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에 자본주의는 외부의 에너지들을 어떻게 담아내고 흡수할 것이냐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제 자본주의는 사실상 정반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외부성을 완전히 성공적으로 통합한 자본주의는 식민화하고 전유할 수 있는 외부 없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스무 살 이하의 청소년 대부분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의 결여는 더 이상 쟁점조차 아니다.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빈틈없이 장악하고 있다. 제임슨은 자본주의가 무의식에 스며드는 방식을 두려움 속에서 전하곤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식민화해 왔다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 이상 논평할 가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까운 과거가 정치적 잠재성들로 가득한 타락 이전 상태였다고 상상하는 태도는 위험하며 오해를 초래할 소지가 있다. 또 20세기 내내 상품화가 문화의 생산에서 담당했던 역할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전용과 회복, 전복과 통합 사이에서 벌어졌던 옛 투쟁은 이제 끝난 듯 보인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이전에 전복적 잠재성을 지닌 듯 보였던 것들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사전 구성precorporation, 즉 자본주의 문화가 욕망과 갈망, 희망 등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사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욕망의 층위에서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환영적 대타자Other들에 대한 무지와 악의 적나라함 속에서 부인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세계의 억압적 네트워크와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과도하게 추상적인 비인격적 구조며 동시에 우리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본에 대한 가장 고딕적인 묘사가 가장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자본은 모종의 추상적인 기생체, 만족을 모르는 뱀파이어이자 좀비-제조자다. 그런데 자본이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살아 있는 육신은 우리의 육신이며, 그것이 만들어 내는 좀비는 바로 우리다. 어떻게 보면 정치 엘리트들은 실제로 우리의 하수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초라한 서비스는 우리의 리비도를 세탁하는 것, 우리의 부인된 욕망들이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 그것들을 우리 앞에 친절하게 재-현하는re-present 것이다.
‘현실주의적’realistic이라 간주되는 것, 사회적 장의 어떤 지점에서나 가능해 보이는 것은 당연히 일련의 정치적 규정에 의해 정의된다.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자연화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성공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니라 가치로 생각되는 동안에는 결코 자연화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 윤리적 의미에서의 가치라는 범주를 제거하고자 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성공적으로 ‘비즈니스 존재론’을 확립해 왔으며, 이 존재론은 건강관리와 교육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영역이 비즈니스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자명한 사실로 간주했다. 브레히트부터 푸코와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급진 이론가가 주장해 왔듯이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해야 하며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제시되는 것이 그저 우연적일 뿐임을 폭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을 성취 가능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 현실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한때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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