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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아일랜드 - 역사와 문학 속의 아일랜드
박지향 지음 / 새물결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주로 19세기 후반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와 버나드 쇼, 윌리엄 예이츠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 책은, 문학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이상은 좌절된 듯이 보인다. 역사책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저자의 역사적 관심 폭이 좁고, 문학책이 되기에는 저자의 문학적 깊이가 얕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 먼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엘리트들만의 생각으로, 특히 잉글랜드계 아일랜드 작가들의 생각으로 아일랜드의 역사를 구성하기에는 사회적, 시간적 폭이 너무나도 좁다. 책 제목이 너무나 거창하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으로 와일드와 쇼, 예이츠에 대한 문학적 깊이를 통해 아일랜드 문화의 다양성을 성찰하기 보다는, 이미 정해진 아일랜드적 문화나 또는 아일랜드성에 이 세 작가를 마음대로 구겨 넣고 있다. 결국 이 세 작가들의 아일랜드성이란 흔히 세간에 도는 지식인들의 신변잡기가 되어버린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점 외에도 세부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이 책의 단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구성적 문제점: 몇 안되는 사람들로 책 하나를 쓰려니, 했던 이야기가 자꾸만 되풀이 되고 있다. 가장 극명한 예를 들어보자.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2부는 와일드, 쇼, 예이츠 단 세 명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2부 1장이 이 세 명의 소개이고, 2장이 세 명간의 관계이고, 3장은 와일드만, 4장은 쇼만, 5장은 예이츠만 다루고 있다. 더구나 예이츠는 이미 1부 문예운동을 다루는 부분에서 충분히 언급했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산만함은 구성적 짜임새가 탄탄하지 못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아일랜드의 역사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연결되어 있지도 못하고, 주요 테마들이 긴밀하게 짜여져 있지도 못하다. 이미 예전에 썼던 영국사와 마찬가지로 중구난방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2. 게일민족주의에 대한 태도: 분명히 편협하고 폐쇄적인 신화화 된 민족주의가 시기에 적절하지 않게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저항세력에게 있어서 발현되는 이러한 신화는 분명히 큰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가만히 편안한 방석에 앉아 공과를 따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없어져야 할 문제점으로 생각될지라도, 옆에서 내 동료가 피흘리는 전쟁터에서도 이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칼 폴라니는 분명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파시즘에 발발하자, 공산당에 가입하는 정치적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만하다. 저자가 좋아하는 탈식민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성의 극대화이지, 무정치성을 통한 정치성의 방임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3. 니체 앞에선 와일드와 예이츠: 왜 와일드가 쇼나 예이츠와 함께 도매금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와일드는 정말로 니체 철학에 경도된 무정부주의적 자유인이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 선언한 것이 신학적 반대가 아니라, 근대적 인간 주체의 죽음이라는 철학적이고도 미학적 선언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와일드의 정체성은 그러므로 자신이 아일랜드에 관해 좀 언급했다하더라도 단순히 아일랜드에 묶어 놓을 수는 없다.
함께 니체에 경도되었을지라도 와일드의 니체와 예이츠의 니체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 하이데거의 강압적인 니체 해석을 벗어나 푸코나 들뢰즈에 의해 복원된 니체 철학에 따르면, 와일드는 아일랜드 민족성에 경도된 예이츠보다는 민족을 떠나버린 베케트에 더 가깝다. 예이츠의 니체는 분명히 근대의 틀에 가둬져버린 니체, 주인의 도덕이 현실적인 귀족성과 파시즘에로까지 나아가버린 변질된 긍정성이라고 할만하다. 저자의 예이츠에 대한 편애는 2번의 문제점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와일드가 분열된 정체성 자체를 즐긴 사람이라면, 예이츠는 분열된 정체성을 민족에 수렴시키고자 애쓴 사람이었다. 모든 예술의 정치성에 주목할 때, 와일드의 웃음이 세상의 질서를 비틀어버리는 유머였다면, 예이츠의 웃음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