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사이드 ㅣ 안전가옥 쇼-트 35
김미조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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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같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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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감상평일지 몰라도, 이 작품에는 이보다 더 정확한 평가는 없다. 책을 읽다 보면 하얀 종이 위의 까만 글자들이 두둥실 떠올라 스크린 속 생생한 장면으로 전환되는 신기한 작품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김미조 작가님의 『오프사이드』가 바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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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징역수와 신입 교도관. 익숙한 듯하면서도 이질적인 두 인물의 조합만으로도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과 영화적 매력을 뿜어낸다. 3일간의 귀휴를 얻은 무기수 '판금'과 감시를 위해 동행하게 된 교도관 '지오'. 두 사람이 공장과 산, 그리고 바다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여정은 머릿속에서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선명하게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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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위에 싹튼 연대, 해방을 향한 질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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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만 같은 둘에겐 의외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엄마'라는 존재다. 교도소의 높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그 안에서의 그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평행선 같은 관계였다. 그러나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던 판금과 ‘엄마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던 지오는 높디높던 담장을 넘고서야 비로소 그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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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져 있던 비밀과 진실이 교차하는 여정 속에서 '엄마'라는 공통된 단어 아래 둘은 마침내 진실한 연대를 이뤄낸다. 하나 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소란스런 동행은, 결국 스스로를 얽매이고 있던 과거를 끊어내고 서로를 구원하며 해방시키는 결정적 단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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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사이드』가 영상화된다면?

소설 속 나이대와는 좀 다르지만, 박판금 역에는 추천사를 쓰신 이정은 배우님, 윤지오 역에는 신혜선 배우님이 어울리지 않을까. 책을 읽는 내내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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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판금은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이 교도소가 있는 성주와 퍽 닮아 있다고 느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특별할 것 없이 매번 반복되는 하루. 차이점이라면 담장이 있고 없고 정도일 것이다.
- P29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가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P111

믿지 말아야 했다. 법이라는 이름과 정의라는 환상을. 세상이 죄 없는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하지 않은지, 세상이 얼마나 함부로 한 사람의 인생을 한쪽 끝으로 몰아내는지 그녀는 그때 뼈저리게 배웠다. - P166

여태 자신에게 뭐가 되고 싶은지 물어준 사람이 있던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었던 건 돈에 미친 년도, 남자에 미친 년도, 그냥 미친년도 아닌 엄마 박판금. 충분했다. 그래, 그거면 충분했다.
- P192

공이 선을 넘었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비정한 깃발처럼, 판금의 삶 역시 누군가가 임의로 그어놓은 선들에 의해 번번이 무효 처리 당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위치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던 판금을 향한 지독한 오프사이드 선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 재판에서 법은 비로소 그녀가 쏘아 올린 생존의 궤적이 정당한 선 안쪽에 있었음을 인정했다. 어떤 일은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달라지기도 했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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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선인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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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싱을 한 천사와 의인 출신 소시민의 서울 구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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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피어싱을 얼굴에 주렁주렁 단 천사가 나를 찾아왔다.”


언젠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할 때, 천사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거나 나를 구원해 주길 바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 앞에 나타난 ‘이런 천사’라면, 난 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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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물점 사장님의 서울에서 의인 찾기 대소동 ]


과거 ‘서울의인상’ 제1회 수상자라는 이력을 가진 미암철물점 사장 ‘재근’. 그의 앞에 자신을 천사라고 주장하는 독특한 차림의 ‘성갑’이 나타난다. 타락한 도시 서울을 멸망시키러 왔다는 성갑은, 불행 중 다행으로 서울에 진정한 의인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위에 계신 분’이 봐주기로 했다 이야기한다. 성갑은 재근에게 숨은 의인을 찾아내라는 황당한 의뢰를 맡기고, 그렇게 재근의 “끊길 듯 끊길 듯 의인 수배와 확인의 시간”(p.68)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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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시민의 연대를 가장 잘 그려내는 이야기꾼, 김호연 ]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경쾌한 속도감 덕분에 멈춤 없이 후루룩 읽힌다. 다만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많은 사건과 설정을 욱여넣은 듯한 밀도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선인』은 김호연 작가님 특유의 ‘콤비 서사’와 ‘소시민의 연대’를 따뜻하게 담아냈다. 『불편한 편의점』, 『연적』 등 전작에서도 보여주었듯, 작가님은 이번에도 유쾌하고 엉뚱한 캐릭터들과 함께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사회적 소재나 ‘인간의 선의’라는 무거운 주제를, 특유의 솔직함과 위트로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냈다. 우리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를 가장 따스하게 담아내는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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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해 봄, 피어싱을 얼굴에 주렁주렁 단 천사가 나를 찾아왔다. - P5

함께 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삶의 부당함을 수긍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 나는 나의 응원팀이 우승하길 간절히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나와 함께 내 인생의 트랙을 같이 달리길 바랄 뿐이다. - P10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며 떠나간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내 인생의 돛단배에 함께 올랐으나 어느 순간 저 멀리 떠내려간 사람들. 나는 아무도 쫓아내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내게 실망해 뛰쳐나간 사람들. 조난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나 역시 표류하는 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 P17

"제일 힘든 게 행동이야. 행동은 직접 제 몸뚱어리 움직여야 한다고. 책임 소재도 바로 드러나고. 말이나 글은 번복하기도 좋고 속이기도 좋잖아. 근데 내가 직접 한 행동은 번복할 수가 없어. 바로 책임으로 돌아온다고."
- P135

"사는 게 늘 불안하고 불편한데 내가 너무 오버한 거 같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평범하게 하루하루 사는 게 중요한 거 같더라고." - P235

재난과 인생은 날씨처럼 예측 불가였다. 폭우가 내리고 폭염이 이어지고 태풍이 왔다 한파가 지속되는 삶. 결국 인간은 가끔 주어지는 맑고 화창한 날에 기대 생을 견뎌야 하는 미물이었다. - P280

바라건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사옵니다. 바라건대 아무것도 행하지 마옵소서. 간절히 바라건대, 인간에게 우연이란 이름으로 찾아오지 마옵소서. 이미 우리는 충분히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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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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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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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사전 서평단으로 먼저 만나본 성해나 작가의 신작 『인비인(人非人)』은 ‘인간’과 ‘비인간’, 그 경계의 순간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은 어제(과거), 오늘(현재), 내일(미래)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스펙트럼을 배경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생체실험으로 태어난 잿빛 덩어리부터, 다큐멘터리 소재를 찾기 위해 전생 믿는 모임에 잠입했다가 진짜 윤회를 믿게 된 감독, 그리고 기묘한 느낌을 가진 액션 전문 휴머노이드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아홉 편의 기이한 이야기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다. 가제본에 담긴 세 편의 이야기들을 단 몇 시간 만에 읽어 내려가게 만든 작가님의 압도적인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은 전작 『혼모노』를 넘어선, 단언컨대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 선물하는 가장 흥미로운 기담집이 아닐까.


보통 우리는 사람이 더는 사람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섬뜩함을 느낀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온기와 도덕성, 즉 '인간성'이 사라진 존재를 마주했을 때의 기괴함은 그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보다 무섭게 다가온다. 읽어 본 세 편에서 귀신 하나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책장을 넘기는 내내 온몸에 서늘한 감각이 감도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괴이한 ‘인비인’들의 모습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와 부조리 또한 반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더워지는 여름날 읽기 좋은 마냥 가벼운 기담집이 아닌,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서늘한 ’살아있는 기담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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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버리기 ㅣ 자이언트 픽 3
배명은.범유진.이사구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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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북스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도서인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 이어, 자이언트북스의 세 번째 앤솔러지 『자이언트 픽 03 너를 버리기』가 출간되었다. 이번 앤솔러지는 현대 직장인들이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일터, 즉 ‘회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오늘날의 일터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담은 장르 소설 세 편 — 사장 비서직 괴담의 진실을 쫓는 오컬트 잔혹극인 배명은 작가의 「너를 버리기」, 직장 내 괴롭힘의 끔찍함을 담은 심리 스릴러인 범유진 작가의 「당신에게 어울리는 관」, 과중한 업무와 팀원 간의 갈등을 담아낸 메타픽션인 이사구 작가의 「소설을 쓰자」 — 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소위 말하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은 없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회사라는 한정된 배경을 다룬 이 작품들에 깊이 몰입할 수 있을지 조금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이 걱정은 기우였다. 회사라는 공간은 그저 거들뿐, 세 작품이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본질은 우리가 뉴스와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접해온 취업 사기, 직장 내 괴롭힘, 과로사 같은 '사회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려낸 이야기는 이내 마음속에 깊은 울림이 되었다.



소설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섬뜩할 때가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직장 내 사건·사고 뉴스를 보고 있자면, 차라리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순한 맛'이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는 가혹한 하루가, 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과 직장인들이 매일같이 버텨내고 있는 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온다. 매일 아침 일터로 향하는 모두의 하루가 즐거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고통스럽진 않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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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건물에만 등급이 있는 게 아니야. 사람에도 등급이 있다고. 너처럼 마음 약하게 굴면 평생 최저 등급이야." - P87

달라진 것이라면 지금은 부모의 것이 아닌 자기 목구멍이 틀어막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그런 일.
누군가에게는 죽도록 힘든 일. - P101

비슷한 비용으로 만들어진 건물.
비슷한 비용을 들여 사회에 쏟아지는 인력.
비용이 높을수록, 그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될수록 좋은 등급의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는 점에서 건물과 인간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건물이 나보다 등급이 높을 것이다.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목이 뻐근해졌다. - P106

그 믿음, 회사는 일 인분의 부품으로 제대로 작동하기만 하면 계급 상승이 가능한 곳이라는 믿음이다. 사무실은 실상 전쟁터였다. 귀족 아닌 이들도 몸 하나로 군공을 세워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현대판 전쟁터. 낙하산으로 입사한 사람이 있대도 상관없었다. 입사 전까지는 불공평한 라인에 서 있었더라도 입사한 후에는 능력으로 실적을 내야 하니 결국 같은 라인에 서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업무를 따오는 것도 결국 인맥이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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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이 제일 맛있단다
모니카 김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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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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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김의 『눈알이 제일 맛있단다』는 올해 읽은 호러 소설 중 가장 묵직한 존재감과 압도적인 흡입력을 선사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이민 여성, 특히 아시아 여성의 삶과 장녀, 모녀 사이의 관계를 호러라는 장르의 틀에 담았다. 작가는 "백인 남성의 시선에 맞서고, 여성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살아갈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독자이자 장녀인 나에게는 작품 안에 담긴 ‘K-장녀’로서의 무게와 부담감에 깊이 공감했다.



내가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어?

p.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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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이민 2세대, ‘나’는 "옛말에 생선 눈알을 먹으면 복이 온다더라". 이걸 먹으면 "너희 아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라는 엄마의 말에 용기를 내어 생선 눈알을 맛본다. 좋은 딸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아빠가 집을 나가고 얼마 뒤, 엄마는 백인 남자친구 '조지'를 소개한다. 그의 푸른 눈을 본 순간, 나는 지독한 허기에 휩싸인다.



삶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빠져나가며

마침내 숨이 멎는 순간을 지켜볼 거야.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겠지.

p.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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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 속이 비어 허전한 기운.

최근에 본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도 이 단어가 등장한다.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주인공 '동만'은, 테스트 중인 감정 워치에 ‘허기’라는 단어가 뜨는 것을 본다. 우리는 순간 알게 된다. 허기는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닌, 결핍된 감정의 신호라는 것을.



『눈알이 제일 맛있단다』의 주인공도 허기를 느낀다. "단순히 허기를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갑자기 폭발한 식욕을 참을 수 없을 지경"(p.366)의 지독한 허기를. 가정을 버린 아빠를 대신한 정서적 가장의 역할, 엄마의 감정을 오롯이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 그리고 어린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서 있을 곳은 없었다. 현실에서 기인한 이 끝없는 허기는 결국 그녀를 타인의 눈을 탐하는 파괴적인 선택으로까지 내몬다.



부부의 문제는 자녀에게 상처로 그어진다. 그 상처는 다시 자녀들 안에서 반복되어 그어진다. 부정적인 감정은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대물림된다. 이런 병든 관계 속에서 구성원 모두는 계속되는 허기에 시달린다. 서로의 감정을 먹잇감 삼아 물고 뜯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지독한 감정적 허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결국 ‘분리’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독립하는 것, 그것은 한 인간의 정신 건강과 온전한 삶을 지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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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를 쓰더라도 진정 탈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겉으로는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아닌 것들. 아마 그래서 지금도 엄마는 그 머나먼 과거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이미 모두 새로운 곳으로 떠나버렸는데 말이다. - P32

살아가며 한 번쯤은 자신의 운명을 속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두 번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인 우리는, 결국 인생이란 게 자기 팔자소관대로 흘러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 P53

엄마의 눈물이 내 손으로 흘러서 카펫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 눈물방울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우리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 된 건지, 나는 이제 엄마의 어머니였고 엄마는 내 딸이었다. 내 가슴에 머리를 얹은 채 축 늘어진 엄마의 무게가 다소 버거웠다. 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고 있는지 엄마가 들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섬세하고 미약한 실 한 가닥이 지금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투명한 실이 끊어져 버릴까? 그게 두려워서 나는 동상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 P120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얼굴 아래쪽으로 뚝뚝 떨어졌다. 내 몸이 가벼워지다 못해 거의 무중력 상태가 된 느낌이었다. 어딘가 멀리 뒤떨어진 곳에 잘못 끼어버려서, 바람이 빠진 채 홀로 남겨진 풍선 같았다. - P141

이렇게 온 세상이 으스러지는 듯한 압박감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아이들도 많겠지. 나는 항상 그런 애들이 부러웠다. 걔네는 자신이 얼마나 좋은 처지에 있는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자유롭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주변 모든 사람을 걱정하고 책임져야 할 필요 없이, 그 무엇에도 얽매여 있지 않아서 언제 어디로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 P161

엄마의 손을 볼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무력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살면서 겪어온 모든 불행과 부당함이 모두 내 책임인 것만 같다. 왜 나는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강하고 당당하게 엄마를 돌봐줄 수 있는 아들이었다면? 나한테 100만 달러가 있다면 제일 먼저 엄마한테 집을 사주고, 매주 네일 숍에 데려갈 것이다. - P177

나는 그런 엄마가 안쓰럽고 화가 난다. 엄마의 이목구비를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지현이와 나 자신이, 우리가 기원한 모든 작은 조각이 엄마를 통과하며 뜨개질처럼 엮인 모습을 보면서 더 진하고 애틋한 분노를 느낀다. 엄마와 지현이, 그리고 나는 이 실타래 속에 영원히 한 뭉치로 얽혀 있다. - P298

희망이란 끔찍한 것이다.
희망은 몇 달이 지나도록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는 우리 엄마다. 희망은 정성스러운 손맛으로 준비한 반찬과 별미가 가득 차려져 상다리가 휘어질 듯한 저녁 식탁이다. 희망은 내 품에 파고들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아빠가 돌아올까?"라고 묻는 어린 내 동생이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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