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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조금은 낯선 단어 '패싱'. 부제에 있듯이 유색인종이 백인 행세하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있다. 제1부에서는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살았던 클레어 켄드리와 아이린 레드필드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아이린이 클레어의 집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흑인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으로 가득찬 그녀의 백인 남편 존 벨루를 만난다. 클레어나 아이린은 흑인이면서도 백인 행세를 할 수 있는 피부와 외모를 지녔다. 두 여성 모두 패싱에 성공한 것이다. 존 벨루는 자신의 아내가 흑인임을 꿈에도 모른 채 아이린에게 흑인에 대한 혐오감 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아이러니한 점은 주인공인 아이린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클레어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모호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고 있는 클레어에 대한 실망감과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받은 모욕감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된다. 왜일까? 아이린의 마음 저편에 패싱에 성공한 아름다운 클레어에게 자신도 모르게 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클레어는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모두 버린다. 결국 클레어는 패싱에 성공했고, 그녀가 원했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왠지 그녀에게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바로 그것은 자신의 버린 과거에 대한 그리움...... 그래서일까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아이린에게 집착을 보인다. 그녀가 매몰차게 버린 패싱 이전의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가장 피폐했던 그녀 클레어는 누구보다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아이린, 그러나 그녀의 남편 브라이언은 미국사회에 혐오와 염증을 느끼고 브라질로 떠나고자 한다. 행복한 부부로 보이지만 서로의 이상이 맞지 않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으며, 결국 클레어로 인해 둘 사이는 금이 조금씩 가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다. 백인 남편을 두고도 과감하게 흑인 댄스 파티모임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원하는 것이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갖고마는 클레어. 브라이언은 자신을 옭아매는 아이린과 대비되는 클레어에게 묘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흑인 사회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던 클레어와 가까워지는 브라이언을 보면서 아이린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고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스스로 뛰어내렸든, 누군가 그녀를 의도적으로 밀었든 클레어는 죽었다. 결국 자신의 가정이 온전하게 지켜지기만을 바랐던 아이린은 클레어의 죽음 앞에서 친구를 잃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안도감을 느낀다. 이 얼마나 비열한 인간의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인가?
지금도 미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커다란 이슈로 종종 뉴스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1920년대에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일부 백인 피부를 가진 흑인들은 패싱으로 백인 사회에 들어가고자 했을 것이다. 아이린과 클레어 역시 패싱에 성공한 흑인이었다. 그나마 아이린은 흑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해 살아가면서 정체성을 어느 정도 잃지않고 갖고 있지만 클레어는 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브라이언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인종차별적인 미국사회에 불만과 염증을 느끼고 아예 브라질로 떠나고자 한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패싱을 통해 백인 행세를 하고자 했던 수많은 흑인들. 아마도 그것은 미국이라는 세계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인종차별의 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