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간혹 우리에게 광기 한 잔을 주며 마실 것을 권한다. 손 하나가 구름 속에서 나와서 알 수 없는 취기로 가득 찬 잔을 우리에게 불쑥 건네는 것이다.
평등을 능력주의로 환원해버린 것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정의로운 지위 질서를 위한 진보적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사회의 위계를 철폐하려고 하기보다 ‘재능 있는‘ 여성과 유색인, 성소수자들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그들의 역량을 강화해서‘ 사회의 위계를 ‘다양화‘하고자 했다. 그러한 이상은 본질적으로 특정 계급에 한정된 것이었고, ‘과소 대표된 집단‘ 출신의 ‘자격 있는‘ 개인들이 같은 계급의 백인 이성애자와 동등한 수준의 지위와 수입을 획득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만 활용되었다. 그러한 이상의 페미니즘 버전은 효과적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점이 없었다. ‘달려들어leaning in, 유리천장을 깨부수는‘ 데만 집중하는 이상, 이러한 페미니즘의 주요 수혜자는 이미 필요한 사회적 • 문화적 • 경제적 자본을 가진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이는 여전히 지하실에 팽개쳐져 있을 것이다.
분명히 해두자. 나는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이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 동성애혐오, 이슬람혐오, 트랜스혐오에 대한 시급한 우려 사항들을 묵살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방해물과 싸우는 것은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의 핵심 과제다. 그러나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방식처럼 훈계적인 생색내기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역효과를 낼 뿐이다. 그러한 접근은 불의의 문제를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의 문제로 환원하며, 그러한 불의를 뒷받침하는 구조적• 제도적 힘의 깊이를 무시하는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관점을 전제한다.
최종 도달 지점이 어디인지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가 진보적 포퓰리즘이라는 선택지를 추구하지 않으면 현재의 헤게모니 공백 사태가 연장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치적 신념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노동계급을, 점증하는 압박과 악화되는 건강, 급증하는 빚과 초과근무, 계급 아파르트헤이트와 사회적 불안정성 속에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그들을 그 어느 때보다 증폭된 병적 증상(분노에서 비롯되어 희생양 만들기로 표출되는 혐오와, 연대 의식이 사라진 골육상쟁의 세계에서 폭력 분출에 뒤따르는 엄청난 억압) 속에 침수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숙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경제는 물론이고, 그 경제를 최근까지 뒷받침해 온 인정 정치와도 분명하게 결별해야 한다. 배제적인 종족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능력주의적 개인주의도 내던져버려야 한다. 오로지 탄탄한 평등주의 분배 정치와 실질적으로 포괄적인 계급 문제에 민감한 인정 정치를 결합함으로써만, 현재의 위기를 넘어 더 나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 역량을 가진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할 수 있다.
10년을 넘어 만난 글을 오늘 들려주고 싶다. ‘성실함이야말로 재능입니다‘라고.
성실하다는 말이 듣기 싫었던 건, 내가 천재들을 동경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게 너무 싫었나 보다. 뭐 어쨌든 이제는 내가 성실하다는 걸 알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마치 내게 타고난 다른 재능이 없다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예전에 재능이 없음을 탓하는 내게 누군가 댓글을 남겨줬었다. 성실함이야말로 재능이라고. 그때는 그 말이 나에게 와 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말이 가끔 떠오른다.게다가 재능이 ‘성실함‘이라면, 앞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말한 것처럼 ‘충치‘나 ‘뭉친 어깨 근육‘으로 크게 타격받을 일도 없지 않은가. - P85
미키 할러에게는 다음 날 바로 재판에 들어가야 하는 게 현실이었고, 내게는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에 가는 게 현실이다. 그에겐 애도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고 나에겐 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충분치 못했었다. 시간이 흐르면 미키 할러도 나도 저마다의 고통과 괴로움을 극복하게 되지만, 조금 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돌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224
소설이나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어떤 이야기을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시대 문제를 담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심지어 SF나 판타지 장르에도 가능하다. 일명 작가의 시대정신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것이 없다면 단순한 오락거리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집 중 ‘완벽한 여인 T‘가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T라는 여성이 자신과 똑같은 여성을 발견하고 따라가서 알게된 사실과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결합하며 본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미스터리와 남성 위주의 관습적인 사고 방식의 문제의식이 함께 담겨 있다. 그저 화려한 스펙타클의 SF가 아닌 시대 문제를 담아내고, 잔잔한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여성문제를 암시하고 있다.짧은 단편 속에 이런 여러가지 복선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놓고 살짝 맛만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후속 이야기가 무척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