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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평점 :
SF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는 미래를 엿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미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어떤 기술이 그들과 함께할까. 누군가는 단순히 그때에 있을 신기술을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신선함을 유희적으로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회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가늠해보는 것도 과학 소설을 읽는 중요한 이유다. 어떤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아갈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 또한 즐겁기 때문이다.
과학소설 속 사회의 모습을 가늠하길 좋아하는 독자로서 첨단을 다루는 과학소설 중 기술낙관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는 어떤 것들은 (굉장히 적은 비율이긴 하지만) 기술불평등을 간과하곤 한다는 점이 종종 안타깝다. 유난히 그런 것을 발견하는 데에 밝은 눈을 지녀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의 수명이 증가하고 가정에 도우미 로봇이 들어오고, 학생들의 교과서가 전자식으로 바뀌는 등의 모습을 이야기에서 마주할 때마다 ‘저 기술은 모두에게 제공되는 것일까’라는 걱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사실 소설을 픽션으로만 읽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유의미하지 않은 고민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종종 SF 안에서도 소외되는 사람들이 보인다.
배명훈 작가의 『화성과 나』라는 연작소설은 무려 인류의 ‘화성 이주’를 다루는 책이다. 우주 항공 기술은 첨단 중에도 최첨단을 달리는 것이기에 ‘소외’의 레이더에 어느 이야기 하나가 걸릴 법도 했으나, 놀랍게도 그런 소설은 없었다. 배명훈 작가의 글을 적지 않게 읽어 온 독자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그는 기술 안에서 ‘사람’을 본다.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기에도 바쁜 시기에 ‘간장게장’의 '밥도둑'으로서의 기능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다.(「위대한 밥도둑」) “전교 몇 등 안에는 못 들어도, 인류 공동체가 지구인을 대표하는 사람을 300명만 뽑아서 우주로 보낸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들어갈 사람”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김조안과 함께하려면」)
사람에 관심이 많은 작가가 쓴 모든 문장은 낭만적이다. 낭만은 사람이 만들어낸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화성과 나』 속에서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오랫동안 우주선에서 물의 순환을 함께 겪고(「행성봉쇄령」) 지구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행성 두 개만큼 네가 보고 싶을 거야”라는 고백이 화성인의 입에서 아름답게 완성된다(「행성 탈출 속도」). 이 책은 박사 학위 세 개를 가지고 화성에 스스로 정착하는 데에 무리가 없는 건장한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와 일반인, 어린 아이들처럼 테라포밍 없이 화성에 절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정착할 때 비로소 그곳에 ‘문명’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화성이 되어가는 과정 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보인다.
이 책을 통해 배명훈 작가가 '외교부'로부터 의뢰받아 “화성의 행성정치: 인류 정착 시기 화성 커버넌스 시스템의 형성에 관한 장기 우주 전략 연구”라는 제목의 상당히 SF스러운 보고서를 쓴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년에 가까운 연구였으니 그가 이렇게 다각도로 화성이라는 행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해된다. 과학에서는 화성의 ’식량’을 보지만 인문학은 화성의 ‘음식’을 본다는 그의 시선은 이 소설집의 모든 연작에 적용되었다. 과학이 정교하게, 수학적으로 계산한 미래를 인문학은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채워나간다. 이런 과학과 인문학의 상호작용을 마술처럼 조율해 글로 적어낼 수 있는 배명훈 작가의 신작, 『화성과 나』라는 책을 가장 먼저 받아볼 수 있어 즐거웠다.
얼마 전, 화성에 가서 죽는 게 꿈이라는 배우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지구에서 죽지 않는 것이 꿈이라는 그의 이름은 김조안이 아니지만, 세상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들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도 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다만 한 가지, 화성으로의 이주가 지구가 병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모든 과학이 종말을 얘기하는 시대지만, 그래도 그 행성에서 이곳을 볼 사람들이 여전히 지구를 아름다운 행성이라 말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