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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ㅣ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야, 91년생, 2008년 7월 14일을 찢어버리고 싶다고 일기를 쓴 여자.
제야는 고민과 호기심 많은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2008년 7월 14일 하루 전까지만 해도. 2008년 7월 13일에 제야가 쓴 일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p16)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싶다. 번역이나 통역 일도 멋있을 것 같다.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걸 생각하면 절로 돈 걱정이 든다.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 속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p17) 그냥 지금이 좋다. 하루하루를 꼭꼭 눌러서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다.
2008년 7월 14일 전까지 당숙은 제야에게 불편하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어른이었다.
2008년 7월 14일의 그는 비가 오는 아침에 제야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컨테이너에서 제야를 성폭행했다.
(p91) 네가 정말 좋다고 당숙은 말했다. 울지 말라고,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너는 정말 특별하다고, 너를 너무 좋아한다고 말했다.
(p101) 제야는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기를 멍청하게 쳐다봤다. 낯설었다. ...울어? 우는 거야? 왜 그래? 어디야? 엄마가 거듭 물었다. 제야는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제야가 당한 일에 대해 주변인물의 반응이 아주 제각각이다. 엄마는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제니는 당숙의 얼굴에 침을 뱉고, 승호는 (한참 뒤의 일이지만) 당숙의 갈비뼈를 부러뜨린다. 경찰은 제야가 피해자답지 않다며 폄하하고, 아빠는 결국 당숙과 합의를 본다.
(p118) 제야는 당숙을 보고 주저앉았다. 당숙은 제야를 못 본 척 하며 경찰들과 이야기를 했다.
당숙의 변명이 아주 가관이다.
(p119)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 사실 제야와 제가 좀 특별한 관계이긴 했어요. ...제야가 저를 남자 대하듯 그랬단 말입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강제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p124) 그게 제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고 저당잡힐 만큼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제야는 2008년 7월 14일, '그 날' 이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제야는 소문의 그 여자애가 되었고 도망치듯 강릉이모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강릉이모는 엄마의 오랜친구로, 병원에서 일하며 혼자 사는 여자 어른이다.
제야는 계속해서 힘들어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고통스럽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당숙이 생각나고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제야는 '그 날' 이후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름에는,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안정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그래도 제야는 강릉 이모의 보살핌 덕분에 검정고시도 통과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수능시험도 치른다. 점점 회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던 제야는 스물두살 때부터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며 제니와 함께 자취하게 된다. 제야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를 피하며 친구를 사귀려고 애쓰지 않는다.
(p177~178) 제야는 차차 깨달았다. ...이모의 분위기가 제야를 감싸안고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걸었던 것이다. 익명의 도시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괜찮아진 줄 알았던 제야는 더 나빠졌다.
제야는 대학에서 실패한다. 고향 후배를 만난 뒤 남자친구에게 '그 날'의 일을 말하고 부정당한다. 그리고 제니가 집을 비운 사이 정말로 죽으려한다. 그때 승호가 등장한다. 움직일 수가 없는 제야를 부축하고 천천히 일어난다. 아무도 제야를 도와주지 않을 때 나타나는 건 결국 제니와 승호와 강릉이모 뿐이다.
제야의 고뇌와 감정의 치달음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정리되기 시작한다(p209~217). 제야는 당숙이 '괴물도 짐승도 아니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어른 남자였다. 그렇다는 걸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어서, 이렇게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한다.
제야에게 오랜 물음에 대한 답을 너무 쉽게 읽어버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에게조차 제야는 '너는 날 원망하면서도 응원할'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제야의 부름에 답할 시간이다. 잘 살아남고, (강릉이모처럼) 애써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