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7월 21일 

오늘은 몽테스키외입니다. 이런 류의 책의 장점은 많이 듣지는 못한다고 해도 한번쯤은 들어본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내용은 몰라도 이름은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사람입니다. 그리스,이태리,영국을 거쳐서 프랑스입니다. 서양유럽의 철학 발전의 순서인 것 같습니다. 18세기에 드디어 프랑스에서도 절대군주시대를 뛰어넘어 계몽주의의 시대로 진입합니다. 

몽테스키외의 연구대상은 '사회를 규율하는 질서이자 궁극적인 규범으로서의 법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그는 '법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세가지로 보았는데 그것은 자연법, 국민의 정신, 정체의 원리입니다. 

1) 자연법은 인간의 생물적 본능과 사회적 본성을 탐구하는 것으로 로크의 자연법과는 다릅니다. 로크는 사람이 사회를 만들기 이전부터 재산(소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설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사람은 누구나 사회를 이루고 살고자 하는 욕망, 즉 상호결합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의 생물적 본능과 사회적 본성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2) 국민의 정신은 말그대로 정신이고요. 3) 정체(政體)의 원리는  각 정체를 움직이는 사람의 정념(passion)으로 몽테스키외는 각각의 정체를 이루는 핵심적인 것이 제도적인 장치가 아니라 정념이라고 보았습니다.(정체는 공화정체, 군주 정체, 전제 정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화정체에는 덕성이, 군주정체에서는 명예가, 전제정체에서는 공포가 필요합니다)  

몽테스키외는 법과 풍토의 관계, 국민의 정신 같은 것을 연구하고 제도적 장치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풍토와 민족을 고려하지 않고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기는 보편적인 이성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정체의 원리에서 그 핵심을 인간의 정념으로 본 것을 보면 몽테스키외는 보편적 이상주의가 아닌 인류학적 상대주의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이 점에서 저자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소개하면서 부제를 '이성주의에 대한 희미한 저항'이라고 달았는지 약간은 알 듯합니다.)

몽테스키외를 통해 근대 정치의 기본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작가는 소개합니다. 근대 정치의 원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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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20일 

여러 책의 정수를 소개하는 이런 류의 책의 즐거움은 읽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그나마 가볍게 읽을 수 있고 그리고 한권의 책으로 여러권의 책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장점(?)입니다. 수박겉핧기.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약간은 아느체할 수 있는..... 

오늘은 존 로크의 <통치론>입니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사회를 해석하고 통치이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로크의 <통치론>은 영국의 역사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명예혁명의 시기의 정치적,사회적 환경과 맞물려 있고요 반왕당파에 해당되는 신생 부르조아계급을 대변하는 사상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로크는 인간을 합리적 인간으로 보았는데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는 계산능력을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합리성과 로크의 합리성이 차이가 보입니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정확성을 추구한다면 로크는 이익을 따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익이라는 합리성은 자본주의로 연결이 되겠네요. 이 시대에 많은 사유가 발생한 것 만큼 또한 합리성의 의미도 그 사유만큼 그 의미를 달리 하는 것 같습니다.   

로크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자유상태를 유지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통치이념. 기반이 로크가 추구한 이념이고요. 그 이념은 현대 자본주의체체, 사회/국가의 존재목적이 될 겁니다. 그리고, 로크도 이런 인간의 권리는 신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간의 계약(동의)에 의한 것임을 주장합니다. 

<통치론>을 읽을 때는 계약론과 저항권에 유념하고요. 자연법사상과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사상을 로크 사상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부르조아 사회를 옹호하는 텍스트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크는 경제적 재화(재산)으로 인간을 판단했습니다. 이것을 갖고 있어야 자유와 평등도 요구할 수 있는 주체가 됩니다. 이점을 유념하시면서 그 이후의 사유/이념의 흐름을 읽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잡담.

이 챕터에서 잠시 진화와 사회진화론이 나오는데 쾌 흥미있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진화는 경쟁이 아니라는 것(다윈은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답니다.) 적자생존과 경쟁을 결합시킨 사회진화론의 부적절성. 사회진화론이 어떻게 한 사람을, 사회를, 국가를 파괴시킬 수 있는지 윤치호라는 친일파를 통해 설명하는데 꽤 재밌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tip하나 진화론은 '더 뛰어난'종의 생존이 아니라 '우연히'환경에 적응한 종이 살아 남는다 라고 합니다. 경쟁에 의한 적자생존이 아니라 적응에 따른 생존이라는 얘기겠죠.  

그리고,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것. 다양성의 증가라는 것. 기억하세요. 그럼 오늘 우리의 사회는 선진화를 위해 눈도 막고, 귀도 막고, 입도 막고 무조건 뛰어가라고 하는데, ' 모두 한방향으로 일렬종대 앞으로 갓'인데, 그러면 우리는 진화가 아니라 진보하기 위해 다양성도 무시하고 그냥 마냥 전진 앞으로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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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19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입니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웠던 데카르트입니다. 존 로크의 '경험론'과 대비하여 대륙의 합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딱 이정도죠. 고등학교 교육특성상 자세한 내용은 안되고 간단 명료한 몇가지만 기억에 남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은 확실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학과학을 통해 세계를 다시 해석하고 또 사유의 방식도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데카르트도 철저하게 과학/수학에 집중했고 또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책에서 결론만을 읽고 무엇을 취하기보다는 데카르트가 자신의 시대를 살면서 어떤 질문을 던졌고 어떤 사색의 과정을 거쳤으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도움이 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테카르트를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를 늘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시기는 유럽에서 '30년 전쟁'으로 종교관이 부딪히고 이에 따른 격변이 발생하던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였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 상황과 견주어 이렇게 설명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데카르트는 신체와 이성을 철저하게 분리하였습니다. 이성만이 실제이고 그 외의 것은 부속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같습니다. 인간만이 이성을 지녔고 이런 인간이야말로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오로지 이성만입니다. 또한 고전을 무시했습니다. 새롭게 성장하는 과학과 수학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으며 과거의 것들은 아리소토렐레스 같은 거물 철학자도 무시하였습니다. 과거의 사유, 논증, 경험, 이념 모두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현재의 시각에서 사유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저자는 데카르트 시대를 전후해서 두 가지 세계가 뚜렷이 대립된다고 소개하네요. 하나는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전통적, 도덕적 삶의 세계'입니다.  

과학과 더불어 철학에서도 새로운 사유방식이 생성되었습니다. 확실성의 세계입니다. 데카르트 부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떠한 철학도,사상도 세상과 단절되어 태동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세상과 일정부분 단절된 상황에서 이성의 힘으로 고찰해 나갑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고찰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도 결국은 그 시대의 큰 흐름 수학,의학,천문학등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합리론에 도달합니다. 세상과 단절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흐름과 세속적인 것들과 함께 이성도 육체도, 문학도 철학도 과학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지식인도, 우리의 희망도, 우리의 주장도 세상으로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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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7. 16  

오늘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입니다. 워낙 유명인이라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작/주장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사람이죠. 

마키아벨리를 통해서 이제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신아래, 봉건시대의 체계를 무시하고 새로운 체계를 주장했으니 그리고 그 이후 세상의 체계가 바뀌기 시작했으니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신의 영역하의 질서체계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대전환기입니다. 이 전환기에 <군주론>은 작성되었고 그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후의 소개된 고전을 통해 우리는 마키아벨리 이후에 형성된, 고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지금은 어떤 모습은 띠고 있는지, 그것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소개함니다. 

<군주론>은 헌정사와 2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핵심어를 중심으로 구분한다면 신생군주국, 자국군, 설득력을 기준으로 크게 3개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무력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가고 주장하고요. 무력(물리력)과 설득력의 경계가 모호하며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군주의 "역량"이라고 말합니다.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제도적인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적인 설득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하는데,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특정한 역사적 국면(장소와 시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만이 군주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역량입니다. 결국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법이 <군주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고대 세계의 플라톤은 통치자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는데, 근대 세계의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기개를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군주는 "새로운 군주"라고 하는데 "새로운 군주"는 모든것을 자기 혼자 힘으로 쟁취하는 군주라고 합니다.아마도 기존에 물려받는 , 선택되어 모든 권력과 부를 갖는 통치자, 회장님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군주를 몰락시키는 것은 미움과 경멸인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 군주는 물리력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기서 물리력(무력)은 폭력이 아닙니다. 전 물리력(무력)을 강인함, 실력, 의지 등으로 해석하고요. 설득력은 소통, 이해(하기, 되기),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아벨리하면 무지막지한 통치술을 주장한 사람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꼭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시대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통치술을 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용어의 의미가 500여년의 간극으로 우리의 이해와 다소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어째든 이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질서가 바뀌어야 함을 얘기합니다. 그것에 의미가 있겠네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져 주고요.

ps. 

새로운 질서체계를 얘기하지도 만들지도 못하면서 그놈의 일방통행과 폭력(가혹행위는 있으나 고문은 없고, 방패질과 군화발은 있으나 총/칼은 없고, 무지막지한 고소,소송은 있으나 법과 정의의 승리는 없는)은 난무하네요. 우린 지난 10년간 맛보지 못한 신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구시대는 지나가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역사는 돌고 돕니다. 아! 지겨운 신시대. 언제 또다른 새로운 시대가 오려나. 

누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오른쪽에 있어서 그사람 왼편에 서 있으면 다 좌빨이 된다고... 어디까지 달려가 서 있어야 우빨이 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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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14일  

오늘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제목은 절대자와의 만남. 신곡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자의 만남과 그 여행을 통해 단테가 범상치 않는 인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내용입니다. 

이글을 보면서 새삼 저의 무식함을 깨닫게 되었네요. 단테가 1300년을 전후해서 살다 간 사람이네요. 전 지금까지 1500년대 인물로 알고 있었는데요. 후~. 그리고 베아드리체가 여기도 나오네요. 역시 사람은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네요.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신의 경지이든, 관조적 경지인듯 인간이 꿈꾸는 최고의 경지이겠지요. 단테는 기독교인이었을 감안하면 신의 경지는 아니고 그 아래 단계의 경건한 수도자적인 삶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단테의 이 구분방식 말고 단테가 안내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에 따라 구성을 나눌 수도 있다고 하네요. 베르길리우스가 안내하는 지옥편1~34곡과 연옥편 1~29곡, 베아트리체가 안내하는 연옥편 30곡~천국편 30곡 그리고 베르나르두스가 안내하는 천국편 31~33곡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신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지옥에서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이어지는 단테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사실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자의 해석이 그나마 곁들여져 있지 않았다면 이 책에 소개된 몇곡의 시도 다 읽지 못했을 겁니다. 단지, 천국까지 이르는 단계가 단테를 기존의 평범한 인간에서  새로운 경지의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만 받았네요. 그 과정에 별로 공감을 갖지도 못했구요. 

단테가 기독교인일 거라는  선입견때문에 그런지 단테가 추구한 경지라는 것이 절대자(신)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장과 보호에 만족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치열한 고뇌와 성장을 통해 높은 경지의 수준에 도달하고 이상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 그 한계에서 성장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차이가 있는 것인지, 없는것인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쭉 이어지던 이상에 대한 욕망,절대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과 같은 것들에 대한 고민/사상을 접하는 것같았는데 '신곡'편에서는 갑자기 맥이 딱 풀리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결국 사람은 절재적 존재(신)의 손바닥안이라는 느낌. 그러면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갈구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성경이 말하는대로 불경이 말하는대로, 코란이 말하는대로 열심히 생활하면 그만이지. 뭘 그리 갈구하고 관조적수준이니 하는 높은 경지를 갈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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