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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마키아벨리
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우열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평전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사실 어렸을 때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던 위인전을 다 떼고 난 후론 위인전이나 위대한 인물이라고 소문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겨워서... 세상에서 훌륭하다 훌륭하다 난리부르스를 쳐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왜들 하나같이 반듯반듯 착하고 정직하고 어릴 때부터 싹수가 남다른지. 나같은 범인이야 그냥 감탄만 하면서 배워야 한다는 그 논리가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악당들의 이야기도 맘대로 골라 읽을 수 있고 반대로 평범한 사람들의 잔잔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동감이나 위로를 받을 수도 있으니.
같은 맥락에서 평전은 좀처럼 읽지 않다가 이 책을 집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군주론'이라는 책과 함께 마키아벨리즘이란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때로는 지속적으로 욕을 먹는 논리를 만든 저자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일까란 호기심 때문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 '군주론'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는 스무살 여린 감성이 살아 숨쉬면서 또한 정의감과 이상주의로 버거워 하던 때라 그 책을 읽고 잠깐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내가 꿈꾸고 있던 군주나 정치가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잔인하고 교활하고 강압적인 군주상을 그렸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헌데 우스운 것은 살아가면서 잠깐씩 마키아벨리가 그린 세상과 인간 그리고 정치와 통치 논리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정직하고 현실을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었나 감탄하는 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마키아벨리란 사람은 참으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정치와 시류를 읽는 흐름을 타고난 천재이면서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었으며 그칠 줄 모르고 연애를 한 정력가에 도박과 술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라는 모토에 너무나도 충실하게 살아간 사람이었다. 원래 예술가는 난봉꾼인 경우가 많은 법이니 그것을 눈감아준다고 해도 가정에 나름 충실하면서 맡은 공직에 완벽을 기하고 조국 이탈리아와 피렌체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에 죽는 순간까지 온몸을 다 바친 사람이라니... 이 모든 면모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천재'라고 하는 거겠지.
이런 인간적인 마키아벨리의 면모를 살펴보는 재미외에도 이 책에는 또 다른 재미가 숨겨져 있다. 바로 '군주론'이란 명작을 낳을 수 밖에 없었던 마키아벨리가 살던 난세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이 우리와 친숙한 유럽의 역사적 사건들과 맞물려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구교와 신교의 갈등,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한 신교의 득세, 유럽 각국의 권력 쟁탈전, 영욕과 탐욕에 불탄 교황들 그리고 그 세속적인 교황과 군주들의 후원으로 살아가는 걸세출의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인물들이 마치 미니시리즈 주인공처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세계사 교과서(하긴 모든 교과서는 흥미로운 주제를 따분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지만)에 장황하게 실려있는 유럽사를 일목요연하면서도 한편의 영화처럼 이렇게 박진감 넘치게 엮은 책도 처음 봤다. 더구나 이 모든 스릴넘치는 역사의 한 가운데에 천재 마키아벨리가 있었다. 교황과 군주와 메디치가의 지도자들을 막후에서 조정하면서 천재적인 외교술을 발휘해서 난국을 타개하고 살아가는 순간순간에 그 타고난 외교술을 발휘해서 칼바람 이는 정계에서 살아남고 때로는 좌절하고...
아이러니한 점은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공직에서 밀려나고 좌절의 기간 동안 '군주론'이 태어났고 그의 문학적 재능이 꽃피웠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는 좀 그랬다. 이 사람은 왜 이리 다재다능한 것일까? 그러고도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여자와 도박 그리고 술을 즐겼으니... 역자는 마키아벨리와 이순신이 무척 닮았다는 신선한 논리를 역자 후기에 밝혔다. 둘 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했으며 문장가였고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했으며 애국심이 투철했다는 것. 그런데 나로서는 이순신보다는 마키아벨리가 더 매력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매우 화려하면서 일면 정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를 믿지 않았고 그 점을 공공연히 밝혔으며 세상의 모든 허위와 거짓에 대해 교묘하게 풍자하고 비꼬면서 당당하게 살아갔다. 그리고 인생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즐기면서 갔다. 고난과 어려움도 겪을만큼 겪었고 그 천재성이 살아 생전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아주 유쾌한 인생이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더 이상 파릇파릇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든 나로선 마키아벨리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다만 놀라울 따름이다. 그게 비록 나와 같은 각도로 보는 관점도 아니고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따르고 싶은 관점도 아니나 그의 관점과 식견을 알고 보는 세상은 더 뚜렷하고 선명할 것이라는 데 이제는 승복한다. 이 책을 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먼 나라, 이젠 죽어버린지 오 백년도 넘은 남자의 이야기를 읽어서 어쩌란 말인가? 서양에만 천재가 있나? 동양에는 손자병법이란 명작이 있질 않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공박하고 싶다. 손자병법이 다빈치 코드만큼 세계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가?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논리를 떠나서 명품과 명작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다는 간단한 논리를 생각하며 마키아벨리,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