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무례한 복음>, 한겨레 서평


대중문화 물들인 ‘경제제일주의’ 
<무례한 복음>, 이택광 지음/난장·1만7000원

 

    
문화평론가가 다루는 소재는 우리의 일상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삶과 사회의 변천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해석하는 게 일이다. 그들의 소재는 그래서 낯설지 않다. 문화평론가의 작업이 절실한 세상이다. 변화의 속도가 무서운 까닭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무례한 복음>이 다루는 시기(2008~2009)가 특히 그렇다. 까마득해 보이는 일들이, 따져 보면 얼마 전이다. 매일같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우던 촛불의 인파는 불과 1년 전 일이다. 박태환이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은 8월, 한국 야구 대표팀은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다. 지난해 여름 국방부의 ‘불온서적 목록’이 고스란히 ‘베스트셀러’가 됐고, ‘간첩’ 원정화가 붙잡혔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는 올 초 체포됐다가 석 달 만에 풀려났다. ‘강마에’라는 괴팍한 음악가와 ‘여인 신윤복’ 논란도 겪었다.

지난해 초 남대문에 불이 났다. 비슷한 시기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여전히 남대문은 공사중이고, 여전히 대통령은 이명박이다. 호랑이를 탄 듯한 숨가쁜 변화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법도 하다. 지난 2년여 대중문화는 경제제일주의를 반영해왔다는 일관된 관점에서 지은이가 실시간으로 블로그에 기록했던 문화비평이 책으로 엮였다. 하지만 시곗바늘은 쉼없이 돌아간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란 충격적 사건은 불과 두 달 전 일이다. 여당이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한 것은 2주일 전이다. 경찰 특공대가 해고 노동자를 때려잡는 데 나선 것은 며칠 전이다. 문화비평도 쉴 틈이 없다. 책은 이미 후속편을 예고하고 있다. (김외현 기자 | oscar@hani.co.kr

[출처] 이택광, <무례한 복음>, 한겨레 서평|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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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네트워크,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 경향신문 서평


 

체제에 복종하는 당신이 시대 지식인 맞습니까?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 지행네트워크 지음 | 난장


2007년 여름 연구자·현장활동가·시민들을 아우르는 ‘실천하는 앎의 연대’를 표방하며 결성된 ‘지행네트워크’의 지난 2년간 기록이다. 이명원·오창은·하승우 세 명의 ‘불량청년들’이 번갈아가며 쓴 글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지식인’ 문제다. 지행네트워크가 맨 처음 한 것도 ‘우리 시대 지식인의 존재근거를 묻는다’는 주제의 내부 세미나였다.

오늘날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말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책은 오히려 ‘앎과 삶의 분리’를 넘어 ‘앎을 배반하는 삶’ ‘삶을 위장하는 앎’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안으로 얘기되는 비제도적 지식공동체에 대해서도 의문의 시선을 둔다. 이들이 “대학사회의 ‘전문가주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알기 어려우며, 오히려 더욱 퇴행적인 ‘공부의 즐거움’에 함몰될 기미까지 보인다”는 이유인데 “대안공간이 자기 위안의 둥지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불편한 연대’를 감수해야 한다”고 밝힌다.

김우창·최장집 등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에 대한 실명비판도 나온다[아래 왼쪽부터 김우창, 최장집].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이들의 ‘보수주의적 시각’에 대해 “지식인 사회가 진화하는 촛불집회에 덜 진화한 학습노트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고 꼬집는다. 
 




책에서 강조되는 건 비평가로서 지식인의 역할이다. 시스템의 ‘외부’에 스스로를 위치지우면서 인식론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수준에서 ‘안’의 사유를 상대화할 수 있는 ‘전환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체제의 규율에 길들여져 스스로 복종하는 ‘순응주의자’가 되길 거부하고 규격에서 벗어난 자유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불량의 여정’을 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의 실천비평을 “세속의 갯벌 속에서 사는 낙지의 운명”에 비유한 글이 눈에 띈다. “낙지는 갯벌에서는 강력한 흡판으로 텍스트를 끌어당기지만 맑은 물에서는 힘이 약해지고 만다. 비평가도 현장에서 몸을 뒤섞으며 텍스트를 다룰 때는 활력이 넘치지만 권력이 설정해 놓은 체제 속에서는 힘 빠진 연체동물로 전락할 뿐이다.”  (김진우 기자 | jwkim@kyunghyang.com)

[출처] 지행네트워크,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 경향신문 서평|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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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서평: 부산일보

68혁명 관심 가져야 할 이유
조지 카치아피카스/이재원 옮김/난장/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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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이 전달하는 힘, “총탄 대신 꽃을, 증오 대신 사랑을”이란 제목의 이 사진도 마찬가지다. 때는 1967년 10월 21일 미국 워싱턴DC의 국방부 앞. 이날 10만여 명에 달하는 반전시위대는 자신들에게 총검을 겨누고 있는 2천5백여 명의 군인들과 대치 중이었다. 그때, 17세의 여고생 캐시미어가 느닷없이 앞으로 걸어 나와 군인들의 총부리에 꽃 한 송이를 꽂으려고 했다. 비록 이 날의 시위는 6백80여명이 체포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신들을 위협하는 군인들에게 말을 건네 총을 내려놓고 동참하라고 말하는 듯했던 이 사진은 위대한 반전사진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 새로 번역돼 나온 <신좌파의 상상력: 전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조지 카치아피카스/이재원 옮김/난장/2만8천원)에 실려 있는 사진이다. 책은 1968년 전 세계를 뒤흔든 신좌파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1999년 국내에도 처음 소개된 후 이번에 살을 더해 재출간됐다.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인 지은이는 이번 수정증보판을 “‘2008년 5월의 한국 민중들’, 특히 10~20대 젊은이들에게 바친다”고 밝혔다.

그가 꼽는 ‘68혁명’의 특징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동시적인 세계적 격변이자, 자본주의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난 혁명이며, 혁명 주체들이 정치권력 획득을 명시적으로 내걸지 않은 채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점 등이다. 물론 운동 내부의 성차별, 운동의 직업화·전문화, 기존 권력구조의 막강한 흡수력 등의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8혁명은 "곧 다가올 세계사적 폭발의 최종 리허설"이라는 게 그의 주장. 그리고 오늘날 ‘68혁명’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면, ‘연속성’. 그 연속성은 수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당대 세계체계의 구조를 바꾸려면 무엇보다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김은영 기자 | key66@)

[출처]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서평: 부산일보|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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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서평: 연합뉴스

신좌파의 상상력: 전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이재원 옮김/난장·2만8000원

1968년 전세계를 뒤흔든 신좌파운동에 대한 연구서다. 1999년에 처음 소개된 후 이번에 살을 더해 재출간됐다.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인 저자는 ‘68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동시적인 세계적 격변”이라고 소개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학생들은 미국 컬럼비아대를 점거한 미국 학생들에 경의를 표하며 “컬럼비아, 파리”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미국 학생들은 ‘프라하의 봄’을 지키려는 체코 학생들을 위해 시카고를 ‘체카고’라고 고쳐 부르는 등 학생들의 국제연대 속에 68혁명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는 것.

저자는 이밖에 △자본주의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자본주의 내부에서 혁명이 초래됐다는 점 △혁명 주체들이 정치권력 획득을 명시적으로 내걸지 않았다는 점 △혁명 주체들이 문화와 정치의 융합을 꿈꿨다는 점 등을 68혁명의 특징으로 꼽았다. 한편 이번 개정 증보판에는 4편의 글이 새롭게 수록됐고, 각종 사진과 각주가 추가됐다. (송광호 기자 | buff27@yna.co.kr)

[출처] 조지 카치아피카스, <신좌파의 상상력> 서평: 연합뉴스|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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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원자론, 인류에 쾌락을 선사하다
<고대 원자론: 쾌락의 원리로서의 유물론>
장 살렘 지음·양창렬 옮김/난장·1만9000원

<고대 원자론>은 ‘원자론’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경~360년경), 에피쿠로스(기원전 342~271년), 루크레티우스(기원전 94년경~55년경)의 사유 세계를 해설한 책이다. 고대철학 전문 연구자인 장 살렘 프랑스 파리1대학 교수가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용으로 썼으며, 그 밑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양창렬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 왼쪽부터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루크레티우스는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인데, 왠지 에피쿠로스를 많이 닮았다).
 

이 원자론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닌 의미는 이 책의 부제 ‘쾌락의 원리로서의 유물론’에 드러나 있다. 지은이는 이 세 사람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정초했으며, 거기에 입각해 ‘쾌락의 윤리학’을 설파했다고 말한다. 이 세 원자론자, 그중에서도 특히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현대 철학의 관심사가 된 것은 젊은 카를 마르크스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 22살의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 두 사람의 사상을 비교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썼다. 마르크스는 이 논문을 통해 헤겔 관념론의 자장 안에서 커가던 자신의 사유를 일신할 계기를 마련했다. 일종의 유물론적 도약의 발판을 찾아낸 셈이다.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은 마르크스의 이 논문을 서술의 배경 또는 발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고대 유물론자들의 사상을 해석한다. 마르크스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를 극적으로 대립시켜 선배를 기각하고 후배의 편에 선다면, 살렘은 두 원자론자의 차이보다는 같음 쪽에 무게를 싣는다. 원자론이라는 큰 묶음 속에서 두 사람의 생각의 이어짐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관계는 어떤가. 지은이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를 각각 장을 나눠 따로 설명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철학은 포개진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보다 200여년 뒤에 살았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철두철미하게 에피쿠로스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에피쿠로스의 발자국을 그대로 좇았다. 루크레티우스의 의미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탁월한 주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300편에 이르는 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알려면 루크레티우스의 충실한 해설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루크레티우스를 설명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 철학 해설: 죽음에 대한 공포 물리친 고대 유물론
“철학은 추론 통해 행복한 삶 얻는 활동”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가 공유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은 “전 우주는 물체와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 내부는 물체로 채워져 있되, 물체가 운동할 수 있는 것은 허공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물체는 더는 나눌 수 없는 미립자의 집합이다. 이 미립자, 곧 원자를 일종의 레고라 한다면, 이 세계는 그 레고들의 결합인 셈이다. 이 ‘레고랜드’에는 창조주나 절대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 신적 존재 없이 이 세계는 스스로 작동하고 변화한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이 갈라지는 지점은 ‘원자의 운동’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이 무게를 지니고 있어서 빗방울처럼 위에서 아래로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고 말한다. 떨어지면서 충돌하고 되튀고 얽힌다.
 

그런데 같은 속도로 평행하게 떨어진다면 서로 충돌할 일이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제안하는 ‘클리나멘’(편위)이다. 에피쿠로스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원자들이 조금씩 수직에서 비껴나는 이탈 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이 이탈이 바로 편위다. 이 편위가 있기 때문에 원자들은 서로 충돌할 수 있고 일종의 ‘브라운 운동’을 할 수 있으며, 그 편위의 자유 운동 속에서 모임과 흩어짐을 통해 세상 만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원자론적 자연학에 기반해 윤리학이 펼쳐진다. 에피쿠로스에게 자연의 세계는 윤리의 세계와 친연성을 넘어 어떤 일치성이 있다. 자연의 클리나멘은 사유의 클리나멘으로 이어지며, 이 사유의 클리나멘에서 사유의 의지, 사유의 자유가 도출된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흔히 ‘쾌락주의 철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데, 그때의 쾌락주의는 ‘오늘을 즐겨라’(카르페 디엠) 식의 ‘안달하는 쾌락주의’와는 종류가 전혀 다르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쾌락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쾌락은 욕망의 절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고통의 부재’에 가깝다. 에피쿠로스는 그런 쾌락을 두고 ‘아타락시아’(평정심)라고 했고, 아타락시아를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아테네 교외의 정원에 세운 학교(‘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가르친 것은 아타락시아에 이르는 길이었다. 철학이란 “추론과 토론을 통해 행복한 삶을 얻어내는 활동”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다시 말해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삶을 지혜롭게 통찰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유물론이 쾌락의 원리, 행복의 원리가 되는 이유다. (고명섭 기자 | michael@hani.co.kr)

[출처] 장 살렘, <고대 원자론> 서평: 한겨레|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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