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지난 2022년, 환상문학웹진 ‘거울’ 소속 필진으로서 17번째 중단편집 『그리고 문어가 나타났다』의 서문을 작업했던 적이 있다. 신규 필진 딱지를 이제 갓 뗀 신입에게 연간 출간되는 도서의 서문을 쓴다는 건 굉장히 값진 일이다. 특히 그해에는 정보라 작가의 부커상 최종 후보 지명이라는 경사가 있었다. 서문을 써야 하는 책의 수록작과 작가 명단을 훑던 중, 정보라 작가의 이름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던 나에게 ‘정보라’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전설처럼 느껴졌다.
모든 작품을 참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당시의 긴장감이 생생하다. 정보라 작가를 비롯한 곽재식, 전혜진, 구한나리, 김지혜 작가 등 소위 웹진 거울의 ‘조상님’이나 다름없는(?) 분들의 소설을 감히 평해야 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감사한 마음이 실력에 앞서지 않았나 반성하기도 했다) 다행히 최선을 다한 서평은 출판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책에 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읽은 소설들의 줄거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정보라 작가의 신간 제목을 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2022년 웹진 ‘거울’ 중단편집에 수록된 단편 「문어」 속 대사이기 때문이다. 서문을 작업하던 당시에도 정보라 작가의 「문어」는 강한 인상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동자와 여성, 장애인, 퀴어 등 사회적 약자(또는 사회가 만든 약자)의 편인 동시에 당사자이기도 한 작가 당신이 독자를 향해 던지는 위트 속 메시지에서 오는 강렬함이 있었다.
「문어」는 고등교육법 개정안, 일명 강사법의 제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대학 내 대량 해고를 다룬다. ‘지구-생명체는-항복하라’라고 말하는 문어 외계인을 홀랑 먹어버리는 노조 위원장의 행동을 본 독자는 의아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항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임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의미가 완성된다. 이 소설은 사회 전체가 애써 외면하는 듯한 인간 소외를 환상과 특유의 재치로 다루되, 문제의식의 무게를 보존하는 강약의 조절은 정보라 작가가 현실을 전유하는 마음가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어 외계인을 먹는 인간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일까. 학생을 가르치는 마음이 같은 사람들의 연봉이 열 배도 더 차이 나는, 그중 누군가는 예고 없이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현실이 비현실적일까. 이 소설을 평하며 “환상은 종종 현실을 환기한다”라고 서문에 썼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는 환상의 완성도가 ‘현실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가 아닌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로 정해지는 듯하다. 소설 속 위원장이 문어 외계인을 삼킨 데에는 또 얼마나 정치적이고도 현실적이며, 법적인 사정이 있었는가.
「문어」가 수록된 정보라 작가의 신간 단편집 『지구 생명체는 항복하라』의 일부를 출간 전에 작가의 에세이와 인터뷰가 함께 실린 무크지의 형태로 읽어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샘플 소설로 「문어」가 실려 왔다. 이전에 한 번 읽은 기억이 있어서인지, 새로운 감흥이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작가의 소설 밖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다시 본 「문어」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처럼 신선했다.
정보라 작가에게 환상이란 현실을 투영하는 렌즈와 같다. 그 렌즈를 통과한 현실의 이야기가 이번 소설집에는 다섯 개 더 수록된다. 문어와 마찬가지로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등 해양 생물과 관련된 이야기다. 분명 해양 생물과 바다에 관한 다섯 개의 환상소설일 테지만, 나는 그것들이 지상의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소설을 쓰려고 여러 가지 해양 생물을 조사해 봤는데요, 해파리가 기후변화를 가장 잘 대표하는 생물 같았습니다. 실제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바다가 따뜻해지면서 해파리가 잔뜩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 해파리 탓이 아니지요. 해파리는 따뜻한 물과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인간이 지구를 펄펄 끓게 만드니까 해파리가 늘어나서 결국 인간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 무크지의 작가 인터뷰 18~19쪽
‘작가는 글로 투쟁한다’. 이 말이 혼과 육을 얻는다면 정보라 작가처럼 행동하고 움직이지 않을까.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라고 외치는 문어로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서, 저 해안으로 밀려오는 해파리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지구를 망가뜨린 몹쓸 인간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정보라 작가의 신간은 또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
그러니 기대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푸르고 붉은 지구의 소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