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가 정확히 인식했듯이, 불로소득자의 불로소득은 생산자들이 스스로 소비하는 물자의 양을 초과해 생산하는 잉여에서 나온다.
불로소득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대로 100만 파운드를 받는다고 하면, 그 돈은 그것으로 살 수 있는재화와 서비스가 존재해야만 가치를 갖는다. 이 재화와 서비스는 다른사람들이 어디에선가 생산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건강한 성인이 불로소득을 얻는다면 그건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맞서야만 한다. - P86

세계은행WorldBank 수석 경제학자였던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부자들이 얻는 수익은 상당 부분 지대 추구가 활발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금융 부문에서 행해진 지대 추구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지대 추구는 소득을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이전할 뿐만 아니라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부를 창출하는 생산적인 용도에서 단순히부를 추출하는 용도로 자원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지대 추구에서 생기는 돈은 생산에 재투자되지 않은 채 비생산적인 불로소득자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 - P89

지대와 마찬가지로 이자는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이다.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 대출 제공에 약간의 행정 비용이 들 수도 있지만, 금액이 얼마 안 될뿐더러 차입자에게 전가할 수도 있다. 지대와 마찬가지로 이자는 소득을 얻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잉여를 생산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대출자들이 불로소득으로 구입할 물자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대와 마찬가지로, 이자는 생산자들에게 기생충과 같다. 마이클 허드슨의 표현에 따르면, 이자는 경제에 ‘사중적 비용‘ [dead-weight cost: 사회 전체의 후생이 감소해서 생기는 비용]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전transfer, 즉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네거티브섬 게임negative-sum game이다. 다시 말해 이자는 다른 요인들이 일정하다면 경제를 악화시킨다. - P102

복리 이자는 일반적으로 일정 기간 금액이 고정되는 지대와 달리, 또 생산에서 생기는 이윤과도 달리, 대출자에게 계속 증가하는 불로소득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지속 불가능한 일이다.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지 않은 한, 부채는 결국 상환 불가능한 수준까지 늘어날 것이다. 어떤 물건이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마지막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자연을 보면, 어떤 개체는 일정 기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증가세가 둔화하다가 마침내 멈추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암세포의 증식처럼 예외도 있다. - P105

사적인 신용화폐가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채에 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힘들여 벌어들인 돈을 다른 이들에게 빌려주는 데 대한 보상이 바로 이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출자는 검소하고 신중한 반면 차입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이자지불은 대출자의 미덕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따뜻하고 도덕적인 이야기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화폐 대출의 행정 비용을 초과하는 이자는 불로소득이다. 게다가 그렇게 ‘훌륭한‘ 기원을 가진 신용은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신용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 P120

신용은 유용할뿐더러 효율적인 현대 경제에 정말 필수적인 요소지만,
이자는 불로소득이자 경제에 사중적 비용으로 작용하며 부를 위쪽으로 재분배하고 미래 세대에게 막대한 부담을 안겨준다. 윤리적 의문이 제기되고 역기능을 일으키는 이자에 대해서는 이자율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신용을 배분하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저축예금을 이용하든 신용화폐를 창조하든 신용의 배분을 통제하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는다. ‘경제의 지휘부‘를 통제하면서 경제발전의 양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은행에 이러한 권한을 허용하는 경우, 권한에 따르는 책임은 예금자(채권자)와 주주에게 돌아간다. 민간은행은 이익이 나고 주식 가치가 계속 상승하는 한 대출이 어디로 가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건 상관하지 않는다. 금융‘투자‘는 실물‘투자‘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오늘날 금융 엘리트들은 개인·기업·정부를 대상으로 이자를 추출하는 것이 부를 창출하는 한 형태라고 여긴다. - P130

지난 30년 사이에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면서, 젊은이들은 자신을 시장에서 거래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고용주를 설득하기 위해 취업용 이력서를 잘 작성하라는 충고를 받게 되었다. 한편, 교육기관은 학생들이 노동시장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었다.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의존성이 문화적으로 강화된 것이다. - P135

순수 자본가, 즉 기업을 소유만 하고 경영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자본가는 부의 창출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피고용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노동자(관리자 포함)가 만드는 생산물의 가치와 생산비의 차액을 전유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소득은 불로소득이다. 그것은 임대료와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기여가 아니라 기존 자산에 대한 사적 통제에의존한다. - P135

우리는 왜 소유주, 특히 자신의 주식이 가져다줄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주주가 기업에 대해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피고용인은 아무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계속 질문해야 한다. 노골적으로 불공정한 이 제도는 합리적 논쟁이 아닌 힘이 승리한 역사적 투쟁의 산물임에도, 우리는 마치 ‘원래 그런 것‘인 양 그것을 당연시한다. 자본가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어서 노동자가 생산하는 생산물과 수입을 소유한다. - P148

주택 소유자들은 자기 집을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투자‘로 간주하도록 권유받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모기지 부채를 ‘투자‘로 여기기까지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기 힘으로 불로소득자가 되기 위해 밟아야 하는 한 단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고 자동차나 중고 자전거를 살 때는 원래 가격보다 낮은 가격을 낼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가? 왜 주택은 그렇지 않을까? 혹자는 집값 상승 덕분에 보통의 주택 소유자가 국가의 경제성장에 동참할 수 있다는 말로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가끔은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필요에 기반을 둔 이전지출처럼 민주적 의사결정에 따라 이뤄진 잉여의 분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부를 일부 계층이 사유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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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측 이탈 방식)이 하락한 성과를 회복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예민한고객과 둔감한 고객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가장 좋다. 예민한 고객은 기업이 원상회복하도록 피드백 메커니즘을 제공하며, 둔감한 고객은 기업이 원상회복하도록 시간과 돈을 제공해준다. 물론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고객이 민감할수록 경쟁적 시장이 기능하기에 유리하다. - P71

지금까지의 주장은 여러 기업이 경쟁한 결과 시원찮은 것으로 판명된 제품은 압력을 받음으로써 혹은 그에 따르는 해결책을 통해 도태될 것이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를 버리더라도 단일 기업이 단일 생산자인 경우보다 여러 기업이 경쟁하는 경우가 오히려 열등한 해결책일 때도 있다. 여러 기업이 경쟁을 하게 되면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끊임없는 환상, 즉 경쟁사의 제품을 구매하면 불량 제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독점체제 하의 소비자는 있지도 않은 ‘개선된‘ 제품을 열심히 찾아 헤매는 대신 포기하고 다른 데서 행복을 찾을것이다. - P75

급진적인 평론가들은 안정적인 정당체제가 구축된 사회에서 거대 정당들 간의 경쟁이 실제로는 ‘진정한 선택‘적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물론 경쟁적인 정당체제가 없다고 해서 시민들이 근본적인 사회·정치적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논의의편의를 위해 근본적인 변화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두고 봐야 할 문제다. 그럼에도 경쟁적 정당체제가 없었더라면 일어날 수도 있었을 혁명의 가능성이 경쟁적으로 보이는 정당체제 때문에 집권당에 대한 순화된 불만족에 그치고 만다는 급진적 평론가들의 주장은 옳다. 비록 이러한 순화 능력이 일상적으로는 자산이 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짐으로 변하는 상황을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 P76

개략적으로 보면 항의는 이탈의 잔여 범주로 취급할 수 있다. 이탈을 택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항의를 택할 수 있고, 이경우 이탈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의의 정도는 품질에 대한 수요의 탄력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인과관계가 반전된다. 즉 항의를 표시할 잠재력이 있다면 항의의 실질적 수준은 수요가 얼마나 비탄력적인가 혹은 이탈의 기회가 얼마나 제한적인가에 달려있다. - P87

이러한 발견에서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교육 문제와 연결시켜보면 일반적으로 ‘삶의 질‘로 개념화된 다수의 기본적인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의 방식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결코 비현실적이지는 않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론을 하나 제시하자면, 이러한 기본적인 서비스의 경우 품질 저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항의 방식이 필요하고 이는 저품질의 범주보다는 고품질의 범주에서 쉽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사이의 삶의 간극은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이것은 특히 상향적인 이동성을 가진 사회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나의 사회계층에서 다른 사회계층으로 옮겨가는 통로가 제한된 사회에서는 항의 방식에 의존할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강화된다. 모두 자신이 속한 위치에서 삶의 질을 방어하기 위한 동기부여가 강할 것이다. 위로의 이동성이 강한 사회에서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 사이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경직되어가고 있다. 반면 이러한 현상은기회의 균등과 사회적 상향 이동성이 조화를 이루어 효율성과 사회 정의를 보장하는 것이 오랫동안 당연시된 문화에서는 쉽게 관찰하기 어렵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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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하임에서 총회장 선거가 있던 날 아침, 커크가 연설하던 바로 그 방 안에는 1970년대 ‘근본주의자들의 점령‘을 설계했던 인물 중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바로 페이지 패터슨이다.
목사이자 신학자인 패터슨은 남침례교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이 교단의 가장 권위 있는 신학교 두 곳에서 총장으로 재직했다. 패터슨은 남침례교를 강경하고 가차 없는 단체로 재편했다. 그는 문화에 대한 이단적 사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성적 학대와 같은 내부 관행을 문제 삼는 외부의 비판을 차단하는 수단으로써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했다. 이제 남침례교는 패터슨과 그의 동료들이 뿌린 씨앗을 거두고 있었다. 가이드포스트 보고서는 사건 은폐에 가담한 장본인으로 패터슨을 포함한 남침례교 유명 인사들을 지목했다. 패터슨은 강간 사건들을 반복해서 부적절하게 처리하고 그중 한 건은노골적으로 은폐한 혐의가 드러나 2018년에 사우스웨스턴신학교에서 해고되었다. (보고서가 발표되고 일주일 후, 패터슨은 로버트 제프리스의 초청을 받아 댈러스제일침례교회에 가서 설교했다.) - P535

그 후 일년 동안 로이스는 하베스트바이블채플에서 벌어진 온갖 범죄를 폭로하는 수십 개의 기사를 <로이스 리포트>에 게재했다.
교회 장로들은 맥도널드가 목회 사역을 이어 가기에 부적합하다고 본다는 사실을, 맥도널드가 직원들을 괴롭히고 학대했으며 교회 헌금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웠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맥도널드는 로이스의 보도를 막으려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되었고, 로이스는 계속해서 일을 이어 갔다. 자신의 보도로 맥도널드가 교회에서 해임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해임된 맥도널드가 재직 중 한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직원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 교회돈으로 호화 여행을 다녔다는 사실, 교회에서 받는 봉급 액수를 감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 하베스트 사건으로 크게망신을 당하고도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등을 폭로했다. - P555

존 맥아더 (John MacArthur)를 보라. 캘리포니아 목사로, 오랫동안 보수적이면서도 온건한 현대 복음주의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이땅의 우선순위보다 영원한 우선순위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극단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맥아더와 교회 지도부가 교인 여성과 어린이에게 일어난 신체적학대를 무시하고 학대 문화를 조장했다는 이야기를 로이스가 폭로했을 때, 사람들은 로이스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 P569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1944년부터 미국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지 물었다. 이 수치는 지난 세기 내내 90퍼센트 이상을 유지했으며, 최근인 2016년에도 89퍼센트의 미국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2022년에는 그 수치가 사상 최저인 81퍼센트로 떨어졌다. 같은 해에, 1972년부터 종교적 동향을 분석해 온 일반사회조사(GSS)는 50주년 기념 보고서를 발표했다. 결론은 놀라웠다. 50년 전에는 미국인의 단 9퍼센트만이 예배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다고 답했지만, 2022년에는 그 수치가 33퍼센트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과와 다른 조사 결과는 미국인들이 종교를 버리는 역사적인 속도를 보여 주는 수년간의 사회과학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07년에는 종교가 없다고 답한(흔히 "무종교‘로 칭하는) 미국인의 비율이 16퍼센트로 추정되었으나, 2021년에는 30퍼센트에 이르렀다. - P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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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받아들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일부신학자들이 "과거에 세례를 준다"라고 부르는 행위를 무척 능숙하게 잘한다.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조지 워싱턴이 밸리 포지에서 한 목사에게 얼음물에 몸을 담그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퍼트리고, 실제로는 노예 소유자이자 쾌락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토머스 제퍼슨이 신을 두려워하는 인도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실제로는 부흥 운동가들을 조롱했고 교회에 거의 출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링컨이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을 이용해 그를 복음주의자로 묘사하는 식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백악관 집무실 기도 모임 때 찍은 사진을 내밀며 트럼프가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 P318

‘보통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으면, ‘트럼프 지지, 공화당, 우파, 낙태 반대,
동성애 혐오‘라고 답할 겁니다. 아마도 목록이 끝없이 이어지겠죠."
토머스가 내게 말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이 그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공적인 우선순위입니다.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시는 다른 것들이 아니라요." - P325

열여섯 살에 독일 군대에 징집된 몰트만은 처음으로 맞닥뜨린 영국 군인에게 항복했고, 3년간 전쟁 포로로 지냈다. 이때 한 미국인 군목이 준 성경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잔혹 행위에 대한 몰트만의 성찰, 그리고 우리와 함께 피 흘리고 슬퍼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몰트만의 가르침은 그 어떤 B-17 폭격기 못지않게 나치즘의 마법을 깨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P368

정치를 이해한다는 것, 적어도 마스트리아노와 같은 극단적인 인물이 공화당 내에서 이렇게 큰 영향력을 얻게 된 이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제 극단주의자들이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 극단적인 인물들이 권력을 얻지 못하게 막아 주던 전설적인 문지기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우리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짓던 상상 속의 불문율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미국 정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기독교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 P375

메택서스는 자기 홍보 욕구가 매우 강했다. 언론에 노출될 기회를 잡으려고 안달했으며, 폭스뉴스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는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국가조찬기도회에서는 오바마에게 자신의책 《디트리히 본회퍼 Bonhoeffer》를 읽어 보라고 집요하게 요구했고,
결국 대통령은 장난스럽게 책을 들어 보이며 메택서스가 수년간 홍보자료로 활용할 사진을 찍게 해 주었다. 그러나 화려한 표현 방식은 오히려 그의 주장이나 분석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기독교 독자들은 《디트리히 본회퍼》에 열광했지만, 본회퍼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역사가들은 메택서스가 이 책에서 다룬 분석과 결론을 강력히 비판했다. 메택서스에게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독특한 개성과 진정성을 갖춘 인물이라는 인식 덕분에 명성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섬뜩할 정도로 익숙하고 피상적인 냄새를 풍겼다. - P467

기독교인들은 보편적으로 실천해야 할 습관을 선택적으로 실천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들은 마이어스가 유대인을 해충"이라고 부른 히틀러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조직"이라고부르는 낙태 시술자들처럼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행위의 위험성에관해 이야기할 때는 박수를 치지만, 이민자를 "외계인"이라고 부르거나 민주당원을 "악마"라고 부르거나 LGBTQ 청소년을 "휠체어를탄 레즈비언"이라고 부를 때 드러나는 자신들의 편견에 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무시한다. - P478

기독교인들은 지난 10년동안 좌파가 주요 문화 기관을 장악하고 성, 결혼 등과 관련된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에 압도당한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라디오 방송과 폭스뉴스 등 편향된 정보 환경 속에 점점 더 깊이 파묻혔다. 그곳에서는 정책에 대한 모든 이견(異見)을 국가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대리전으로 취급했다. 신자들은 이를 새로운 교리로 받아들였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프렌치역시 이런 상황을 인식했으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한때는 격렬하나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정치 참여가 사실은 유독하고 악의적이며 편집증적인 사고방식으로 밝혀졌고, 트럼프는 이를 능숙하게 이용하여 대통령직에 올랐다. - P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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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드러난 몸
폴라 구더 지음, 오현미 옮김 / 도서출판 학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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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구더(1969년생)는 옥스퍼드 퀸즈 칼리지에서 신약성서학을 전공한 영국 신학자이자 성공회 평신도 독서자(lay reader)입니다. 그녀는 현재 세인트 폴 대성당의 canon chancellor(참사회장, 성공회 조직에 관하여 잘 모르지만 이렇게 번역될 것 같네요) 입니다 . 이전에 리폰 칼리지, 킹스 칼리지, 더럼대학교 등에서 가르쳤으며, 성서공회 상임 신학자(2013~2017년)와 버밍엄 교구 선교, 학습 및 개발 책임자(2017~2018년)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톰에게 헌정할 정도로 톰 라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폴라 구더는 이 책에서 몸에 관한 바울의 일반적인 견해를 다룹니다. 소위 바울의 인간학적인 개념의 중심은, 프뉴마, 프쉬케, 사르크스, 소마로 흔히 영, 혼, 육신, 몸으로 번역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개념들이 바울이 이런 단어들을 사용한 용례에 따라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기독교적인 이해에 따라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는 보통 영혼 구원에 대해서 말한다거나, 금욕주의가 온전한 기독교적 실천이라거나, 인간은 몸과 영과 혼 이렇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통속적인 이해의 근원을 바울에게 돌립니다. 폴라 구더는 이는 정당하지 않으며, 바울의 인간학적 개념들의 미묘한 맥락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육신과 몸이라는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이해한다거나, 혼과 영이라는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육신과 몸은 벗어버려야 할 부정적인 대상이며 혼과 영만이 인간의 주요 본질이라는 오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각각은 엄밀히 구별되는 개념이며, 심지어 몸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인 ‘소마‘는 바울이 부활의 상태를 언급하는 단어인 ‘프뉴마티코스(신령한)‘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몸(소마) 자체는 중립적인 개념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이해없이 바울서신을 읽는다면, 수많은 부분에서 막히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불트만 때 이미 등장했습니다. 한동안 바울신학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고,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논의가 주요 담론이 되면서 한쪽으로 미뤼졌었고 최근에 간혹 이런 식으로 간략히 정리된 책들이 나올 뿐입니다. 폴라 구더의 이 책에는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해당 주제에 관해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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