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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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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선미’는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우주와 선미를 가리키는 단어는 없었다.
우주는 선미가 애인이길 바랐고,
선미는 우주가 남자이길 바랐다.

우주는 선미를 위해 자신이 꾸며왔던
‘선미의 집‘을 미니어처로 하나 둘 만들어가며
우주를 위한 ’우주의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소설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길 바라며
잠시 숨통을 틔울 시간을 주는 것만 같다.

다정하게 먼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그저 바라봐주는 네 명의 주인공들처럼.

🔖 p. 56
우주는 사람의 공간 대신 상상 속 인물들의 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번 공간을 디자인하여 무대를 제작하면 그 위에서 같은 공연이 반복되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헤어졌던 연인이 모든 것을 잊은 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장면을 보는 것이 우주에게 도움이 되었다.

🔖 p. 94
미래에 대해서라면 이제 얼마든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주는 깨달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

🔖 p. 96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이 잔상과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헤어졌으니까. 이별은 우주와 선미가 함께 만들어낸 축복이었다. 실패가 아닌 결실이었다. 기어이 같이, 해냈다. 우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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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들의 어머니 트리플 19
김유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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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설같지않은소설 #단편소설추천

키워드


갱들이 눈앞에 나타나는 꿈을 꾼 것만 같다.

한 줄 평


오늘 기영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갱들의 어머니」라는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첫 문장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열아홉 번째 안내서,

『갱들의 어머니』

시인 김유림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담겨 있는 세 편 모두

'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주인공 모두 작가(혹은 지망생)이다.

 

"이 와중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글로 받아 적으면

그것이 시, 산문, 소설 중 무엇이 될 것인지를

가늠해본다." (「갱들의 어머니」)

 

"일을 관두고 작가가 되려고 하는"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

 

"회사를 관둔 뒤 줄곧

집과 카페를 오가며 소설이라는 걸 붙들고 있던

나에게" (「두 갈래로 나뉘는 길」)

 

그리고 그들이 쓴 글이

소설 속에 담겨있기도 하다.




 

「갱들의 어머니」

"갱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예상" 하고,(p. 12)

그렇기에 「갱들의 어머니」라는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 시민으로 위장한 채 시민사회에서

능청스레 살아가는 갱들"은

자신들을 "식별해내고 거둘 만한

소양과 재능이 있"(p. 13)는 '나'를

본능적으로 찾아온다.

 

갱들은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

"죽고 싶었던 순간에 대한 짧은 기록"(p. 51)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방을

설계도면을 그리듯 자세히 글로 묘사한다.

읽다 보면 주인공의 방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제목이 왜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일까.




「두 갈래로 나뉘는 길」의 주인공은

'나'의 개는 아니지만 함께 살고 있는 개, '볼보'가

강아지말 번역기를 통해 전한

"집. 고의. 탈출. 토니. 구하라. 생명"라는 말을 따라

'토니'를 찾아 나선다.

 


 

독특했다.

 

소설은

작가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내용들로

에세이와 소설 그 어디쯤에 있는 듯하고,

 

"「갱들의 어머니」라는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산문을 쓰는 것과 소설을 쓰는 것이 다르고

소설을 쓰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이 다른 것은 

인지상정." (p. 9)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들이

마치 말장난 같은, 의식의 흐름 같은

실험적인? 문체로 쓰여있다.

 

"나나 우리의 엄마는

어머니라는 게 되리라고 생각해서 

어머니가 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것이고

나나 우리가 엄마를 엄마로 만든 것이다.

내가 너의 어머니와 어머니를 공유하지만

나도 너의 어머니일 수도 있는 거야." (p. 11)

 

"이 머리는 내 머리, 

내 머리가 될 수도 있었던 머리,

머리는 머리카락이지만 머리카락은 머리가 아니다."

(p. 12)

 

『갱들의 어머니』

해설을 남긴 최가은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소설, 더 정확히는 어떤 '이야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며,

정작 그것의 내용은 들려주지 않으면서도

용케 이야기로 머무는 소설"(p. 131)인,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다.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가 담긴 세 편의 소설은

마치 꿈을 옮겨 놓은 듯했다.

꿈을 꿀 때는 모르지만,

꿈에서 깨고 나면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는 그런 꿈.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오늘 기영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갱들의 어머니」라는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운명이다. 운명이라는 게 존재해서 운명을 믿는 게 아니라 운명이 찾아오기 때문에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운명이 찾아오더라도 운명이 운명이 아닐 운명이라면 운명이 아니다. - P14

나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하하, 좋네요, 기쁘네요, 그래요 등의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게 제일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나를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함께 그럭저럭 관계 개선을 해나갈 수 있을 뿐이다. - P27

예감과 예상은 다르다. 파탄을 예감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하거나 예상하지 않으려고 들면, 예감은 예감에서 그칠 뿐이다. 예상은 한 치 앞을 엇나가지 않는다. - P28

사실 저는 이런 편견이나 저런 편견이 모두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일일이 신경 쓰다보면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편견과 마주했을 때의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오래된 편견과의 관계를 순탄하게 유지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과격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 P72

변화야말로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걸 방해하며 발목을 잡는다. 흔히들 변화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고 믿는다. (…) 그러나, 나에게 변화라는 건 정지와 동의어다. - P78

15시 43분. 오후에는 어떤 영혼이든 교환 가능할지도 모른다. 빛이 좋으니까. - P84

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그러나 어디에나 있어서 어디에도 없는 게 되어버리는 그런 것. 그런 것처럼요. 잊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살아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교환되는 건 없으니까. - P113

사는 게 불투명해지면 또다시 걸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그 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걷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그 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요. 사람이라면 결국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자꾸 걸어야 하는 거 같다고 말한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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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안전가옥 오리지널 27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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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인형 #복수 #진실 #판타지

키워드


그들에겐 인간이 아닌 곰 인형이

구원이었다.

한 줄 평


지난 8일 오후 4시경, 야무시의 한 고급 아파트에서 끔찍한 묻지 마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첫 문장


 

 

' 러블리 호러 ' 

 

조예은 작가의 작품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분명 호러인데,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트로피컬 나이트],

다른 소설집들까지

생각해 보니 조예은 작가의 작품을

참 많이 보았다.

 

판타지와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까지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참 매력적이다.

 

이번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특유의 판타지적 요소가 담긴

공포, 스릴러 작품으로 

 


 

야무시의 씨더뷰파크에서

집 앞에 놓인 독이 든 떡을 먹고

여러 명의 사상자가 속출한

묻지 마 테러가 발생한다.

 

그 테러로 인해 화영의 엄마,

도하의 부모님과 사촌 형 도현이 사망한다.

 

화영은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필요한

2000만원을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가 사망한 도하는

큰 아빠이자 도현의 아버지 정혁에게 입양된다.

 

화영은 돈을 벌기 위해

가출팸 우두머리 영진이 시킨 '낚시'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화영을 

누군가가 구원한다.

 

그 누군가는 "인간의 언어로 말" 하는

"화영의 영원한 친구 해피 스마일 베어"(p. 50)였다.

 


 

구원.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화영과 도하는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위험에 빠진다.

그때마다 그들을 구원해 주었던 건 바로

해피 스마일 베어.

화영과 도하가 학교 별관 옥상에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던 바로 그 곰 인형이었다.

처음엔 곰 인형의 눈을 붙여주며,

그다음엔 곰 인형이 되어

화영과 도하는 어른들의 뒤틀린 욕망으로부터

서로를 구원한다.

 


 

귀여운 곰 인형과 함께 펼쳐지는

청춘 액션 스릴러 작품이지만,

작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결코 귀엽지 않다.

 

경제적 양극화, 가출 청소년, 인신매매, 살인청부 등

 

그 속에서 피어나는 뒤틀린 욕망.

그 결말은 처참했다.

 

아니,

그 욕망에 대한 결과로써 합당한 결말이었다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문장 수집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조예은

 

화영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이 시대의 새로운 신이자 흉기인 돈을 쥐는 것이었다. 돈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돈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돈으로 끝맺을 수 있다. (…) 그러나 흉기란 남의 살에 박혀 있는 순간을 제외하곤 언제든 나 역시 상처 입힐 수 있는 것. 태어날 때부터 쥐고 태어난 게 아닌 이상 영혼 정도는 팔아넘겨야 간신히 손잡이를 쥘 수 있는 법이다.

p. 8

 

세상에는 다양한 거짓말이 존재한다. 착한 거짓말과 나쁜 거짓말, 커다란 거짓말과 사소한 거짓말. 그 자체로 파국과도 같은 거짓이 있는가 하면, 사실 그리 대단치 않은 거짓도 있다. (…) 하지만 모든 거짓은 파국과 연결되어 있는 법. 큰 거짓은 그 자체로 모든 걸 망치고, 일상의 작은 거짓 역시 누군가에게 까발려지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이용당한다.

p. 27

 

고민해 봤자 아무도 답을 내려주지 않는 질문이었다. 수학 공식처럼 딱 맞아떨어지지도, 과학 명제처럼 실험을 통해 결론에 도달할 수도 없다. 답이 없다는 건 끝이 없다는 것.

p. 60

 

늘 거대한 돌을 메고 있었던 듯한 과거와 달리 지금의 자신은 풍선처럼 가벼워서 곧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허공에서 양팔을 허우적대도 아무도 붙잡아 주지 않겠지.

p. 68

 

너무 많이 들어서 면역이 생길 만도 하련만, 매번 심장에 따끔하게 스크래치를 남기는 말들.

p. 84

 

하지만 매번 이렇게 명확한 경우는 적지 않나요? 사람의 마음이란, 한낱 손톱 거스러미나 치통만으로도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인데요.

p. 113

 

돈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고? 개소리. 돈을 쥐려 하는 그 순간 이미 이 뭐 같은 세상에 굴복하는 게 돼 버리는 걸. 그러지 않을테다. 두 손과 두 발로 직접 해낼 것이다.

p. 176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나여야만 했을까?

p. 274

 

후회해 본 적 없는 사람은 후회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 대신 되돌리려 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붙잡고 끊임없이……. 손을 댈수록 더 망가진다는 걸 모르는 채로.

p. 286

 

자신이 실패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실패를 두려워하니까.

p. 341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지난 8일 오후 4시경, 야무시의 한 고급 아파트에서 끔찍한 묻지 마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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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름
김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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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불안 #희망 #단편소설추천

키워드

오늘의 불안에 잠식되지만 않는다면,

내일은 보다 나은 미래가 되지 않을까.

한 줄 평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첫 문장


-----




[사랑의 여름]은 김은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로맨틱한 제목과 초록초록한 표지 디자인으로,

언뜻 봤을 때 풋풋한 청춘 로맨스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사회적 문제들과

그 속에서 느끼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그 불안 속으로 침잠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가족 간의 갈등, 교사 폭행, 뇌물, 인명 피해 사고,

청년 취업난, 환경오염, 동물복지 등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소설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불안을 통해

문제적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오는

압박을 느끼는 '나' (사랑의 여름),


학원생의 폭력과 학원 원장의 협박을 받는 '나'(톱),


테니스 모임의 자격, 수준에 대한 의문과

억울하게 쓴 누명에 지독한 갈증을 느끼는 '성욱' (스매싱의 완성),


엮이고 싶지 않은 인간관계를

자꾸 허용해 버리는 '나' (위해하는 마음),


건물 붕괴 사고로 무너진 벽에 갇혀

그들 부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여자'(바람의 언어),


어느 날 이후로

스스로를 좁은 방 안에 가둔

오빠를 걱정하는 '나'(피피와 구구),


아이를 잃고 난 후

일 년째 밖을 나가지 않는 '나' (실선을 긋다)


70일령의 생을 살게 됨을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닭)' (오늘의 기원)


 


 

 

인물들이 처한 불안 속에서도

결코 거기에 잠식당하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가 현실을 살아갈 때 필요한 자세를 배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단번에 없애버리고

최대한 빨리

정상의 상태를 되찾는"(위해하는 마음)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침묵해야 할지도"(바람의 언어) 모르니까,


"결과는 더 이상 중요치 않"(스매싱의 완성)고,


"더 이상은 함부로이고 싶지 않"(톱)아서,


"책에 나와 있는 연습 문제로는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피피와 구구)기 때문에,


"이번엔 점선이 아닌 실선을"(실선을 긋다) 그어,


"서로를 도와가며"(사랑의 여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축적"(오늘의 기원)될 수 있도록.


 

 


 

 

[ 문장 수집 ]

사랑의 여름, 김은

 

'적당하다'라는 균형감은 왠지 나에게 허용된 감각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주 부족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과도하거나. 그런 양극단이 주는 긴장감 속에 계속 머물러 있다 보면 결국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무덤덤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p. 14

내 눈에는 제각각의 궤적을 그리는 그래프들이 삶의 수많은 변수처럼 느껴졌다. 상한가와 하한가 사이에서 요동치다가 결국엔 단 한 번도 정점을 찍지 못한 채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고 마는.

p. 15

'더'여서 더욱 절망적이고, '덜'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삶이라면 이미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p. 22

"사람은 무엇보다도 손 간수를 잘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거든."

(…)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불안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물어뜯어 엉망이 된 손톱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모두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건가.

p. 36-37

감정에도 농도의 차이가 있어서 항상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흡수되어버리기 때문이다.

p. 37

삶은 더 쉽게 훼손당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 기회가 잠재되어 있는 것.

p. 47

정말 화가 나는 건 또 쉽게 허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나 '우리 사이' 따위의 말로 묶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번번이 귀찮은 일에 휩싸일 걸 알면서도 결국엔 관여하고 마는 것.

p. 86

"위해(慰解)와 위해(危害)는 발음은 같지만 완전히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 상반된 단어가 왠지 하나로 연결되어서 읽혀. 누군가를 위로하고 마음을 베풀어주는 것은 때때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p. 99

"회사 생활도 전쟁에 나간 것과 똑같아. 한편으로는 더욱 어렵기도 하지. 왜냐하면 전쟁에서는 군모나 팔뚝에 색이 다른 띠를 둘러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실히 구별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러지 않거든. 모두가 똑같이 친절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피아식별 자체가 어려워."

p. 100

전쟁에 나간 군인들도 위기의 순간에는 식별 오류를 일으킨다고,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건 결국 믿고 싶어 하는 절박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더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p. 102

 

그 두 가지 종류의 응애 중 어떤 것이 천적 응애인지 아닌지 구별해낼 자신은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둘을 굳이 구별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 절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봐 주지 않으리라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단번에 없애버리고 최대한 빨리 정상의 상태를 되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 105

"너 사는 게 뭔지 아니?"

(…)

"먹는 거? 자는 거? 먹고 자는 거?"

"아니, 틀렸어."

"그럼?"

"날마다 조금씩 쓸모 없어지는 거야."

"매일매일?"

"그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매일."

p. 143

"누구나 찬란히 빛나는 순간이 있는 거란다. 곧 희미해지긴 하지만."

p. 152

여덟 편의 소설을 책으로 묶기 전까지 나는 계속 0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상태로 오랜 시간을 지나온 느낌이다.

p. 220-221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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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가랑비메이커 단상집 1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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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문체 #공감 #위로

키워드


-

쓰는 작가님에게도 읽는 나에게도

소중한 선물이 되어주었다.

한 줄 평



 




-
시간은 무심히 흘러 이제는 너와 나
다른 계절 다른 장면 속에 놓였지만
바람 따라 실려 오는 내 소식에
네 하루쯤은 어지러웠으면.
첫 문장

 

 -

어쩌면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글이

누군가의 공감을 얻고

누군가를 위로해 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은

욕심일까.

 

-

문장과장면들의 첫 서포터즈,

'시선들' 1기의 마지막 책으로 만나보게 된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은

가랑비메이커 작가의

10년의 기록이 담긴 작품이다.

 

그녀의 글은 참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다.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번에도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느낀다.

 

그녀의 글 속엔

우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우리의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 지나치게 낭만적인 시선은 덜어내어 세상을 직시하고 지나치게 날카로워진 칼날은 조금 더 뭉툭하게 만들어서 누구도 함부로 해치지 않도록 단련하며.

p. 222

 

이런 생각이 담겨 있어서였을까.

그녀는 글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가끔 글을 읽다 보면,

자신의 감정이 한껏 묻어있는 글들에

피로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에서의

담담함 속에서 외려 더 큰 위로를 받는다.

 

나도 그렇게

한 걸음 뒤에서 마주한 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보고 싶다.


문장 수집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가랑비메이커

 

뚝 떨어진 찬 공기 속에서도 그때, 우리는 아직 가을을 입고 있었다.

p. 28

내가 그를 떠났던 이유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를 내 옆에 두면서

내가 그 곁을 지키면서

맞춰가자는 이유로

서로를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p. 45

움켜진 것들이 늘어가자,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고 마음만 홀로 분주했다. 삼키고 싶은 것들이 늘어갈수록 토해내고 싶은 마음도 강하게 자라났다. 차라리 밑빠진 독이 되고 싶었다. 허기보다 괴로운 건 더부룩한 속이었다.

p. 56

가슴을 뛰게 하는 것과

마음을 식게 하는 것은

복잡하거나 미묘하지 않다.

단조롭고 분명한

본질적 이유만이 있을 뿐이다.

p. 65

때론 가벼운 눈짓, 손짓 하나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순간에서

단 하나의 구원이 된다.

p. 90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도 가끔은 두 눈을 꼭 감고 무엇이든 꿔봐요. 갚는 건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해요. 그 정도 무모함은 사치가 아니라 지금의 가치를 위한 투자가 아니겠어요.

p. 155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내가 나를 안아주지 못하면서

내 속에 뭉친 응어리 하나 풀지 못하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겠다고.

p. 164

어떤 행위는 그 자체로 즐겁다. 이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하는 계산보다 즐거움이 앞서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 거기에 결코 쉽지 않은 난이도까지 더해진다면 그 일은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p. 167

좋아하는 길을 가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다. 마침내 삶이 될 이 여정에서는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제 길을 이탈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사명일 것이다.

p.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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