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철학을 읽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그의 아포리즘을 인용하는 허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철학은 니체와 마르크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영향력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푸코는 니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하며 해석의 중층성을 제시했다. 행복한 삶을 위한 지식과 기술의 전파자로서의 니체, 삶의 허무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하는 의사로서의 니체, 사유의 명랑함과 지식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광대로서의 니체 등등. 읽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니체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만큼 그의 아포리즘은 중층적이며 다층적이다.

니체는 '느리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자'로 스스로를 명명했기에 라르기시모로 읽어야하고, 그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망치'와 '다이너마이트'로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며 '갱도'로 들어가 '원석'을 캐내고 다듬어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늙은 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영원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렇다면 다시 한번더!'를 외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초인'이라는 목표를 향해 '즐겁고 명랑하게'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니체의 철학이다.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치유하고 고양하고 더 높은 경지로 이끌 수 있는 공부이기에 시대와 무관하게 노예가 아닌 귀족의 도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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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3-22 2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DYDADDY님 편안한 하루 보내셨나요.
오늘 미세먼지가 좋지 않은데, 저녁 뉴스 보니 내일도 오늘처럼 좋지 않을 수도 있겠어요.
마스크 잘 쓰시고, 조심하세요.
건강 빨리 회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한 밤 되세요.^^

DYDADDY 2023-03-22 23:45   좋아요 1 | URL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는 것이 제가 일하는 지역은 주황색이었지만 거주하는 지역은 녹색이었어요. 하지만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면 공기청정기가 ‘문닫아!‘라고 굉음을 지르고 있어요.
아직도 증상이 남아 조금 힘들지만 곧 나을 것 같아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알라딘에서 이런저런 책을 찾다보면 서니데이님의 이름을 종종 보곤 합니다. 요즘 읽으시는 책에 대한 내용도 올리실 수 있는 여유가 생기시길 바라요. ^^
 

주네는 성이 우리 문제의 핵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가장 치명적인 억압 체제를 폐기하지 못한다면, 즉 권력과 폭력의 병든 광란 상태인 성 정치학의 중심부로 돌진하지 않는다면 해방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우리를 변함없는 원시적 유곽 지대로 다시 한번 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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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죄수들은 작업장으로 들어갔는데 간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곧 나름대로 작업을 시작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서 반항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으면 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어도 좋아. 상관없어. 너희들의 음모가 탄로났지. 며칠 전에 간수가 너희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거든. 그래서 머지않아 너희들에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내리게 할 거야. 너희도 말겠지만 간수는 아주 지독하고 복수심도 강하지. 하지만 나 좀 봐. 너희들은 여태껏 나를 오해했지. 그러나 보기완 달라. 나는 간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나를 아주 소중히 생각하거든. 나는 너희를 구해줄 수도 있고 또 구해주려고 하고 있어. 하지만 잘 들어봐. 너희들 가운데 내가 간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어주는 자들만 구해줄 거야. 그 나머지들은 불신의 결과가 무엇인지 맛보게 될 거야." 얼마 후 나이 먹은 죄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너를 믿고 믿지 않는 것이 대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네가 정말로 그의 아들이고 또 네가 말한 대로 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를 위해 말을 좀 해주렴. 그것이야말로 네가 할 일이 아닌가. 그러니 믿고 안 믿고 하는 말은 집어치워주게나!" 그러자 어떤 청년이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나도 저자를 믿지 않아, 그는 단지 공상을 하고 있을 뿐이지. 일주일이 지나도 우리는 오늘처럼 바로 이 자리에 있게 될 거야. 내기를 해도 좋아. 그리고 간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거야." 그때 뒤늦게 작업장에 나온 마지막 죄수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혹 간수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는 이제 더 이상 알 수는 없게 되었어. 간수는 방금 즉사했지.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소리를 질렀다. "야아, 야아 여보시오, 아드님, 유산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 우리는 이제 당신의 죄수가 되겠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 말했지만 나는 누구든 풀어줄거야. 단, 내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만큼이나 나를 믿는 자들만 풀어주겠어!" 죄수들은 웃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를 내버려둔 채 가버렸다.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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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에 처음 읽었을 때 재미있고 흥미로운 결론이라 생각했던 것이 재독하는 지금에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인류 문명 발전 양상이 다른 것은 결국 ‘부동산‘(원작에는 무엇이라 표현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본에는 정확히 저 단어이다.)이 문제였다. 어떤 대륙에서 시작했느냐가 농경의 시기와 작물 및 가축으로 가능한 수를 가르고 결국 그것이 인류 역사에서 문명의 발전이 속도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빅히스토리라는 장르의 책이 많이 출간되어 당연한 이야기처럼 되어버렸지만 그 시초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사회에서 많이 대두되고 있는 ‘공정담론‘의 허망함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삼십대에게 공정이란 거칠게 표현하면 ‘공정하게 시험을 보고 그 결과에 승복하자‘인데 그 시험까지의 경로는 공정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운이 좋게 좋은 대륙에서 시작하여 문명의 발달을 이룬 국가처럼 개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좋은 조건에서 태어나 공부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한 시점에서 시작한 사람과 극단적인 환경에서 공부할 시간마저 부족할 정도로 힘들게 시작한 사람이 시험이라는 관문에서 만났을 때 그 결과가 어찌되었던간에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마지막에 국가적 불평등을 보완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국제 사회에서 그러한 것이 보완장치로 되기에는 너무 선한 결론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개인에 적용해서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복지 정책이나 선별 정책을 쓴다고 해도 지금의 우리 사회 내에서 얼마나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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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는 더 나은 삶, 혹은 사후의 삶이 아니라 현재와 똑같은 삶의 반복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이란 수식어가 설명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에서 현세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거나 그 밖에서 구원을 찾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삶의 가장 결정적 순간에 나타나 우리의 궁극적인 무가치함(우리는 먼지 같은 존재이다)을 들이밀면서 어떤 최종적 위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우리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낙담해 쓰러지게도 한다. 이 아포리즘의 독일어 제목은 문자 그대로 최고의 무게"인데 니체는 이 제목에 따로 괄호를 쳐 설명을 달려고 했다. 영원회귀를 천문학적 측면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삶의 반복이 질적 동일성의 차원이 아니라 수적 차이만을 가져오며 발생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삶을 한 번사는 것과 셀 수 없이 여러 번 사는 것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살게 될 삶이 언제나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삶과 그것의 조건들로 회귀하며(이 월광도 다시 한 번), 우리를 불꽃과 화염으로 변화시키고, 외부 대상을 흡수해 동화할 과제를 반복해 안게 된다(마치 집을 짓는 거미처럼).

그러나 영원회귀의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다음의 두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단 한 번이라도 신성하다고 할 만한 엄청난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의 반복을 위해 우리는 영원회귀 개념을 인정하고 그 순간에 따르는 크고 작은 일들 역시 모두 긍정할 수 있을 터이다. 다른 한편 영원회귀 개념이 삶의 원칙으로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이 원칙은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고 또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도구가 된다. 일단 영원회귀 개념이 삶의 원리가 되면 우리는 매순간, 모든 것에 대해 이것을 다시 또, 그리고 무한히 반복하고 싶은지 묻는 가장 무거운 질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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