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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도시 타코야키 - 김청귤 연작소설집
김청귤 지음 / 래빗홀 / 2023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김청귤 작가의 첫 소설을 읽은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우주와 좀비 바이러스를 주제로 한 짧은 글이었는데 그의 문장이 주는 가벼운 따듯함에 얼마간 설레며 상상의 폭에 내심 감탄했다. 첫 감상이 좋아서인지 지금도 끊임없이 불어닥치는 텍스트의 바람에 피곤할 때면 그의 소설을 찾곤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글을 쓰고 읽어 몸과 마음이 한없이 지친 와중에도 청귤 작가의 소설은 읽힌다. 아니, 오히려 그의 이야기로 나는 위로와 쉼을 얻는다. 글로 인한 피로를 또 다른 글로 풀 수 있다니. 타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상상력만으로 녹이는 이 작가의 능력에는 비범한 데가 있다.
온라인 연재 플랫폼에 올라온 그의 글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단편이 〈해저도시 타코야키〉였기 때문에 소설집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반가웠다. 이 글이 연작의 일부였다는 새로운 정보에 해저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어떤 작품이 더 있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서평단에 선정되어 가장 먼저 책을 받아 보는 행운을 누렸다. 구불구불 문어발이 해저 돔을 감싸는 형상의 표지를 보며 표제작인 「해저도시 타코야키」가 정확한 이미지로 구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어 보니 이 책의 연작들이 모두 해저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광활한 범위의 바다. 모든 소설에는 자연과 생명의 원형으로서의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개별 모습은 다양하다. 바다 생물의 유전자와 결합한 미래형 인간, 해저의 생명체와 교감할 수 있는 아이, 불길한 배에 납치되거나 해저 도시 사이를 오가는 수인(水人), 3년으로 수명이 제한되어 오직 청소 일만 하다 폐기되는 청소부와 스티로폼 눈을 맞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바다’라는 공간에 몸담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미래에 거주한다.
청귤 작가는 모든 소설에서 과거의 인간들에 회의감을 내비친다. 지금의 우리일 수도, 미래의 인류일 수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예전에 살았을 수도 있는 그들에게 똑바로 말한다. ‘덕분에 우리는 물로 도망했어요’. 벼랑 끝의 인류가 몸을 던진 곳은 가장 깊은 생명력의 바다였다. 그러나 여전히 욕심만은 버리지 못한 채, 인간은 분열과 혐오, 시기와 반목을 지속한다. 『해저도시 타코야키』의 여섯 이야기 중 앞의 다섯 개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인간끼리의 대립이 반복된다. 과거의 인간, 또는 육지의 인간은 착취하고 공격하며 인공적이다. 반면 바다의 인간과 생물은 포용하고 성실하며 자연적이다.
다행히 이런 대립은 마냥 진영 간의 싸움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공격하고 다른 쪽이 방어하거나 피해 입는 구도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주인공들은 스스로 ‘선택’한다. 어느 것 하나 겹치지 않는 인물과 세계관에서 단 하나, 모든 이야기에 도장처럼 찍힌 공통점이 있다. 이미 망해버렸거나 서서히 망해가는 세상에서 주인공들은 자연과 마음을 해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맨 마지막 소설 「산호 트리」는 이런 최선의 끝에 있는 담담하고도 아름답지만 먹먹한 결말을 함축한다. 해류가 순환하며 바다 쓰레기를 건져 올리는 것을 ‘눈이 내린다’고 표현하는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이미 우리에게 있는 ‘생명력’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의 기적을 담보로 지구를 망가뜨리는 걸까.
겉으로는 식은 것 같아도 언제고 뜨거운 온기를 품는 고소한 문어빵처럼 차갑고 딱딱해진 해저 돔.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여섯 개의 이야기에 스며 있는 건 오직 하나의 온기다. 거대한 시간을 통과해 바다를 유영하며 무한한 쓰레기와 온몸으로 부딪혀 본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가득한 세상에 산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발장구를 쳐본다. 고개를 앞으로 치키고 선명하게 울리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아마 이 여행을 먼저 떠났을 한 작가가 미리 보았을 미래가 드디어 눈앞에 보인다.
“온 세상이 바다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