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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김민철 지음 / 한길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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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완서의 글을 읽을 때 서사보다 꽃에 집중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완서의 글을 이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자전적 소설에 등장하는 역사와 인물 분석보다는 #김민철 작가가 권유하는대로 꽃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다. 이름도 생소한 야생화에만 소재가 국한된 게 아니라 미루나무, 플라타너스 등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이야기도 실려 있어 쉽게 읽힌다.

24편의 글 중 인상깊었던 3편의 글과 꽃을 소개한다. 첫째는 <티타임의 모녀> - 달맞이꽃 터지는 소리, 둘째는 <옥상의 민들레꽃> - 살아갈 힘을 주는 작은 희망, 마지막은 <나목> - 나무와 두 여인 이다.

#티타임의모녀 #달맞이꽃
(p54~55)
아득하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나도 방금 달을 밀어올린 숲이 웅성대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웅성거림은 미세한 바람이 되어 우리가 앉은 옥상의 공기를 소곤소곤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거 아닐까. 나는 그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웠다.
가만, 가만 저 소리 안 들려?
나는 입도 뻥끗 안 했건만 그이는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 사늉을 하면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다만 지훈이의 나스르르한 앞머리가 제법 나부끼는 걸 보았다.
아아, 달맞이꽃 터지는 소리였어.
그이가 비로소 긴장에서 해방된 듯 가뿐한 소리를 냈다.
➡️ 꽤나 낭만적인 장면이다. p58~59에 있는 보름달을 배경으로 한 달맞이꽃 사진도 근사하다. 달맞이꽃은 저녁에 피는 꽃이기 때문에 사진에 담기 어렵다고 한다. 꽃의 생기를 눈과 코와 손으로 느끼는 것보다 그 색감을 사진에 담아내는 게 더 익숙한 나로서는 아쉬웠다.

#옥상의민들레꽃 #민들레
(p64)
그 때 나는 민들레꽃을 보았습니다. 옥상은 시멘트로 빤빤라게 발라 놓아 흙이라곤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송이의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어있었습니다. 봄에 엄마 아빠와 함께 야외로 소풍 가서 본 민들레꽃보다 훨씬 작아 꼭 내 양복의 단추만 했습니다만 그것은 틀림없는 민들레꽃이었습니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톱니 같은 이파리를 들치고 밑동을 살펴보았습니다. 옥상의 시멘트 바닥이 조금 패인 곳에 한 숟갈도 안 되게 흙이 조금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흙을 찾아 공중을 날던 수많은 민들레 씨앗 중에서 그래도 뿌리내릴 수 있는 한줌의 흙을 만난 게 고맙다는 듯이 꽃은 샛노랗게 피어 달빛 속에서 곱게 웃고 있었습니다.
...흙이랄 것도 없는 한 줌의 먼지에 허겁지겁 뿌리 내리고 눈물겹도록 노랗기 핀 민들레꽃을 보자 나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 우울을 못이겨 반 죽은 채로 살던 날들이 있었다. 늦봄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죽고 죽이고 싶은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잡념을 흩어버리려고 동네를 걸었는데 마침 민들레 핀 데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조금, 마음이 조금 풀어져서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작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옥상의 민들레꽃>을 다시 보니 감상이 새로웠다. 민들레도 민들레를 틔운 이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목 #플라타너스
(p147~148)
나는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놓고 빨려들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 <나무와 두 여인>과 글을 번갈아 보면 소상한 감상이 와닿을 것이다. <나목>은 박완서의 등단작이다. 그래서인지 박완서의 <나목>을 향한 마음과 경아의 옥희도를 향한 마음은 닮은듯 하다. 본문을 다시 읽다보니 마른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추억할 사람들이 겹쳐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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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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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에서 '어두운 시대'라는 표현을 빌려왔다. 아렌트는 시적 은유로 '어두운 시대'를 사용한다.
텅 빔, 어둠, 붕괴된 기둥은 어두운 시대를 이미지로 드러내는 은유다(p39).
아렌트의 사유에서 '어두운 시대'는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 가지지는 않는다.
어두움은 밝음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숨김과 드러남,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각각 이해될 수 있다. 이때 밝음과 어둠이라는 용어는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된다(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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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는 실제로 소름 끼칠 정도로 신기한 20세기의 극악무도한 행위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두운 시대는 새로운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상 드문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밝은 빛을 기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 저작을 통해 거의 모든 상황에서도 밝은 빛을 밝히고, 지구상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수명을 넘어 밝은 빛을 제시할 수 있다(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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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어두운 시대를 밝힌 14명의 인물들을 소개한다.
#레싱 #로자룩셈부르크 #안젤로주세페론칼리 #카를야스퍼스 #이자크디네센 #헤르만브로흐 #발터베냐민 #베르톨트브레히트 #발데마르구리안 #랜달자렐 #마르틴하이데거 #로베르트길벗 #나탈리샤로트 #위스턴휴오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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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나는 카를 야스퍼스에 대해 리뷰해보겠다. 야스퍼스는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을 들어 어느 누구도 자기 나라의 시민이면서 세계시민이 될 수 없다(p173)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인류의 유대를 강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연합한 정치구조와 상호 이해를 세계정부의 기초로 삼았다(p55).
그의 철학에 따르면 인류의 통합과 유대는 하나의 종교, 철학, 또는 한 정부형태에 대한 보편적 동의에 있는 게 아니라 복수성이 다양성에 의해 동시에 은폐되면서도 노출되는 유일성을 지향한다는 신념 속에 존재한다(p184).
야스퍼스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세계통합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오늘날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통의 사실적 현재(p176)를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적, 군사적 공포 또한 포함된다.
세계의 통합에 기여해왔던 과학기술은 쉽사리 세계의 통합을 파괴할 수 있으며, 전세계적 통신수단은 동시에 전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설계되었다. 한 나라가 몇몇 사람들의 정치적 지혜로 발사한 핵무기가 결국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 생명을 절멸시킬 수 있는 만일의 가능성이 현재의 인류를 통합시키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의 연대는 매우 소극적이다. ...인류의 연대는 정치적 책임을 동반할 경우에만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인류의 연대는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일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부담에 대한 공통된 반발은 정치적 무감각과 고립주의적 민족주의, 즉 인간주의의 회적에 대한 열정이나 욕구라기보다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다(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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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소개를 통해 어두운 시대 가운데서도 적극적으로 사유하며 살아갔던 삶을 엿보고 감명받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어두운 시대는 너무나 길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아렌트의 정치적 이야기하기를 통해 한국의 어두운 시대를 천착할 수 있을 것(p58)이라는 역자의 말처럼, 세계사와 한국사에서 권력에 저항하며 살아갔던 인물들을 발굴해내어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시대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단어의 나열이 다소 어렵기는 했지만 역사와 정치에 무지했던 날들을 돌아볼 수 있어서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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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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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다. 무지개색으로 꾸며진 팬픽을 본편 사이사이에 끼워넣은 구성도, 아이돌을 다룬 소설이라는 점도, 비중 있는 인물이 여성밖에 없다는 것도 특이하다.
그와 동시에 친숙하고 보편적이다. 십대와 이십대 학창시절에 소위 말하는 '덕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아이돌에 열광하는 작가와 소설 속 인물들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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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을 덕질해본 적은 없지만 「라스트 러브」에 등장하는 제로캐럿의 멤버 다인, 루비나, 지유, 재키, 준, 마린의 사연이 익숙했다. 보이그룹 덕질 뿐이긴 하지만 레파토리는 비슷한 듯하다. 데뷔 전 재능과 노력에 대한 고민, 열정과 관계성에 얽힌 이야기들 말이다.
익숙한만큼 쉽게 읽혔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감정만은 쉽지 않았다.
춤을 잘 추는 다인, 다정하게 멤버들을 보살피는 루비나, 만능이라고 칭찬받는 준, 늦게 합류했지만 사랑스러운 마린.
그리고 최애멤버 재키가 탈퇴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로캐럿의 팬으로 남은 파인캐럿, 마린에게 집착하고 준을 병적으로 혐오하는 온리마린.
이들은 모두 사랑으로 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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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에 쓰인 사랑이 모두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데뷔 5주년을 맞은 제로캐럿에게는 단 하루의 단독 콘서트만이 허락되고 멤버들과 팬들 모두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예정된 마지막 앞에서 저마다 아쉬워하고 괴로워하고 남김없이 사랑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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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등장인물 중에서 준에게 마음이 많이 쓰였다. 최선의 의미와 범위를 모르고 자란 그에게 마린이라는 존재가 불편하게 여겨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린은 준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준은 누구보다도 마린에게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모호하다. 사랑받으면서도 괄시받고, 사랑해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본능적으로 미운,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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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사이에 수록된 일곱 편의 팬픽 중에서 세번째인 <수채화>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비 오는 날 뜻하지 않게 어두운 전시공간에 들어선 마린의 심정을 너무 잘 알 것만 같았다.
태연의 <수채화>를 들으며 읽었더니 몰입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노란색 배경에 연두색이 섞인 앨범커버를 보며 팬픽의 그림을 상상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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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무겁지 않은, 그러면서도 활자를 훑을 때 눈과 마음은 떨리는 소설을 읽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누군가는 가벼운 내용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를 바친 아이돌을 떠올리며 울며 감동할 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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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발문을 읽으며 잠잠히 생각이 많아졌다. 그 내용을 일부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하는 2019년 가을에 f(x)는 데뷔 10주년을 맞았고, 동시에 멤버인 엠버와 루나가 계약종료로 소속사를 떠났다. 다섯번째 정규앨범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의 활동 전망은 불투명하다. 조우리는 내내 약간의 슬픔에 잠겨있다."

잠시 뿐이지만 나 약시 슬픔에 잠겼다는 게 부끄러움을 덜어낼 핑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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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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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 91년생, 2008년 7월 14일을 찢어버리고 싶다고 일기를 쓴 여자.
제야는 고민과 호기심 많은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2008년 7월 14일 하루 전까지만 해도. 2008년 7월 13일에 제야가 쓴 일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p16)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싶다. 번역이나 통역 일도 멋있을 것 같다.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걸 생각하면 절로 돈 걱정이 든다.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 속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p17) 그냥 지금이 좋다. 하루하루를 꼭꼭 눌러서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다.

2008년 7월 14일 전까지 당숙은 제야에게 불편하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어른이었다.
2008년 7월 14일의 그는 비가 오는 아침에 제야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컨테이너에서 제야를 성폭행했다.
(p91) 네가 정말 좋다고 당숙은 말했다. 울지 말라고,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너는 정말 특별하다고, 너를 너무 좋아한다고 말했다.
(p101) 제야는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기를 멍청하게 쳐다봤다. 낯설었다. ...울어? 우는 거야? 왜 그래? 어디야? 엄마가 거듭 물었다. 제야는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제야가 당한 일에 대해 주변인물의 반응이 아주 제각각이다. 엄마는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제니는 당숙의 얼굴에 침을 뱉고, 승호는 (한참 뒤의 일이지만) 당숙의 갈비뼈를 부러뜨린다. 경찰은 제야가 피해자답지 않다며 폄하하고, 아빠는 결국 당숙과 합의를 본다.
(p118) 제야는 당숙을 보고 주저앉았다. 당숙은 제야를 못 본 척 하며 경찰들과 이야기를 했다.

당숙의 변명이 아주 가관이다.
(p119)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 사실 제야와 제가 좀 특별한 관계이긴 했어요. ...제야가 저를 남자 대하듯 그랬단 말입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강제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p124) 그게 제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고 저당잡힐 만큼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제야는 2008년 7월 14일, '그 날' 이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제야는 소문의 그 여자애가 되었고 도망치듯 강릉이모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강릉이모는 엄마의 오랜친구로, 병원에서 일하며 혼자 사는 여자 어른이다.
제야는 계속해서 힘들어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고통스럽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당숙이 생각나고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제야는 '그 날' 이후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름에는,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안정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그래도 제야는 강릉 이모의 보살핌 덕분에 검정고시도 통과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수능시험도 치른다. 점점 회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던 제야는 스물두살 때부터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며 제니와 함께 자취하게 된다. 제야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를 피하며 친구를 사귀려고 애쓰지 않는다.
(p177~178) 제야는 차차 깨달았다. ...이모의 분위기가 제야를 감싸안고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걸었던 것이다. 익명의 도시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괜찮아진 줄 알았던 제야는 더 나빠졌다.

제야는 대학에서 실패한다. 고향 후배를 만난 뒤 남자친구에게 '그 날'의 일을 말하고 부정당한다. 그리고 제니가 집을 비운 사이 정말로 죽으려한다. 그때 승호가 등장한다. 움직일 수가 없는 제야를 부축하고 천천히 일어난다. 아무도 제야를 도와주지 않을 때 나타나는 건 결국 제니와 승호와 강릉이모 뿐이다.

제야의 고뇌와 감정의 치달음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정리되기 시작한다(p209~217). 제야는 당숙이 '괴물도 짐승도 아니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어른 남자였다. 그렇다는 걸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어서, 이렇게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한다.

제야에게 오랜 물음에 대한 답을 너무 쉽게 읽어버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에게조차 제야는 '너는 날 원망하면서도 응원할'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제야의 부름에 답할 시간이다. 잘 살아남고, (강릉이모처럼) 애써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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