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홀로코스트와 군사 열병의 신. 재확립된 질서의 신. .....이 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선가 항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갑작스레 뜬금없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이 문장, 카뮈의 <페스트> 마지막 구절과도 같은 이 문장, 넓은 의미의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이문장을 잊지 말자. 왜냐하면 이 책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다루고 있는 동시에, 기억에 대한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뒤비는 1214년 7월 27일 일요일에 벌어진 부빈전투가 이후의 프랑스라는 국가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이 전투가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그러하듯, 당장 프랑스라는 국가를 순식간에 현실적으로 산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 위계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국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끔한 가장 중요한 현실적 순간이었다. 세 위계가 1789년까지 취약한 국가의 외피를 지탱한 사회의 상상적 구조물이었다면, 혁명을 통해 등장한 국민국가란 바로 이 세 위계의 국가가 만들어 놓은 두터운 외피를 보호막으로 삼았다. 이러한 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프랑스의 이데올로기인 세 위계는 다시 전지전능한 신의 대리인인 프랑스 왕의 신성함 속으로 한번에 수렴된다. 그것은 신화를 이룬다. 이렇게 해서 전쟁에 대한 기억은 이후로 사회를 획일화 하려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된다. 뒤비가 중세를 벗어나 이후에 표현된 부빈전투에 관한 담론을 추적하는 과정은 이러한 기억의 주조과정에 대한 고찰이다. 이러한 고찰은 위에서 말했듯 다시 '이미 주조된 기억에 대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뒤비는 촌철살인과도 같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첫째 과연 국가란 자명한 것인가? 둘째 우리의 기억은 정당한가? 이러한 두 가지 질문은 이제 역사가 자명한 과거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익숙한 기억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 그것은 역사가 객관적 진리를 보장하는 과학에 매달려 있지 않고, 언제나 현실 비판을 감행하는 정치에 속해있다는 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