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신 중세 미술가들은 영혼의 표현에 치중했는데, 특히 새로운 신자들에게 교회의 교리를 전달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분위기 속에 이 시기 미술은 종교의 시녀가 되었다. - P56
1910년대 식민지배는 헌병경찰 등과 같은 강압적인 수단에 크게 의존했지만, 일본의 통치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수천 년의 역사·문화 전통과 1,7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한국을 일본의 물리력과 행정조직만으로 통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부족한 통치력을 뒷받침하고, 민족적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협력 세력이 필요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침략 초기부터 친일협력 세력을 육성하고,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민지기는 한국 근대사의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전개과정을 보여줬다. 이 시기에 한국은 유례없는 수난을 겪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축해, 한국 민족을 억압·차별·수탈하는 한편 민족성 말살(민족동화)을 획책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의 대륙 침략과 일본 자본의 활동에 적합한 식민지 자본주의사회로 변모해갔고 사회경제적 대일(對日) 예속화와 민족 간 불평등은 심화됐다.
철도는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는 시간을 정밀하게 감각해야 할 필요가 없었으나,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기차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정확하게 운행됐기에 기차를 이용하려면 근대적 시간감각에 적응해야만 했다.
이것으로 담판은 종결됐고,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됐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8월 29일 한국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협상이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던 것은 일본이 제시한 「한국병합안」을 이완용이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