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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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라고 하면 왠지 청소년기부터 망원경을 들고 옥상에 올라 별을 바라보고, 책상 앞에 천체 사진을 덕지덕지 붙여두고, 박사님이 된 후에는 밤새 천문대에서 홀로 관측 데이터를 수집하는, 순진한 얼굴과 마르지 않는 열정을 가진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과연 2020년대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의 천문학자가 모두 이런 모습일까?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으면 그런 고정관념이 사르르 녹을 것이다.


심채경은 천문학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워킹맘, 비정규직 생활을 오래했던 과학자, 산문집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천문학자와 '워킹맘'이라니, 생소한 단어 조합이다. '비정규직'도 과학자라는 단어 옆에서 어색하게 발음된다. '이과'답지 않게 글을 잘 써서 특이한 사람 같기도 하다.


저자는 다가가기 어려울 것만 같은 천문학자의 이미지를 부수고, 평범한 이공계열 학생이 어떻게 연구실에 들어가고, 박사 졸업 전에 대학에서 교양강의를 맡고, 연구과제를 맡기 위해 원서와 자소서를 쓰며 불안에 시달리는지에 대해 들려준다. 그리고 생활인으로서의 과학자가 다른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그 말들이 친근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좋았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이공계열 전공자 여학생들이 읽으면 가장 좋을 책일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과학자'라는 귀한 롤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우주과학과에 들어가고 싶은 청소년들에게는 대학이란 무엇을 배우는 곳이며 연구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소서를 좀 더 열심히 썼다면 작가님의 후배가 되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배경음악처럼 깔려있었다(경희대 우주과학과에 원서 넣었는데 예비 1번으로 결국 불합격😂). 지금은 이공계에서 좀 멀어졌지만 고등학생 때는 동아리에서 천체 관측도 자주 했는데... 천문 파트가 좋아서 수능 탐구과목도 지2로 선택했는데... 이런 추억을 꺼내보기도 했다. (음 이건 너무 라떼스러운가, 아무튼) 한때 우주를 꿈꾸던 소년을 아직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어른들이 보아도 충분히 좋다🌌



+ 가장 맘에 들었던 페이지🐬🌟

언론은, 어쩌면 사람들은, 대단한 과학자를 집중 조명하고 싶어한다. 고난을 극복한 영웅담에 빨리 감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과학자를 여럿 키워서 그중 한 사람이라도 대단해지는 과정을 지지하거나 지켜보는 것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세계적 과학자가 어디서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날 리 없는데. - P146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 P156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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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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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에 <초현실주의 거장들> 전시회를 보고 온 뒤로 이 작가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마침 을유문화사 인스타에서 이 책을 본 기억이 나서 바로 샀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은 32명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목에서 은근히 티를 내는 것처럼, 이 책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집중 분석하는 학술서가 아니라 저자가 만나고 접한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생애를 회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중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달리, 마그리트는 물론이고 이 사람이 초현실주의자라고? 되물을 만한 피카소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전시회에서 본 에일린 아거의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폴 델보, 만 레이, 이브 탕기의 작품도 좋게 봤기 때문에 책이 배송되길 기다리면서 기대를 많이 했다.


막상 첫 장을 펼쳐보니 에일린 아거는 복잡한 연애 생활을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고 작품에 대한 얘기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책을 계속 읽으면서 보통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이렇게 연애 상대를 만나고, 갈아치우고, 때로는 다자연애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알렉산더 콜더, 호안 미로처럼 평생 한 명의 반려자와 살았던 사람이 특이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런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통해 20세기 파리, 런던, 뉴욕 등지에서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어떻게 교류하고 세계대전을 피해 활동활 수 있었는지 알게 되어서 흥미로웠다.


가끔 내 가치관과 달라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작품을 만들고 감상했던 방법을 따르면 문제는 없었다. 구태여 분석하고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시각적 자극이 무의식에 꽂히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의 감상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그냥 이런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았구나~ 세계대전 때문에 고생을 많이 겪었구나~ 정도로만 알고 그외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흐린눈-.-으로 넘어갔다.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는 저자가 당시 일하고 있던 런던 동물원으로 호안 미로를 초대해서 코뿔새, 카멜레온, 비단뱀을 보여주고 그의 스케치를 받는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직접 눈앞에서 본 장면을 담아서 그런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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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는 1924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발표한 선언문으로 시작되었다.


🔖(82쪽)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이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초현실주의를 정의하고, 설명하고,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맞서서 그것을 지킨 인물이었다. (...)그가 오만한 꼰대, 무자비한 독재자, 확고한 성차별주의자,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자, 교활한 위선자였다는 말도 해야겠다.


책에서 앙드레 브르통은 계속 까인다🙄 그는 자유분방한 초현실주의자들을 한 집단으로 묶으며 끝까지 그 위에 군림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들과 겪은 갈등 관계가 거의 모든 장에 걸쳐 등장한다. 여러 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던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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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그동안 잘 몰랐던 예술가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지만, 번역투가 그대로 드러나는 문체 때문에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마냥 덜컹거리며 읽었다😂 한정된 지면상에 32명의 이야기를 담으려다 보니 한 사람 당 한 작품의 이미지만 실린 것도 아쉬웠고... 전시회에 한 번 더 가서 작품을 오래 눈에 담고 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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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초현실주의자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에일린 아거 Eileen Agar

출처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21/may/09/eileen-agar-angel-of-anarchy-whitechapel-gallery-london


출처 https://post-phinf.pstatic.net/MjAyMjAxMTFfMTQy/MDAxNjQxODg0MDQ3NjM4.Tnw9kc1h6MZIZrx6P2aBCJiifpTbis_P7qLPy1NMomwg.eH6ButgjhDpA9Qnvvh4UlUH29V0J7kbJpKT2mtsEZWEg.JPEG/022.JPG?type=w1200


2. 장 (한스) 아르프 Jean (Hans) Arp

3.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4. 한스 벨머 Hans Bellmer

5. 빅터 브라우너 Victor Brauner

6.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7. 알렉산더 콜더 Alexander Calder


출처 https://www.wikiart.org/en/alexander-calder


출처 https://www.sothebys.com/en/buy/auction/2020/impressionist-modern-contemporary-art-an-evening-sale/mariposa


8. 레오노라 캐링턴 Leonora Carrington

9. 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

10.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

11. 폴 델보 Paul Delvaux

출처 https://surrealism.website/Paul%20Delvaux.html


출처 https://www.boijmans.nl/en/collection/artworks/101584/les-phases-de-la-lune-iii


12.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3.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4. 레오노르 피니 Leonor Fini

15. 빌헬름 프레디 Wilhelm Freddi

16. 알베르토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

17. 아실 고르키 Arshile Gorky

18. 위프레도 람 Wifredo Lam

19. 콘로이 매독스 Conroy Maddox

20.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21. 앙드레 마송 André Masson

22. 로베트토 마타 Roberto Matta

23. 에두아르 므장스 E. L. T. Mesens

24. 호안 미로 Joan Miró

출처 https://www.wikiart.org/en/joan-miro


출처 https://mywowo.net/en/spain/barcelona/joan-miro-foundation/collection


25. 헨리 무어 Henry Moore

26. 메레트 오펜하임 Meret Oppenheim

27. 볼프강 팔렌 Wolfgang Paalen

28. 롤런드 펜로즈 Roland Penrose

29.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30. 만 레이 Man Ray

31. 이브 탕기Yves Tanguy

출처 http://www.omertiroche.com/artists/yves-tanguy/


출처 https://www.artsy.net/artwork/yves-tanguy-el-saltimbanqui-reste-el-le-faut


32. 도로시아 태닝 Dorothea T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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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자리 - 삶을 지켜내는 과학을 위하여
전치형 지음 / 이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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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자리』는 시민이 과학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할지, 민주주의를 만난 과학과 과학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더이상 과학을 교과서와 연구실에만 존재하는 깨끗한(?) 비정치적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 애초에 과학도 여타의 학문과 문화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즘의 요구에 부응했던 우생학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오늘날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하여 찬성과 반대 양측이 설전을 벌이는 것도, 과학과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실험과 통계로 얻어지는 데이터는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연구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정치적 구호로 발전할 여지마저 있다. 그래서 과학자는 물론이고, 스스로 과학을 밥벌이 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민도 이 시국의 과학에 대해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독자에게 '세월호학'을 공부하길 권한다. 세월호라는 이름 자체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더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기존의 진영 논리는 잠시 미뤄두고 '과학적으로' 대상을 직시하라고 말이다. 


네덜란드의 해양연구소 '마린'은 2018년 세월호 선조위(선체조사위원회)가 의뢰한 대로 세월호의 전복, 침몰 과정을 밝히기 위한 모형시험과 시뮬레이션을 실시했고 그 결과를 수백 쪽짜리 보고서로 제출했다. 마린은 "세월호에 외력이 작용했다는 가설을 도입하지 않고도 세월호의 선회와 횡경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조위 활동 종료 후에도 마린은 세월호를 놓지 않고 2020년 「선회 중 횡경사 각도와 승객 안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국제해사기구의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남서쪽 바다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 전세계 바다를 다니는 여객선과 승객의 안전 문제로 연결"(202쪽)된 것이다. 연구 프로젝트의 담당자 페라리는 "지금 우리가 더 안전한 배를 만드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이는 세월호의 침몰과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을 헛되게 하는 것"(203쪽)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세월호를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분쟁거리로 전락시키지 않고 다르게 보는 방법이 여기에 있었다. 과학이 이렇게 쓰일 수도 있다.


4장 '세월호학을 위하여'를 읽고, 그동안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고등학생 때부터 필통에 노란리본을 매달고 다니면서 '나는 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속으로 되뇌었을 뿐,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 생각을 실천하지는 않았다. 과학자가 아닌 시민으로서도 충분히 관련 기사를 찾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라도 과학으로 인해 발생하고 과학으로 인해 진상이 밝혀지는 사태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자율주행차처럼 겉보기에 반짝이는 것들에만 두었던 눈길을 돌려, 당면한 산업재해, 코로나19, 기후위기도 '과학적으로' 공부해야겠다. 어차피 과학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고 재난은 계속해서 찾아오니까.


그 과정이 귀찮고 지난하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겨버리고 나 몰라라 하지 않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똑똑한 인공지능에게 "모든 정보를 입력하고 모든 조건을 알려주면 우리를 대신하여 가장 좋은 결정을 내려주는 기계"의 탄생을 기대하지만, 이런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현실 정치의 개혁을 포기하고 오히려 그것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빠르고 정확한 기계들의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지루한 토론을 통해 편견과 오류를 수정해가며 하나씩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가는 민주주의를 낡고 답답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135-136쪽)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미신적인 성격을 띠며,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태하고 비과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태도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호기심과 의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인데, 이와 정반대인 가치관을 가지고 정치를 대하면 그게 과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시민의 자세일까.


결론은 진짜 과학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태도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사회를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민의 과학-하기일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쉽지 않았고 모든 내용을 긍정하지는 못했지만... 완독하고 질문거리를 얻었다는 점에서 괜찮은 책이었다.

과학은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아니며, 구체적인 시공간의 지저분한 현실에서 우리가 믿고 쓸 수 있는 정돈된 지식과 듬직한 도구가 되어준다는 점 때문에 더 귀하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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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자리 - 사람이 아닌 것들과 함께 사는 방법
전치형 지음 / 이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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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자리』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이 화제인 '2020년대 현재 인간 사회에서 로봇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자고 권한다.


제목만 보면 로봇이란 무엇이며 로봇이 자율성을 가지게 되면 인간과 같은 존재로 인정해야 하는가- 라는 해묵은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그런 유의 식상함은 탈피할 거라고 예고한다. 탁상공론 대신 현장에 뛰어들어 사태를 관찰하고 진단하겠다는 선언, 한 마디로 정리하면 '로봇 길들이기'다.


🔖(11쪽)로봇을 길들이자는 것은 로봇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공포에서 벗어나서 로봇을 제대로 알아보자는 말이다. (...)로봇은 잘하는 일이 많지만 인간과 사회가 설정한 적정한 조건하에서만 그렇다. 사람이 혼자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처럼 로봇도 홀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로봇 길들이기는 로봇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누구와 함께해야 하는지 설정하고, 절차를 점검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첫장은 카렐 차페크의 희곡 『R.U.R(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을 인용하며 은유로서의 로봇과 실존하는 기계로서의 로봇에 대해 말한다. 두 로봇은 희곡과 현실에서 이미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맥락 속에서 사용된다. 중요한 건 두 개념 사이에 확실한 선을 긋는 게 아니라, 로봇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29쪽)로봇은 인간과 기계의 본질적 차이가 무엇인지 묻기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우리가 로봇에게 법적, 사회적, 윤리적 지위를 부여하려 할 때 생기는 고민은 인간과 비교하여 로봇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를 규명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로봇은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하고 단일한 지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인간들 사이에 설정된 위계를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로봇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익숙한 로봇 이미지에서 멀어진다. 완전한 자율성을 가지고 감정을 느끼며 인간의 경계를 침범하는 똑똑한 인공지능 로봇은 너무 먼 이야기고 현실은 복잡하다. 나는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사회에 섞이는 데 크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는데, 다음의 인용문을 읽고 나서는 꽤나 안일하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관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정곡이 찔렸다.


🔖(41쪽)로봇과 '공존'하자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로봇이 절대 난민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로봇에게는 역사, 문화, 종교, 신념 등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기도 하고 위험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들이 없으므로, 그냥 우리 사이에 들어와서 살아도 골치 아플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낯선 로봇에게 열려 있는 만큼보다 낯선 사람을 환대하기가 더 어렵다니, 냉동실에 처박아두고 잊었던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발굴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어지는 내용도 대개 이런 식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이 일하는 자리에 로봇을 대신 채워넣고 싶어하지 않는가. 피땀눈물 흘리는 사람을 치워두고 무색무취의 로봇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하지 않는가. 인공지능의 뒤편에 알고리즘 설계자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나.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을 너무 쉽게 완전무결하다고 믿고 싶어하지 않았나.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알고리즘은 편향, 차별, 배제, 혐오를 실어나른다. 왁자지껄하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그나마 최근에 AI 챗봇 '이루다' 문제가 떠들썩했던 게 기술의 "유토피아적 자율성"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결론은 이것이다. 완전한 기계가 불완전한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환상(또는 공포)이 아니라, 불완전한 기계를 불완전한 인간의 옆에 두어 양자를 보완하는 현실 직시하기, 마지막으로 인간 옆에 인간이 있어야 함을 잊지 않기, 그 과정을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기로 하자.


🔖(239쪽)인간 세상에 들어오는 로봇에게는 적당한 로봇의 자리가 필요하고, 그 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로봇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인간의 일이다. 그렇게 하는 중에 인간도 자기 자리를 조금 옮겨 잡는다. 대략 이 정도가 인간이 감당할 만하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포스트휴먼의 조건이다.

로봇은 인간과 기계의 본질적 차이가 무엇인지 묻기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우리가 로봇에게 법적, 사회적, 윤리적 지위를 부여하려 할 때 생기는 고민은 인간과 비교하여 로봇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를 규명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로봇은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하고 단일한 지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인간들 사이에 설정된 위계를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 P29

로봇과 ‘공존‘하자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로봇이 절대 난민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로봇에게는 역사, 문화, 종교, 신념 등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기도 하고 위험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들이 없으므로, 그냥 우리 사이에 들어와서 살아도 골치 아플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P41

로봇이 들어가서 메꾸려고 시도하는 빈자리들을 보면서 우리는 왜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 P75

인공지능의 젠더 식별 정확도가 높아질수록, 트랜스젠더를 식별 대상에 넣지 않는 차별적인 시스템도 더 굳건해진다. - P147

물리적 얼굴을 특정한 정체성이나 성향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다. 알고리즘은 얼굴에 새겨져 있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읽어낼 수가 없다. 그 역사를 읽지 않는 것을 알고리즘의 객관성이라고 믿는 순간, 차별과 배제의 역사는 알고리즘을 통해 반복된다. - P148

인간 메인테이너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알리고 피할 수 있는 자율, 즉 아시모프의 로봇만큼의 자율도 허락되지 않는다. - P186

인공지능과 인공지구 모두 인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거나 변모한 존재들이지만 우리는 양쪽과 사뭇 다른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인공지능을 보면서 경이와 두려움을 고백하는 데 익숙하지만, 인공지구에 대해서는 이것이 우리 손으로 빚어낸 결과임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 P221

인간 같은 로봇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 속에서 각종 임무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일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 P238

인간 세상에 들어오는 로봇에게는 적당한 로봇의 자리가 필요하고, 그 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로봇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인간의 일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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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 만드는 법 - 끝없는 호기심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저자와 독자를 잇기 위하여 땅콩문고
임은선 지음 / 유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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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호기심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저자와 독자를 잇기 위하여" 과학책을 만든다니, 간지작살 뽀대작렬 카피다...☆


소설이나 인문/사회 분야의 책과는 다르게 과학책은 일반 독자들이 선뜻 매대에서 집어들지 못한다. 내용이 어렵고 독서 과정이 마냥 즐겁지는 않을 것이라는 오래된 편견이 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표지도 예쁘고 감각적인 일러스트와는 거리가 멀고 검고 희고 빨갛고 무거운 인상을 준다(10년 전에는...!). 그래도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책의 만듦새가 다양해지고 있는 듯하다. 


(당장 내 책장에 꽂혀 있는 <도핑의 과학>만 봐도 그렇다. 앞표지는 너무 어둡지 않은 군청색 배경에 육상 선수가 뛰어가는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사회, 역사와 접목하여 쓰인 책이긴 하지만 작년 여름 도쿄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이 책을 읽으면서 약물의 기전부터 국가 전체주의의 이면까지 새로운 지식을 많이 알게 되었다. 대중교양서로서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고전이 아닌 이상 아무래도 과학책은 방송에서 추천된 경우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청소년 추천 도서로 선정된 경우에도 판매 부수가 많아지긴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책은 잘 팔리지 않고, 교보문고 등 인터넷 서점에서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매출의 1% 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고정독자층이 너무 적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맹이로 가득찬 책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과학책 편집자들이 대단해 보인다. 


사실 독자가 적은 것도 문제긴 하지만, 저자를 찾는 것도 문제다. 문학은 공모전이라도 있어서 비교적 쉽게 창작자를 만날 수 있는데,  자연과학/공학 분야는 솔직히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논문의 참고문헌을 뒤져서 저자를 찾는다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 이다지도 품이 많이 들다니, 살짝 기가 질렸다^_ㅠ 


그래도 국내 저자 섭외 과정에 대해 말하는 꼭지는 흥미로웠다. 대학에서 기초교양과목으로 과학을 가르치는 교수에게 부탁하여 편집자가 직접 청강하러 다니고 수업을 녹취하여 원고를 쓴다거나, 과학자와 국어학자의 대화를 텍스트로 옮긴다는 기획은 굳이 해보지 않아도 상당히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편집자의 열정이 와닿아서, 나도 언젠가 한 번쯤은 저렇게 발로 뛰며 강연을 듣고 학교에, 연구실에, 박물관에 잠재되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며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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