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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판철학자로 알려진 세계적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도 ‘동시대의 사상가’로 인정한 미셸 푸코의 화제작.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만한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본성과 작동방식을 적나라하게 분석·비판한 강의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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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재발명’ 그 끝없는 길을 묻다
 

조르조 아감벤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난장 | 김상운·양창렬·홍철기 옮김 | 1만1800원
 


서울, 평양, 바그다드, 파리, 모가디슈,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어느 도시의 광장에서라도 좋다. “이 중 민주주의자 아닌 이가 있는가”라고 외쳤을 때 당당히 손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조지 W 부시, 자크 데리다와 에티엔 발리바르,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과 하마스 등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에 또 무엇이 남았을까?”(웬디 브라운)

민주주의의 의미와 지향점은 너무나 넓다. 모든 것을 뜻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대의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신세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는 명망 있는 여덟명의 지식인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민주주의를 죽인 자는 누구이며, 죽은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참여한 이는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다니엘 벤사이드, 웬디 브라운, 장 뤽 낭시, 자크 랑시에르, 크리스틴 로스, 슬라보예 지젝이다.




민주주의의 본뜻은 인민(demos)에 의한 통치(kratos)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된 민주주의는 과두정, 귀족정 등과 달리 자신이 지칭하는 정체의 구성원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인민에 의한 통치가 실행되기 위해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이며 조직은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끝없이 ‘재발명’돼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아감벤은 인민주권이 모든 의미를 상실했으며, 행정과 경제가 그것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통탄한다. ‘통치=행정부’라는 쉬운 공식 뒤에 권력, 정치의 의미를 캐기 위한 모든 노력은 필요없게 됐다. 바디우 역시 현대의 민주주의가 사실상 ‘보수적인 과두정’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을 지배하는 서구인들은 ‘정치적인 족내혼’을 통해 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이들을 배제한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며 살고 있다고 믿는 성벽들의 성벽지기이자 상징”이라는 일갈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바깥의 ‘야만인들’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브라운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성인 인구의 10~20%에게만 허용됐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보면서 서구인들은 자신이 여전히 민주주의자라고 자위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닳고 닳아 내팽개쳐져야 할 단어일까. 랑시에르는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프랑스 지식인에게 민주주의는 텔레비전 앞에 주저앉은 슈퍼마켓 고객의 군림이나 다를 바” 없지만, 한국에서는 “국가기계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힘에 대한 어떤 생각 같은 것이 인민이 거리를 메우는 스펙터클한 형태(가령 촛불시위)로 옮겨지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건 여전히 의미 있다는 주장이다.

벤사이드는 ‘시장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조어에 대해 고민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번영을 누리던 서구 사회에선 의회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가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 “실제론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회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민주주의라는 부유하는 기표는 승리한 서구, 승리자 미국, 자유 시장, 왜곡되지 않은 경쟁의 동의어가 됐다.”

브라운 역시 “오늘날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기업과 국가의 권력이 교차하는 것 이상으로 융합되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전직 건설사 사장을 대통령으로 뽑은 한국도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지젝은 역사를 돌아보며 말한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고, 오히려 19세기 하층계급의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결과라고. (백승찬 기자 |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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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용당한 ‘민주주의’ 두고봐도 좋은가

조르조 아감벤 외 지음·김상운 외 옮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난장 | 1만1800원

정치 영역에 기업가 원리 침투, 신자유주의 ‘민주’ 용어만 탈취
“인민의 투쟁 없인 복원 어려워”

 


19세기 프랑스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1852년 투덜거리며 이렇게 썼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저 ‘민주주의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호한데다 진부하며 특정한 의미도 없는 말이다. 고무처럼 쭉쭉 마음대로 늘어나는 말.” 블랑키가 이 말을 했던 것은 당시 루이 나폴레옹의 권위주의 통치를 지지하던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민주주의 옹호자’라고 자처하는 상황이 주는 당혹감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상황은 블랑키 시절보다 더 나아졌는가? 민주주의는 이름값을 하고 있는가?

에리크 아장(프랑스 라파브리크 출판사 대표)이 기획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진단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논쟁에 새롭게 불을 붙여보려 하는 책이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다니엘 벤사이드, 웬디 브라운, 장뤼크 낭시, 자크 랑시에르, 크리스틴 로스, 슬라보이 지제크, 이렇게 8명이 이 책이 마련한 민주주의 진단 작업에 참여했다. 현재의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 민주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보는 바디우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지닌 해방적 능력을 신뢰하는 랑시에르까지 참여자들의 생각은 서로 차이가 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대체로 지금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민주주의라는 말이 내용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인식에 동의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웬디 브라운(사진·미국 캘리포니아대 정치학 교수)은 민주주의 위기 진단과 관련해 여덟 사상가들의 생각의 교집합에 가까운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 웬디 브라운(미국 캘리포니아대 정치학 교수)
 
브라운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역사상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개념은 더할 나위 없이 모호하고 내용은 빈약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란 말은 누구나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다.” 이탈리아의 부패한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부터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까지 온갖 정치 세력이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한다. 브라운은 민주주의가 이렇게 제멋대로 사용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는 어원상 인민(데모스, demos)과 통치(크라토스, kratos)의 결합, 곧 ‘인민의 자기 통치’라는 추상적인 규정만 담고 있을 뿐 구체적인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이런 모호성이야말로 민주주의라는 말이 남발되고 남용되는 근거가 된다고 브라운은 말한다.

나아가 브라운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기업권력의 지배하에 떨어졌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인 ‘자유선거’마저 표와 자금을 노리는 정치 마케팅으로 전락했다는 것도 민주주의 위기의 뚜렷한 징표다. 브라운은 특히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정치 영역에 침투해 민주주의 원리가 기업가적 원리로 대체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데모스(인민)가 민주주의로부터 퇴출당하고 그 자리에 기업적 효율성·수익성이 들어앉는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실체를 부스러기로 만들어버린 뒤 제 입맛에 맞게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탈취했다.”

이 대목에서 브라운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통치 주체인 인민의 각성과 의지 없이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만약 인민이 민주주의에 적극적인 관심이 없다면, 또 인민이 민주주의가 약속하는 진정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여기서 브라운은 ‘인민주권론’을 세운 장자크 루소의 발언을 주목한다. “루소는 타락한 인민이 공적인 삶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계약은 유명무실한 형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 누구를 막론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이 약속은) 개인이 자유롭게 되도록 강요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개인을 강제로 자유롭게 한다’는 이 비참한 역설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정도로 지금의 민주주의는 타락했고 인민은 민주주의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브라운의 진단이다.

크리스틴 로스(미국 뉴욕대 비교문학 교수)는 브라운의 이런 우울한 진단을 이어받아, 민주주의가 “극소수 사람들만의 통치, ‘인민 없는 통치’만을 허용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라는 말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완전한 통제 아래 들어갔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렇게 통제당하는 말의 의미를 투쟁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랑시에르는 한국에서 벌어졌던 촛불시위를 사례로 들어, 서구에서 오랜 세월 마모되고 오염된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곳에서는 여전히 힘을 행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민주주의란 “자격 없는 자들의 권력”인바, 그렇게 자기 몫이 없는 배제된 자들이 나서서 자기 몫을 주장하며 싸우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말한다. (끝)  

<한겨레>(2010년 5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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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제787호/2009년 11월 29일자)에 실린 <목적 없는 수단>의 서평을 퍼온다. 작성자는 로쟈님이다. 



벌거벗은 난민의 생명에서 탈주하라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양창렬 옮김,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난장, 2009)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이다.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정치철학적 범주를 제시한 <호모 사케르>(새물결 펴냄, 2008)를 통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감벤은 현재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유의 ‘맹아적 저작’이라고 불리는 <목적 없는 수단>(난장 펴냄)은 비교적 가벼운 부피의 책이지만, 이 ‘사유의 거장’이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가는지를 안내해주는 압축적인 저작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치철학의 전통적인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경제에서 제1차 산업혁명이 구체제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면,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실종되고 또 망각되고 있다면, 그것은 주권과 법/권리, 국민/민족, 인민, 민주주의 같은 고루한 용어로 지시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용어들을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자신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서 그가 더 자세하게 발전시키게 되는 주제이지만,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이 벌거벗은 생명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신종플루 사망자 수나 백신접종 대상자 수처럼 통계적 ‘숫자’로서 존재하는 생명이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호되며 관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그럼 다른 의미의 생명이 또 있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아감벤은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했던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생명의 다른 의미를 길어올린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좀더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면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단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이때 행복은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실험하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정치 공간이며, 정치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은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할 것은 현재의 삶이 과연 ‘삶-의-형태’에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로쟈 | 인터넷 서평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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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학보인 <대학신문>(2009년 11월 21일자)에 실린 <목적 없는 수단>의 서평을 퍼온다. 역시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예외상태>와 패키지로 묶인 서평이다. ^^;;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건인데, 로쟈님의 말마따나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새물결, 2009)와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이 최근에 출간됐지만, 리뷰기사는 아주 드물게 뜨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드문 서평기사 가운데 하나”인 이 서평이 무지무지 반갑다.



 
행복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도래해야 할 정치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정치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긴급조치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사유를 무화시키면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한갓 생존에 지나지 않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인가?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우리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있던 이 궁극적인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감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면서 정치적 사유의 기존 개념들을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다. 그의 독창적인 사유의 배경에는 푸코, 데리다, 낭시, 바디우, 네그리를 비롯해 하이데거, 벤야민, 슈미트,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방대한 사유의 교류와 깊이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번역·출간된 <예외상태>(2003)는 ‘호모 사케르’ 연작 중 Ⅱ-1권에 해당한다. Ⅰ권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에서는 삶을 포획하는 권력 장치가 감옥에서 수용소로 이행하면서 ‘호모 사케르’와 같은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 주권의 본질임을 밝혔다면, 『예외상태』에서는 법과 폭력의 관계 속에서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키는 ‘예외상태’라는 장치야말로 국가주권과 법치의 통치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대외전쟁이나 내전 같은 비상시국에서의 긴급조치나 계엄령처럼, 예외상태란 정상시에 작동하던 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살아있는 자들을 아노미적 공간 속에 놓으면서 동시에 법의 힘에 포획시키는 주권권력의 정치적 장치다. 법 안에 법의 공백을 놓는 예외상태의 역설적 구조에 포획된 생명은 법질서 바깥으로 배제된 채로 법의 힘 안에 포섭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주권권력은 벌거벗은 생명과의 이런 배제적 포함 관계 속에서 삶을 통치하는 생명정치를 실행한다. 문제는 이런 예외상태가 더 이상 잠정적인 예외조치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국가든 부시 정권의 민주주의 국가든 예외상태는 모든 국민국가의 정상적 통치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분석이다. 예외와 정상규칙의 식별불가능성은 아노미를 창출해 법질서를 확정하려던 예외상태의 기능을 멈추게 하고, 결국 최종적인 법질서의 작동을 무화시켜 순수한 폭력의 아노미 지대로 들어서게 한다. 국가의 법이 폭력에서 삶을 보호한다는 것은 허구인 셈이다. 아감벤은 마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 듯, 삶을 헐벗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기계 장치(예외상태)가 작동 정지되는 곳에서 오히려 ‘진정한 예외상태’에 돌입할 수 있는 전회(轉回)의 가능성을 본다.



 

진정한 예외상태란 법이 삶 자체와 구별되지 않고, 법과 삶의 배제적 포함 관계 자체가 무화되며, 거꾸로 법이 단지 삶의 사용 방식에 지나지 않게 되는 상태, 즉 법 바깥으로의 자발적인 내버려짐과 더불어 삶이 자기 고유의 잠재성을 회복하는 상태다. 이는 법을 정립하거나 보존하려는 목적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순수한 수단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법과 삶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 ‘목적 없는 수단’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 전체를 압축해 놓은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 <목적 없는 수단>(1996)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예외상태>보다 훨씬 이전에, <호모 사케르>Ⅰ권(1995)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이 저서는 현재 진행형인 ‘호모 사케르’  연작의 주제들과 공명하면서 그 전체적인 기획을 예견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도래할 공동체를 위한 아감벤의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난민’, ‘수용소’, ‘인민’, ‘경찰’, ‘스펙터클 사회’ 등은 국가-국민-영토의 삼위일체에 근거하는 국가주권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래할 정치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요소들이다. 국민국가체계에서 수용할 수 없는 무국적 비시민들의 전세계적인 양산이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용소의 확산은 결국 안정적인 예외상태의 실현 지대를 확장시킬 뿐이다. 특히 국가형태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스펙터클 국가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불가능하게 하며 소통 가능성으로서의 언어활동 자체가 소통을 가로막는 결과를 산출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생명과 정치적 실존, 소통 불가능한 것과 소통 가능한 것, 규칙과 예외, 난민과 시민이 더 이상 식별불가능하게 되는 어두운 지대의 확장 속에서, 아감벤은 국가주권으로 표시되는 어떤 역사적 시대의 마감을 예감하며 동시에 새로운 삶의 비국가적 정치의 가능성을 본다. ‘자연스런 몸짓’, ‘순수한 언어활동’, ‘삶-의-형태’. 이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영역인 ‘목적 없는 수단’의 요소들로서 회복돼야 할 것들이다.  

국가주권과 법에 의해 정해진 목적(내용, 코드, 문법)을 실현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 어떤 목적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용’을 주장할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몸짓과 언어활동은 ‘공통적인 것’으로서 소통가능성 그 자체이기에 장차 도래할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인간은 정해진 동일성과 정체성이 없는 순수 잠재성의 존재다. ‘삶-의-형태’는 자신의 형태와 분리될 수 없는 삶으로서 벌거벗은 생명이 아닌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순수 수단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삶의 역량을 완성하고 소통하는 데 도달하는 삶.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충족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국가주권을 구성하는 폭력과 법의 연결을 해체하고 국가주권이 분리시킨 다양한 형태의 벌거벗은 생명들을 다시 묶어 ‘삶-의-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도래할 정치 역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인류의 잠재적 역량을 목적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국가와 비국가(인류)의 투쟁이 된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으로부터 행복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해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시작돼야 할 곳은 거대한 국가의 통치 기계와 맞서고 있는 바로 우리의 용산, 거기가 아닐까.(김재희 | 대진대 학술연구교수)

[출처] 행복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도래해야 할 정치|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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