔, 1907년도에 건립된 역사가 있는 호텔이다. 과거의 호텔 관리인은 가족을 몰살한 비극이 존재하는 호텔. 들어가지 말라는 방 237에 들어간 잭과 대니에게는 영혼을 비롯한 환영이 나타난다. 초반에 호텔을 안내하는 장면에서 호텔은 1907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됐다는 말을 듣는다. 1907년은 인디언 마지막 영토였던 오클라호마가 미국으로 편입된 해였다. 인디언의 무덤을 허물고 위에 지어진 오버룩 호텔의 내부를 구경하던 중에 웬디는 지배인에게 “전부 인디언 장식들인가요?”라고 질문을 하고 나바호와 아파치 문양이라는 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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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은 인디언 마지막 전사 제로니모가 사망한 해였다. 인디언들의 저항이 막을 내린 해라고 한다. 오버룩 호텔에는 아주 많은 인디언들을 상징하는 장식과 문형, 문양이 있다. 인디언들이 영혼과 대화를 나누듯 대니가 입속의 토니와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인디언들을 떠올 수 있다. 오버룩 호텔의 지붕과 청소를 하는 호텔 직원들 사이에 ㅅ자로 서 있는 사다리는 인디언들의 텐트인 티피를 보는 것 같다. 인디언들의 무덤을 허물고 세워진 건물 오버룩 호텔은 현재 미국의 모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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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호텔은 사람이 없다고 여겼던 신대륙이며 잭은 미국의 개척자의 모습이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던 영국의 노동자들이 인디언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주 평범한 노동자들이었던 영국인들은 총을 들고 살인마로 변해 무참히 인디언들을 이유 없이 죽였다. 인디언 학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6,000만 명이었다. 전범 국가 일본과 나치의 독일이 홀로코스트나 마루타를 통해 대학살을 했지만 600만 명으로 미국의 개척이라는 명분으로 대학살에 비할 바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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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에게 보이는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피바다의 환영은 대학살의 잔류이고 나타나는 영혼들의 모습은 대학살 속에서 사라진 인디언들이었다. 그렇지만 잭과 대니와 웬디는 애써 환영을 무시하고 못 본채 하려 한다. 그저 넘기려 한다. 호텔의 이름이 오버룩으로 뜻이 못 본체 하다,이다. 과거사의 과오를 못 본채 넘기려 하는 미국을 꼬집었다. 대니가 쓴 레드럼이라는 글자를 뒤집으면 머더, 살인이며 복잡하고 왜곡된 미국의 역사 같은 미로 속으로 잭을 피해 들어간 대니는 거꾸로 쓴 레드럼처럼 자신의 발자국을 다시 뒤로 밟아 가면서 그곳을 탈출하게 된다. 그 방법은 인디언들이 주로 사용했던 방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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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카메라는 1921년의 사진 속 잭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잭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잭은 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