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자리 - 삶을 지켜내는 과학을 위하여
전치형 지음 / 이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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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자리』는 시민이 과학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할지, 민주주의를 만난 과학과 과학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더이상 과학을 교과서와 연구실에만 존재하는 깨끗한(?) 비정치적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 애초에 과학도 여타의 학문과 문화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즘의 요구에 부응했던 우생학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오늘날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하여 찬성과 반대 양측이 설전을 벌이는 것도, 과학과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실험과 통계로 얻어지는 데이터는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연구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정치적 구호로 발전할 여지마저 있다. 그래서 과학자는 물론이고, 스스로 과학을 밥벌이 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민도 이 시국의 과학에 대해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독자에게 '세월호학'을 공부하길 권한다. 세월호라는 이름 자체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더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기존의 진영 논리는 잠시 미뤄두고 '과학적으로' 대상을 직시하라고 말이다. 


네덜란드의 해양연구소 '마린'은 2018년 세월호 선조위(선체조사위원회)가 의뢰한 대로 세월호의 전복, 침몰 과정을 밝히기 위한 모형시험과 시뮬레이션을 실시했고 그 결과를 수백 쪽짜리 보고서로 제출했다. 마린은 "세월호에 외력이 작용했다는 가설을 도입하지 않고도 세월호의 선회와 횡경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조위 활동 종료 후에도 마린은 세월호를 놓지 않고 2020년 「선회 중 횡경사 각도와 승객 안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국제해사기구의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남서쪽 바다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 전세계 바다를 다니는 여객선과 승객의 안전 문제로 연결"(202쪽)된 것이다. 연구 프로젝트의 담당자 페라리는 "지금 우리가 더 안전한 배를 만드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이는 세월호의 침몰과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을 헛되게 하는 것"(203쪽)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세월호를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분쟁거리로 전락시키지 않고 다르게 보는 방법이 여기에 있었다. 과학이 이렇게 쓰일 수도 있다.


4장 '세월호학을 위하여'를 읽고, 그동안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고등학생 때부터 필통에 노란리본을 매달고 다니면서 '나는 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속으로 되뇌었을 뿐,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 생각을 실천하지는 않았다. 과학자가 아닌 시민으로서도 충분히 관련 기사를 찾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라도 과학으로 인해 발생하고 과학으로 인해 진상이 밝혀지는 사태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자율주행차처럼 겉보기에 반짝이는 것들에만 두었던 눈길을 돌려, 당면한 산업재해, 코로나19, 기후위기도 '과학적으로' 공부해야겠다. 어차피 과학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고 재난은 계속해서 찾아오니까.


그 과정이 귀찮고 지난하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겨버리고 나 몰라라 하지 않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똑똑한 인공지능에게 "모든 정보를 입력하고 모든 조건을 알려주면 우리를 대신하여 가장 좋은 결정을 내려주는 기계"의 탄생을 기대하지만, 이런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현실 정치의 개혁을 포기하고 오히려 그것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빠르고 정확한 기계들의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지루한 토론을 통해 편견과 오류를 수정해가며 하나씩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가는 민주주의를 낡고 답답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135-136쪽)


'인공지능 민주주의'는 미신적인 성격을 띠며,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태하고 비과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태도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호기심과 의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인데, 이와 정반대인 가치관을 가지고 정치를 대하면 그게 과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시민의 자세일까.


결론은 진짜 과학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태도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사회를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민의 과학-하기일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쉽지 않았고 모든 내용을 긍정하지는 못했지만... 완독하고 질문거리를 얻었다는 점에서 괜찮은 책이었다.

과학은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아니며, 구체적인 시공간의 지저분한 현실에서 우리가 믿고 쓸 수 있는 정돈된 지식과 듬직한 도구가 되어준다는 점 때문에 더 귀하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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