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비록 승리하였다고 하더라도 대폭동이란 엄청난 사건에서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영국의 대인정책(對印政策)은 인도의 여론을 의식하면서 불가피하게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대폭동에 뒤따른 가장 획기적인 조치는 동인도회사의 폐지였다. - P4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플라시 전투는 영령인도사(英領印度史)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세력이 인도에서 쇠퇴하고 유럽의 여러 세력을 제압한 영국은 이제 종래의 무역활동에서 벗어나 인도 경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 P2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갈제국의 시조는 차가타이 터키계인 바부르로서 카불 주변지역에 그의 지배권을 강화한 후 인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바부르는 스스로 자신을 아버지 편으로는 차가타이 한국의 지배자였던 티무르의 후손으로, 또 어머니 편으로는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불렀다. 바부르는 네 차례의 공격 끝에델리 부근의 빠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하고 델리를 평정한후 아그라 에 입성하였다(1526). 이때부터를 무갈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선 수천 년 동안의 인도 역사를 통하여 가장 넓은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인물이 아소카 대왕이었다. 그는 아쌈 지방과 최남단 일부를 제외한 현재의 인도 전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등을 대체로 포함하는 실로 인도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 P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트라는 말은 포르투갈어인 카스타(Casta, 종족, 혈통)에서 유래하며, 인도어로서는 바르나(Varna, 색체)가 여기에 해당되지만 이 말의 뜻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같은 성(姓)을 갖고 있는 가족집단><신화적인 조상을 모시는 같은 후손><세습적인 천직(天職)을 갖고 있는 사람들>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