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한길로로로 5
발터 비멜 / 한길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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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로로로 시리즈가 한 사람의 삶의 연대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면, 적어도 '하이데거' 편은 사상의 궤적을 간결하고도 밀도있게 서술하고 있다. 저자 발터 비멜이 하이데거가 스스로에게 던진 철학적 질문들에 따라 독자를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철학에 대해 하이데거 자신이 던진 질문과 이에 대한 하이데거 자신의 답변,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금 던져진 철학적 물음들의 연속들...

--비멜의 '하이데거'는 구불구불한 하이데거 철학의 숲길에 접어든 독자에게 이정표이자 지도의 역할을 한다. 하이데거가 먼저 밟고 지나간 철학적 발걸음을 지시하는 이정표이자, 하이데거의 선배들과 친구들, 또 후배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제시하는 지도. 이 작은 지도에서 하이데거의 발걸음과 이와 교차해 다른 방향으로 뻗어간 다른 철학자들의 발자취가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멜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결론에 멈춰서기보다는 그 질문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입문서임에도 이 책을 독해하기란 쉽지 않다. 복잡한 길들을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하이데거 철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그래서 그의 철학이 지닌 복잡함을 희생시키는 기계적 매뉴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하이데거 저작과 주인-노예의 관계를 맺기 보다는 친구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친구관계는 옮긴이의 덕택에 우리에게도 맺어질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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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1 - 전란의 시대
홋타 요시에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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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역사에서 16세기 전반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찬란한 문화 부흥의 시기라면, 16세기 후반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었던 참혹한 종교 전쟁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처절한 충돌은 다양한 문화적 충격에 대한 획일적인 종교적 포획이자, 강력한 왕권 중심의 국가 건설을 다시 한 번 좌절시키고자 하는 탈중심적 경향성의 발로였다. 미셸 드 몽테뉴, 자신의 시대의 사상엔 너무나도 낯설은 이방인이었지만 자신의 시대를 처절하게 살다간 교양인이었다. 종교의 외피를 둘러 쓴 사상적 독단론과 정치적 잔혹함은 자유로운 사유의 발걸음을 따라간 그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은 것이었다. '에세'(수상록)라는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그의 생각을 표현한 그릇이자 그 내용물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현실과 개인의 사상이 잘 짜여져 있다는 데에 있다. 몽테뉴의 저작들에 대한 이해, 몽테뉴 개인의 삶에 대한 애정 깊은 시선, 복잡하기 그지없던 당시 정치적 판도에 대한 통찰, 그럼에도 놓치지 않고 있는 장기지속적인 일상생활의 모습들 등 개인의 다양한 차원과 당시 현실의 다양한 차원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몽테뉴에 대한 전기로도 손색없지만, 16세기 후반 프랑스에 대한 폭넓은 역사서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PS: 하인리히 만의 소설 앙리 4세, 영화 여왕 마고, 노스트라다무스 등은 이 시대한 이해를 보다 잘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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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빈의 일요일
조르주 뒤비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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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홀로코스트와 군사 열병의 신. 재확립된 질서의 신. .....이 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선가 항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갑작스레 뜬금없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이 문장, 카뮈의 <페스트> 마지막 구절과도 같은 이 문장, 넓은 의미의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이문장을 잊지 말자. 왜냐하면 이 책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다루고 있는 동시에, 기억에 대한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뒤비는 1214년 7월 27일 일요일에 벌어진 부빈전투가 이후의 프랑스라는 국가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이 전투가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그러하듯, 당장 프랑스라는 국가를 순식간에 현실적으로 산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 위계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국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끔한 가장 중요한 현실적 순간이었다.

세 위계가 1789년까지 취약한 국가의 외피를 지탱한 사회의 상상적 구조물이었다면, 혁명을 통해 등장한 국민국가란 바로 이 세 위계의 국가가 만들어 놓은 두터운 외피를 보호막으로 삼았다. 이러한 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프랑스의 이데올로기인 세 위계는 다시 전지전능한 신의 대리인인 프랑스 왕의 신성함 속으로 한번에 수렴된다. 그것은 신화를 이룬다.

이렇게 해서 전쟁에 대한 기억은 이후로 사회를 획일화 하려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된다. 뒤비가 중세를 벗어나 이후에 표현된 부빈전투에 관한 담론을 추적하는 과정은 이러한 기억의 주조과정에 대한 고찰이다. 이러한 고찰은 위에서 말했듯 다시 '이미 주조된 기억에 대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뒤비는 촌철살인과도 같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첫째 과연 국가란 자명한 것인가? 둘째 우리의 기억은 정당한가? 이러한 두 가지 질문은 이제 역사가 자명한 과거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익숙한 기억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 그것은 역사가 객관적 진리를 보장하는 과학에 매달려 있지 않고, 언제나 현실 비판을 감행하는 정치에 속해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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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아일랜드 - 역사와 문학 속의 아일랜드
박지향 지음 / 새물결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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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로 19세기 후반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와 버나드 쇼, 윌리엄 예이츠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 책은, 문학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이상은 좌절된 듯이 보인다. 역사책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저자의 역사적 관심 폭이 좁고, 문학책이 되기에는 저자의 문학적 깊이가 얕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 먼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엘리트들만의 생각으로, 특히 잉글랜드계 아일랜드 작가들의 생각으로 아일랜드의 역사를 구성하기에는 사회적, 시간적 폭이 너무나도 좁다. 책 제목이 너무나 거창하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으로 와일드와 쇼, 예이츠에 대한 문학적 깊이를 통해 아일랜드 문화의 다양성을 성찰하기 보다는, 이미 정해진 아일랜드적 문화나 또는 아일랜드성에 이 세 작가를 마음대로 구겨 넣고 있다. 결국 이 세 작가들의 아일랜드성이란 흔히 세간에 도는 지식인들의 신변잡기가 되어버린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점 외에도 세부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이 책의 단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구성적 문제점: 몇 안되는 사람들로 책 하나를 쓰려니, 했던 이야기가 자꾸만 되풀이 되고 있다. 가장 극명한 예를 들어보자.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2부는 와일드, 쇼, 예이츠 단 세 명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2부 1장이 이 세 명의 소개이고, 2장이 세 명간의 관계이고, 3장은 와일드만, 4장은 쇼만, 5장은 예이츠만 다루고 있다. 더구나 예이츠는 이미 1부 문예운동을 다루는 부분에서 충분히 언급했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산만함은 구성적 짜임새가 탄탄하지 못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아일랜드의 역사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연결되어 있지도 못하고, 주요 테마들이 긴밀하게 짜여져 있지도 못하다. 이미 예전에 썼던 영국사와 마찬가지로 중구난방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2. 게일민족주의에 대한 태도: 분명히 편협하고 폐쇄적인 신화화 된 민족주의가 시기에 적절하지 않게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저항세력에게 있어서 발현되는 이러한 신화는 분명히 큰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가만히 편안한 방석에 앉아 공과를 따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없어져야 할 문제점으로 생각될지라도, 옆에서 내 동료가 피흘리는 전쟁터에서도 이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칼 폴라니는 분명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파시즘에 발발하자, 공산당에 가입하는 정치적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만하다. 저자가 좋아하는 탈식민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성의 극대화이지, 무정치성을 통한 정치성의 방임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3. 니체 앞에선 와일드와 예이츠: 왜 와일드가 쇼나 예이츠와 함께 도매금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와일드는 정말로 니체 철학에 경도된 무정부주의적 자유인이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 선언한 것이 신학적 반대가 아니라, 근대적 인간 주체의 죽음이라는 철학적이고도 미학적 선언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와일드의 정체성은 그러므로 자신이 아일랜드에 관해 좀 언급했다하더라도 단순히 아일랜드에 묶어 놓을 수는 없다.

함께 니체에 경도되었을지라도 와일드의 니체와 예이츠의 니체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 하이데거의 강압적인 니체 해석을 벗어나 푸코나 들뢰즈에 의해 복원된 니체 철학에 따르면, 와일드는 아일랜드 민족성에 경도된 예이츠보다는 민족을 떠나버린 베케트에 더 가깝다. 예이츠의 니체는 분명히 근대의 틀에 가둬져버린 니체, 주인의 도덕이 현실적인 귀족성과 파시즘에로까지 나아가버린 변질된 긍정성이라고 할만하다. 저자의 예이츠에 대한 편애는 2번의 문제점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와일드가 분열된 정체성 자체를 즐긴 사람이라면, 예이츠는 분열된 정체성을 민족에 수렴시키고자 애쓴 사람이었다. 모든 예술의 정치성에 주목할 때, 와일드의 웃음이 세상의 질서를 비틀어버리는 유머였다면, 예이츠의 웃음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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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는 왜 거북을 이길 수 없을까 피노키오의 철학 2
양운덕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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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년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는다. 어떤 면에서 위기라고 하는지는 주장하는 사람들마다 다르지만,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 인문학이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인문학이 사람을 떠난 건지, 사람들이 인문학을 떠난 건지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에 다가서기 힘들다고 말하고, 인문학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사람들과 인문학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척박하진 삶의 토양에 인문학이 이제는 꽃피기가 어려워 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수많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꽃피우기 위해 색색가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을 여기저기서 들여와 심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꽃들이 과연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발했는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마음의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 친구하자고 달라붙는 사람처럼, 황무지에 억지로 씨를 뿌린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에는 아름다운 꽃을 심고 가꾸는 정원사의 손길보다, 땀흘려 땅을 일궈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농부의 손길, 황소의 우직함이 필요하다. 열흘 피었다 지는 꽃보다 수백년을 내려가며 곡식을 생산하는 기름진 땅이 필요하다. 기후에도 맞지 않는 외국산 장미보다 민들레라도 필 수 있는 조그마한 땅이 필요하다. 멋진 친구를 어색하게 소개시켜주기 보다는 친구를 사귈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피노키오의 철학'과 더불어, 이제 인문학의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의 토양이 개간되기 시작하였다. 닫힌 마음에 친구를 내다 볼 수 있는 조그만 창 하나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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