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처럼 고도로 지적인 사람은 하나의 정해진 틀에서 사유하지 않는다. 명확성과 무모순성은 단순한 사람들에게나 가능하다. 지적인 사고는 그와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의 저서를 40년이 넘는 숙고와 집필의 시간을 거쳐 격동적인 삶과 사고에 나타나는 온갖 방황과 혼란, 기분, 착상, 의심, 고집이 담긴 진행 중인 작업으로 볼 때 아마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전집에서 불과 몇 페이지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텍스트들 사이에는 가끔 몇 년, 또는 심지어 수십 년의 간격이 있다. <하나의 정해진> 플라톤, <하나의 정해진> 플라톤 철학은 없다. 있다면 플라톤 신봉자와 해석학자들이 만들어 낸 플라톤만 있을 뿐이다. 플라톤 자신은 플라톤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다윈이 다윈주의자가 아니고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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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철학의 기본자세는 둘 중 하나다. 나는 내 감각을 믿고 절대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감각을 믿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더 높은 인식에 도달하려고 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는 철학이 빠른 시간 안에 끝을 맺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드넓은 인식 영역, 즉 철학이 신학으로부터 조금씩 넘겨받은 초감각적인 것의 인식 영역이 새로 열린다. 지난 2,000년 동안 철학자들이 두번째 길을 걸어온 것은 당연하다. 그 길은 그들에게 위대한 결론을 도출할 완전히 다른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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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3-01-24 1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학으로도 영역을 넓혔고.. 저는 과학을 읽으면서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벗어날 수는 없더라고요. 과학도 수학도 사유가 바탕이 안 되면 해결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2023-01-24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6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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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종교를 만나면서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교배하면서 결국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 괴물의 위장에 벗어날 길 없이 맴돌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우리에게 이걸 하면 벗어날 수 있어 라는 간명한 해답은 주지 않지만 그 해답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준다. 사랑하라 그리고 연대하라. 그가 쓴 모든 책은 사랑과 연대가 억압체제를 이겨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기득권이 존재하는 한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자본주의는 지속될지도 모르지만 길 가운데 있는 큰 바위를 치우려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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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저주토끼
정보라 지음 / 아작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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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언저리에 인적이 없는 산기슭에 서서 어두운 숲을 바라보는 느낌. 등줄기를 타고 슬그머니 오한이 올라오지만 그 안에 있는 무언가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다. 인간이었던 존재들에게는 어떤 사연들이 있어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러한 괴이와의 조우는 원인과 결과의 직조가 아닌 어느날 갑자기 닥친 사고와 같을 것이다.
홀로 있는 밤에 스탠드 하나만 켜고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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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에 자본주의는 외부의 에너지들을 어떻게 담아내고 흡수할 것이냐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제 자본주의는 사실상 정반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외부성을 완전히 성공적으로 통합한 자본주의는 식민화하고 전유할 수 있는 외부 없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스무 살 이하의 청소년 대부분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의 결여는 더 이상 쟁점조차 아니다.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빈틈없이 장악하고 있다. 제임슨은 자본주의가 무의식에 스며드는 방식을 두려움 속에서 전하곤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식민화해 왔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 이상 논평할 가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까운 과거가 정치적 잠재성들로 가득한 타락 이전 상태였다고 상상하는 태도는 위험하며 오해를 초래할 소지가 있다. 또 20세기 내내 상품화가 문화의 생산에서 담당했던 역할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전용과 회복, 전복과 통합 사이에서 벌어졌던 옛 투쟁은 이제 끝난 듯 보인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이전에 전복적 잠재성을 지닌 듯 보였던 것들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사전 구성precorporation, 즉 자본주의 문화가 욕망과 갈망, 희망 등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사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욕망의 층위에서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환영적 대타자Other들에 대한 무지와 악의 적나라함 속에서 부인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세계의 억압적 네트워크와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과도하게 추상적인 비인격적 구조며 동시에 우리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본에 대한 가장 고딕적인 묘사가 가장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자본은 모종의 추상적인 기생체, 만족을 모르는 뱀파이어이자 좀비-제조자다. 그런데 자본이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살아 있는 육신은 우리의 육신이며, 그것이 만들어 내는 좀비는 바로 우리다. 어떻게 보면 정치 엘리트들은 실제로 우리의 하수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초라한 서비스는 우리의 리비도를 세탁하는 것, 우리의 부인된 욕망들이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 그것들을 우리 앞에 친절하게 재-현하는re-present 것이다.

‘현실주의적’realistic이라 간주되는 것, 사회적 장의 어떤 지점에서나 가능해 보이는 것은 당연히 일련의 정치적 규정에 의해 정의된다.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자연화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성공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니라 가치로 생각되는 동안에는 결코 자연화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 윤리적 의미에서의 가치라는 범주를 제거하고자 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성공적으로 ‘비즈니스 존재론’을 확립해 왔으며, 이 존재론은 건강관리와 교육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영역이 비즈니스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자명한 사실로 간주했다. 브레히트부터 푸코와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급진 이론가가 주장해 왔듯이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해야 하며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제시되는 것이 그저 우연적일 뿐임을 폭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을 성취 가능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 현실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한때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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