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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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는 문학이 무력해지고 소설이 가치를 잃은 시대인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다양한 경로, 매체가 전하는 타인과 세상의 이야기만으로 이미 충분한가?

이 물음에 나는 경솔하다 싶을 만큼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런 날, 문학이 무력해지고 소설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거다. 적어도 나의 영원, 내가 숨쉬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이 확신에 근거가 있는가? 

물론, 근거가 있다. 문학은, 소설은 이 시대, 오늘 혹은 내일, 너 혹은 우리 삶의 단면이나 단절된 시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랜 과거에서 가까운 과거, 오늘을 거쳐 내일, 먼 미래까지 사라지거나 끊기지 않는 연속된 이야기다. 지금의 나, 우리와 닮은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과 시야를 넓히게 하는 다면의 창(窓)이 되는 거다.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새삼 확신한다. 이 낯선 세계의 이야기 역시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먼 대륙, 다른 인종, 다른 피부색, 생소한 언어, 무관한 역사,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너무나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아프리카 북부에 자리한 나라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다. 알제리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20세기 중반 8년에 걸친 독립 전쟁의 승리로 독립한 후, 90년 대 시작된 내전으로 지금까지 테러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다. 식민지 1세기, 그 정도의 시간은 한 나라의 많은 것 어쩌면 거의 모든 것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래의 언어는 상당 부분 지위를 잃는다. 언어에 담긴 정체성, 역사, 감정과 의지까지 빼앗는다. 나라의 권리를 되찾은 이들은 변화, 개혁을 꿈꾼다. 그러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무엇을 회복하고, 어디까지 고치고 바꾸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혼란의 한 가운데에 한 남자가 있다. 원래 주민의 후예이면서, 어떤 과정에서든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으며, 이후 수십 년을 프랑스에서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이 남자는 여전히 고향의 언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 의지를 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프랑스어로 형성된 정체성 또한 갖고 있다. 그런데 새로이 정권을 차지한 세력은 프랑스어의 사용을 금지한다. 많은 지식인, 언론인, 시민이 알제리를 떠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실종, 사라지는 일이 계속된다. 이 혼란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삶과 사랑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평생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던 이야기, 기록할 수 없던 일들을 자기 민족의 언어로, 또한 프랑스어로 써 나간다.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처음 느낀 건 "식민의 역사는 닮아있다."는 거였다. 어떤 이유에선가 외세가 유입된다. 조선의 경우 동학 농민군 진압을 위해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를 둘러싼 협약의 결과로 일제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알제리의 경우 프랑스 해역에 출몰하는 해적의 진압이 그 이유였다. 핑계로든 억지로든 한 번 들어온 그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 - 대륙 침략의 발판이든, 석유 등 자원이든 - 을 합법적으로 얻기 위한 권리를 세계에 인정받으려 한다. 피를 흘리며 총칼로 위협하든, 지도자와 권력층을 회유하든 식민 상태를 공고히 한다.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거나 동화시키려는 시도가 계속 된다. 운이 좋으면 빨리 독립하고 운이 나쁘면 식민 상태가 좀 더 오래 지속 된다. 식민 상태가 끝나면 평화가 찾아올까? 그렇지 않다. 한국은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 동족 간의 전쟁을 치른 후 둘로 나뉘었고, 알제리는 10년 넘는 내전을 치르고 지금 현재, 2018년 까지도 테러와 내전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상한 말이 되겠지만 한국,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보다 먼저 식민지화 됐으면서 2차 대전 승전국인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독립의 권리를 얻지 못하고 독립 전쟁을 치러야 했던 알제리. 정치, 종교와 문화적 배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을 치르는 알제리.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모양, 직선과 직각에 가까운 국경선을 가진 알제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출신이라느니, 알제리 독립을 반대했다느니, 프랑스 2차 대전 영웅 샤를 드골이 알제리 독립을 승인했다느니, 그런 드골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느니 하는 단편적 지식들. 알제리가 어디에, 어느 대륙에 있는지 그 역사가 어떤지 관심도 없던 멀고 먼 나라의 전쟁 이야기.

 

무관심했다. 계기도, 이유도 없었기에. 정의로운 나라, 세계 평화를 수호하려는 세력들이 왜 부당하게 침탈 당한 조선의 권리와 영토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가 원망하던 때가 있었다. 순진했달까, 그들이 뭐가 다르다고 그런 걸 바랐던 걸까. 아프리카의 더 넓은 영토 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 미래의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진행형으로 존재했다. 분단, 테러, 전쟁, 죽음의 땅에서 나고 자라며, 두려움에 떨다 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평화로운 나라를 꿈만 꾸다 죽어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한민국의 고통, 전쟁의 위협 역시 현재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우린 역시 운이 좋은 편인 거다. 


 이런 게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프랑스어 권 소설, 알제리, 아랍 작가의,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남자의 고백이 담긴 소설.

 조선의 식민지, 동족 상잔의 전쟁, 분단과 전쟁의 위협. 우리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는 소설이 그 비극성 하나만으로, 비극의 씨앗이 된 외세의 침입, 식민지라는 공통의 배경 하나만으로 닮은 것이 된다. 그들의 혼란, 고통, 미래로 이어져 해결을 요구할 과제들을 도무지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하는 거다.


 문학, 소설이 왜 그 가치를 잃지 않으리라 확신하는가?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얼마만큼 명징하게 그 상징을 드러낼 수 있는가, 얼마나 생생하게 갈등과 고민, 감정을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이야기 속 상징, 갈등과 고민, 감정을 발견하고 사유로 연결짓는 책임은 독자에게 달린 문제다. 

 

 알제리의 역사와 프랑스 식민의 역사를 조금 더 알게된 후에 다시 읽어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발견할 수 있겠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 다시 읽었을 때 더 많이, 다양하게,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이야기. <프랑스어의 실종>은 그런 이야기의 하나가 됐다.


 이건 덤인데, 타국의 멀고 먼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나라 역사가 담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역사를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끄러움이랄까, 아쉬움에 가까운 미안함이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나는 걸 느꼈달까. 지식을 채우고, 배움의 범위를 넓히는 건 분명 효용이 있다. 그러나 사유가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 되고, 뿌리가 없는 배움은 간단히 흔들리는 법이다. 우리의 사상, 사유를 구성하는 언어의 가치와 존재 의의. 이 소설은 아마 조금 더 깊은 곳, 더 무거운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던 게 아닐까. 다음에 다시 읽을 때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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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05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아시아 제바르의 다른 소설 <사랑, 판타지아>부터
읽기 시작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이 소설은 알제리의 식민화 과정부터 그리고 있거든.
그 다음에 알제리 독립투쟁을 그린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는 게 맞는 것 같군.

영화 <알제리 전투>는 덤으로.

대장물방울 2018-11-06 00:34   좋아요 0 | URL
오, 그렇다면 전 역순으로 읽게 되는 거네요. 그것도 나름 흥미로울 걸로! 크크 암튼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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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가면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 그 자리에서는 왕복 2차선에 그려진 횡단 보도가 보인다. 신호등이 있지만 황색 점멸 신호뿐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도 그 자리에 신호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으리라. 신호등도 횡단 보도도 그 정도의 의미. 언제든 어디서든 건너도 되는 길에 놓여 다만 형식을 갖추었을뿐인 정도다. 

 

 고작 형식뿐이라도 횡단보도에는 의미가 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황색 점멸 신호등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길 한복판으로 건너기보다 횡단보도로 혹은 그 가까운 데서 건너려고 한다. 운전자는 횡단 보도 주변에서는 언제든 사람이 도로로 나올 수 있음을 예측하며 지난다. 무턱대고 길을 건너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음에도 사고가 나지 않는 건 갖춰진 형식을 기반으로 공유하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다.


 도로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기에 보이는 게 있다. 좀 더 정확히는 떨어져서 조금 위에서 봤을 때 말이다.


"횡단 보도를 건너는 사람과 지나는 자동차는 얼마나 위태롭고 치명적 관계인가?" 

 그저 태연하게 멈춰서는 자동차의 운전자가 놀랍고, 그토록 대담하게 뛰어드는 보행자가 두렵다. 놀라움은 그런 상황에 놀라지 않음에서 생기고, 두려움은 태연함이 의미하는 일상성에서 느낀다. 보행자와 자동차의 위태로운 관계는 어디에나 있는 보편, 일상적인 풍경. 놀랍지도, 두렵지도 않은가?


 어떤 이들은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통계를 인용한다. 횡단 보도에서의 교통사고 확률은 예를들면 백만 분의 일이고, 그 사고에서 치명적인 상처, 예를들면 사망할 확률은 다시 몇 십분의 일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범하게 되는 심리적 오류는 그 백만분의 일 혹은 몇 십분의 일 확률의 당첨자가 '자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통계를 인용하지만 통계에서 자신을 제외하면서 통계의 희박한 확률에 의지하는 거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운이 나빴다"고 한다. 운의 문제였을까.


 가까운 게 잘 보이기 마련이고, 보고 싶은 걸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너무 가까운 것만 보고 있지는 않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제목처럼 역사 속 인물들, 중국 고전의 이야기를 뼈대로 지은 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제 역사의 기술인지 착각할 만큼 사실적이다. 최고의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미쳐 호랑이가 된 사람 이야기, 활의 명인이 되길 꿈꾸다 경지에 이르러 활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사람 이야기, 공자와 제자 자로 이야기, 한나라 무제 때 장수 이릉 이야기.


 모두 아득한 먼 옛날의 이야기인 데다, 일상에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이라 일본인이 재해석 한 중국 이야기까지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내놓을 대답이 궁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까운 일이 아니기에 보이는 게 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추천하며 읽기를 권할 수 있는 거다.


 몇 군데 함께 생각해봤으면 싶은 구절을 적어본다.

 <제자>에서 도전하기 위해 찾아온 자로에게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말에는 채찍이, 활에는 활도지개가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도 방자한 성격을 바로잡기 위한 가르침이 꼭 필요한 것이라네. 틀을 바로잡고 갈고 닦으면 비로소 유용한 재목이 되는 법이지._71페이지

 느끼는 바, '배움'에 있어서 실용성을 우선하는 시기의 정점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걸 읽어서', '그걸 알면', '그걸 배우면', '그걸 생각하면' 따위의 뒤에 "뭘 할 수 있는데요?" 혹은 "뭐가 될 수 있는데요?"가 따라붙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책이 외면 당하고, 도덕이 가치를 잃는 건 '아무 쓸모가 없어서'가 아닌가 말이다. 


 공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어떤 쓰임'이 있을 때만 그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다. 사람 입장에서야 말이 유용하기에 굴레를 씌우고 채찍을 내리겠지만 그건 말에게는 수고로운 일이자 고통일 뿐이다. 유용한 재목이라는 것 역시 사람의 입장에서다. 재목이란 베어져 쓰임에 맞게 가공한 나무다. 사람은 쓰임을 얻지만 나무는 쓰러져 일단의 생을 끝내게 된다. 


 <이능>은 뛰어난 장수였지만 전쟁에 패해 병사를 잃고 흉노에 항복한다. 노한 무제 앞에서 이능을 변호하다 벌을 받게 되는 이가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사기 집필을 위해 치욕을 무릅쓰고 궁형을 택했다고 알고 있었는데(죽음, 벌금, 궁형에서 선택할 수 있었으나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 없었고, 벌금을 낼 돈은 부족해서 궁형을 택했다고), 여기서는 선택보다는 '어쩔 수 없었던', '불가피한 운명'으로 그려진다. 죽음을 택할 수 있었으나 죽을 수 없었기에 궁형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기를 완성한 게 정말 '사마천'일까 아니면 '사마천 이었던 사람'이었을까? 

처참한 노력을 1년 정도 계속한 후, 그제야 그는 삶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기쁨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_184페이지

 사마천이라는 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사기를 집필하는 '기능'만 남은 시간을 이어갔던 건 아닐까. 사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에서만 기쁨을 느끼는 삶. 그것은 살았던 게 아니라 살아진 게 아니었을까.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를 집필하면서 느낀 심정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쓰고 싶다'가 아니라 '써야 한다'는 마음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이능 자신도 흉노에 항복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고국에 바친 충성과 그에 대한 고국의 보답을 생각하면, 아무리 무정한 비판자라 하더라도 그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인정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한 남자가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도 결코 자신에게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_209페이지

 이능이 아직 항복하기 전, 잘못된 사실이 전해져 한나라에 남아있던 어머니와 부인, 자식들이 몰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절망한 이능은 흉노 선우의 항복 제의를 받아들여 선우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우교왕의 지위를 얻는다. 이렇게 항복한 이능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있으니 소무라는 사람이다. 소무는 이능의 20년 지기 친구로 항복의 권유에 응하지 않은 채 19년 동안이나 나라와 주군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 자신처럼 가족 전부가 몰살당한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억울한 처분으로 죽음을 맞은 형과 동생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풀려날 거라는 기약도, 누군가 그의 지조를 알고 기억해줄 거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소무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음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거다. 


 '보통 사람인 나'는 많은 선택의 순간, 갈등, 고민과 마주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찾기에 열심이었다. 이능의 선택이 틀렸고, 소무의 선택이 옳았다는 이분법식 정답 찾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실리를 위한 선택에서의 '어쩔 수 없는'이 아니라 자기 선택의 순간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자아 없음'의 '어쩔 수 없는' 때가 압도적으로 많지는 않았던가. 눈에 보이는, 수치화 가능한 가까운 것들을 선택, 판단의 기준 삼지는 않았나.


부끄러움에 그치지 말아야 하건만 늘 부끄럽기만 하다.


이 부분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데미안>을 떠올리게 하기에 적는다.

그것은 '의리'라든가 '절개'라든가 하는, 밖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려고 해도 억누를 수 없이 용솟음쳐 나오는 가장 친밀하고 자연스런 애정_211페이지

소무와 이능이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 차이를 말하는 부분이다. 이능은 장수로서의 임무, 군주와 조국을 향한 의리로서 항복을 거부하고, 성과를 만들어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소무는 의리나, 절개, 임무를 떠나 순수하게 솟아나는 애정으로 긴 시간을 견디고 이겨낸다. 약한 내면은 간단히 흔들리고 휘둘리지만 단단한 내면은 외부의 조건들, 힘으로 파괴할 수 없음을 일깨우듯.

 소무는 칭송받을만 하다. 그리고 위대하다. 하지만 괴로움 끝에 타협한 이능은 비난받아 마땅한 걸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충성의 기회, 가족까지 모두 빼앗긴 후에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 영원히 유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은 이능을 괴롭힌 사회와 사상, 제도적 얽매임을 냉정히 돌아봐야 할 때 아닌가.


 톨스토이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읽어보려다 책장에 꽂는다. 왜 고전을 읽는가? 질문은 하나지만 답은 무한하다. 다만 단순히 이것 하나만은 생각해보자. 옛날, 아주 오래된 옛 이야기가 전혀 다른 시대, 세상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울림을 남길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발 아래를 살피며 걸어가면 돌부리에 채이거나, 혹시라도 있을 구멍에 빠지는 건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조금 멀리, 종종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으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아주 오랜 후에야 도착할 수도 있다. 아주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꼭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그것도 그렇다. 그러나 그 결과를 '어쩔 수 없는' 그 어떤 힘에 맡기지 말았으면 한다.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하기를.


 세상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 닿는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 역사 속에서 걸어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상상, 제법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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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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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수학의 유용함을 체감해본 경험이 있는지? 산수 수준의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사칙연산 정도면 일상에 큰 지장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계산을 카드로 하다보니 거스름돈을 헤아릴 필요도 없고, 좀 복잡한 건 스마트폰 계산기가 해결해 주니까요.

아이러니한 건 수학이 우리 일상 무척 가까운 곳,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기본 원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도의 물리, 화학, 전자, 전기 등등. 지금 이 짤막한 감상을 적고 있는 스마트 폰에도요.

이토록 가까이에, 흔하게 존재하는 수학적 원리들. 편리한 기계와 제품을 만드는 공학적 기술들. 이 모든 걸 만든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그들은 어쩌다, 왜, 어떻게 그 일을 해냈을까요? 무엇보다, 그들은 누구인 걸까요?

입시에 찌들 수밖에 없는 환경, 억지로 공부한 시험 과목들, 이해 이전에 암기하고 반복해서 정답을 찾던 수학과 과학 문제들. 결국 수포자와 과알못을 대량 생산해내는 데 성공한 교육 제도의 부작용. 수학, 물리가 좀 재밌으면 안 되는 걸까?

아마도 탄생 배경도 목적도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건, 그렇게 많은 선생님이 있었건만 왜 과학이 재밌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거였습니다. 어떤 과정으로 공대생 만화가 그려지고,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읽는 동안 과학이 재밌었다는 겁니다. 도무지 인간의 언어, 문자처럼 보이지 않는 수학적 증명이나, 공식이 등장해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눈이 세 개 달린 것도 아닌데 다른 세계 사람 같던 천재 물리, 수학자들이 보통의 사람처럼(두뇌, 천재성은 도무지 보통이라고 할 수 없지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 공대생이 그린 공학과 수학과 과학, 그걸 연구하고 고안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하철에서 내리는 역을 깜빡 지나칠 뻔 하게 만들만큼 재밌습니다.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나 과학, 물리가 진저리나게 어려웠던 사람도 편안히 볼 수 있습니다.

익숙한 이름의 과학자, 수학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하고,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학자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학이 웃길 수 있음을 분명히 증명합니다.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 ˝앗! 이런 모습 처음이야!˝ 시간이랄까요.

만화가를 꿈꾸던 공대생이 그린 수학, 과학 이야기. 한 번 웃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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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쓸모 있는 인간 - 오늘도 살아가는 당신에게 『토지』가 건네는 말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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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은 말이 '몸에 힘 좀 빼세요.'였다. 처음 물에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공감할텐데 힘을 빼면 가라앉을 듯한 두려움이 일지 않던가? 당연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 반대보다 크기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배겨낼까.

몸에 힘을 빼면 가라앉는 게 아니라 뜬다는 걸 알게된 후에도 여전히 매번 힘을 빼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그도 그럴게 팔을 젓는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수영인데 힘을 빼라니 수영을 하라는 건지 제자리에 떠 있으라는 건지? 싶었던 거다.
 
물론 나중에 익숙해지고 나니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팔을 젓고 발차기와 호흡을 맞춰야 수영이 수월하다는 걸 실감하게 되긴 했다. 오히려 괜히 힘을 주다보니 쉽게 지치고 다리에 쥐가 나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걸 알게된 거다.
 
수영 다음으로 힘을 빼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게 글쓰기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배운 적이 없으니 정확히는 읽은 말인데, 힘을 빼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거였다.
 
어려웠고 지금도 터무니 없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차라리 생각이 없던 때는 겉멋 든 글이나마 끄적일 수 있었고, 한 번 끄적이고 나서는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마음 편했구나 싶다.
 
 뭔가를 쓴다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데 하고 싶은 중요한 말에 힘을 주지 않으면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인지 아닌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까 싶었다. 소설에는 줄거리가 있어야 하고, 주인공이 있어야 하며, 사건의 기승전결이 분명해야 읽는 재미가 있는 거 아니냔 말이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하지만 자꾸 생각하게 된다. 정말, 그것 뿐일까?
 
 이 책은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 속 인물들의 삶과 생각,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행동의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4년 전 인가에 읽기 시작해서 이제 5권을 읽고 6개월은 잊고 지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완독에의 의지가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타오르는 걸 느꼈다.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잔혹하다. 그 소설을 내가 읽기 전에는 어떤 매력적인 주인공도 환상적인 스토리도 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토지>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배경이 되는 시간이 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설 속 배경으로부터 7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 마음을 끌리게 할 인물이 얼마나 되겠어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의 빈천도 없고, 자유니 독립이니 싸워야할 외적도 없는 평화로운 이 때에 말이다. 

그런데, 있었다. 
70년 전 보다 세상이 복잡해진 만큼 더 강렬하게, 당시 세상이 앓았던 병적인 문제들이 모습만 바꿔 퍼져 있었던 거다. 그 문제들을 끌어 안고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다.

이 책은 나에게 일종의 백신처럼 느껴졌다. 세상과 사람의 맛을 보여주는, 목숨이 오갈 질병을 열이 조금 나고, 살이 얼마쯤 따끔한 정도로 그치게 하는 백신 말이다.
 
 토지에는 기구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같은 상황에 놓였어도 다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한계를 이기고 구속을 넘어 성장하는가 하면 높은 데서 떨어져 더러운 시궁창을 구르듯한 인물도 있다. 

그런 인물들의 삶을 이 책은 힘빼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건네듯 전해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고, 당신이 깨닫길 바라는 건 저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토지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고 환대하지 않고 토지를 읽고도 잊어 버렸다고 박대하지도 않는다. 

이렇게까지 읽으면서 좋은 책이구나 하게 된 건 오랜만이다. 덜 읽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헤아림이 얕은 탓도 있겠지만 얼마쯤 마음 편하게 '한 번 읽어봐요'할만한 책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외국 작가 누구,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고전 무엇이 아니고는 말이다. 그래서 반가웠다. 이 만남이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몇 년 간 책을 잔뜩 힘을 주고 대했다. 아마 그래서겠지 싶은데 제법 지치기도 했고. 새로운 시작에 앞서 토지를 읽고 싶게 만든 책을 만나서 참 좋았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의 작가님 정도는 아니라도 나에게 매력적이었던, 몹시 미웠던, 가장 사랑했던 인물을 고르고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구나 한다.
그럼, 당장 내일부터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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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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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기준은 작고 사소한 차이라고 한다.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야기들을 놀랍고 새롭다며 환호하는 일을 접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잃고는 한다. 그래서 시도해 보기로 한다. 비판 없이 수용하던 습관을 버리고 낯설게 읽고 돌아보기.

 건축가이자 교수 유현준의 저서가 시작이 된 건 단지 우연일 뿐.

비난은 쉬워도 비판은 어렵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비난이고 어디부터가 비판인지 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때도 많다.

모두가 '예'라고 한다고 해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무도 '아니오'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예'라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권위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바로 잡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돌아보기를 잊을 수 있다. 스스로는 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바로 보지 않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다양한 견해와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다.

많이 배운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올바른 판단을 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냈듯, 나는 나의 자리에서 나의 목소리를 내는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 글은 그런 사소하고, 주관적인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그 나중을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비판의 범위는 유현준 작가의 서술과 도서 전체의 만듦새(편집 등)를 포함한다.

시작하는 문장은 본문 28페이지. /오탈자/
"필자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교복 자율화 시대였다."

서술어가 제대로 호응되지 않은 문장이다.

"필자가 학교 다니던 시절은 교복 자율화 시대였다." 정도로 고치거나 문장 전체를 다시 쓰는 게 더 정확하겠다.


이런 형식으로 본문을 발췌하고 본문에 대한 견해, 의견을 적어 보기로 하자.

 

29페이지
우리의 아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체주의적인 공간에서 지내게 된다.

저자가 '전체주의'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앞뒤 문맥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문장은 저자가 전체주의를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전체주의가 가장 먼저 상기시키는 건 히틀러의 나치 정권일 거다. 전체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 파시즘과 같은 형태로 구현됐다. 개인의 존재가 부정당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획일성과 몰개성으로 치닫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듯 보이나 그런 의도를 헤아린다고 해도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쓴 건 경솔하지 않았나 한다. 앞으로도 여러 차례 짚어보겠지만 저자는 인기 있는, 방송에 출연할 정도의 인지도에 교수라는 권위까지 지닌 사람이다. 모든 독자를 배려하고 염두에 두라고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오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단서, 설명 정도는 덧붙여야 하지 않았을까?


33페이지
"지식은 책에서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자연을 만날 기회가 없다. 지혜를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삶에 필요한 것은 자연이다.

성급하게 일반화, 단순화한 결론이다. 이 문장 역시 어떤 의도로 썼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저자가 '자연'의 개념을 자신의 세대, 자신의 경험에 국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 물, 계절의 변화 등 인위와 대비되는 개념에서 얻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인류가 접하는 자연의 개념은 시간이 흐르며 계속 변해 왔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20세기에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19세기 산골에서 태어난 사람과 비교해봤을 때 자연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지혜를 배울 수 없어야 한다(물론, 이 결론에 억지가 다분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자연을 접할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면 절망적 결론을 내놓기보다 현재 환경에서 자연과 만날 수 있는 작은 기회, 가능성을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콘크리트 건물의 풍화, 보도블록 틈새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자연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거대한 자연을 접한다고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41페이지 
1학년 때는 삼각형 모양의 마당에서 놀다가, 2학년이 되면 연못 있는 마당에서 놀고, 3학년이 되면 빨간색 경사 지붕이 있는 교실 앞마당에서 놀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아이들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정상적인 인격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획일화되고 커다란 아파트 건물에서 산다.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그런 전체주의적 '시설' 같은 건물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정상을 규정하는 순간 비정상이 생겨난다. 정상을 규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위 표현은 심한 비약을 포함한다. 전제가 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정상적인 인격'으로 크지 못한다고 읽힌다.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테지만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전체주의'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그 쓰임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겠다. 도시, 아파트라는 건물은 그 선택의 여지, 기회가 적더라도 결국 자발적 선택의 결과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애초에 적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관계로 잘못된 견해를 제시했다면 누구든 꼭 가르쳐 주시길). 저자에게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학교 건물의 모델, 이상형이 있는 듯한데,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해서 가능성 자체를 봉쇄해서는 안 된다.


50페이지 
이처럼 다양성은 행복의 가능성을 높인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학교 건물에서 공부한다고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 그런 세상은 북한 같은 전체주의 세상이다.

저자가 '전체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있다.


58페이지 
지난 30년을 돌이켜 보면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세르게이 브린, 일론 머스크에 조지 호츠까지, 여섯 명의 천재가 배출되었으니 줄잡아 5년에 한 명 꼴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천재는 왜 유독 미국에서 잘 나타나는 것일까?

3류 자기계발서에나 등장할 법한 비논리적인 부분이다. 성공한 인물, 새로운 아이디어, 발상 등으로 막대한 부를 일궈낸 사람들을 천재라고 한 거라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빼놓을 수 없을 텐데 빠져 있다. 미국의 '다양성'이 이러한 천재들을 배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논지인데, 성장 배경과 그들이 거친 교육, 가정환경이라는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미국 사회의 다양성'이 결정적이었다고 결론짓는 건 성급해 보인다. 미국의 좋은 점을 보고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미국은 전 세계에서도 빈부격차가 크기로 유명하다. 과연 그들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올바른 소통을 하고 있다고만 볼 수 있는 것인가?


88페이지 
인구 감소 현상은 앞에서 언급한 쥐의 실험과 양상이 똑같다. 제한된 공간 내에서 인구 폭증으로 인한 환경문제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체 수 증가가 멈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결혼이 늦어지고 아이를 낳지 않는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문제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하나는 지구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구를 줄이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비논리적이다. '자연스러운'이라는 표현이 반어적 표현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쥐의 개체수 증감과 인구 증감을 동일 선상에서 해석하는 건 억지스럽다. 인간의 경우 환경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결혼이 늦어지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환경이 열악한 집단에서만 발생한다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 현상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시대와 의식의 변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러운'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없다. 해결할 필요도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두 가지 모두 실행 불가능한 방안이다. 해결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지구의 크기를 키우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구를 인위적으로 줄이는 것 역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느 쪽도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여길 수 없다.


91페이지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선진국 중에는 아마도 단위 면적당 부동산이 가장 비싼 뉴욕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뉴요커'들의 라이프를 살펴보면 그렇게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간 소비의 측면에서 뉴요커들은 아주 넓은 면적을 영유하며 살기 때문이다.

한쪽 방향에서 바라본 일방적이고 성급한 결론이다. 물론 저자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유가 적절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앞서도 적었듯 미국은 빈부격차가 특히 심한 나라다. '뉴요커'라 하면 뉴욕 주에 사는 사람들을 두루 일컫는 말일 터, 주변의 공원 등 넓은 공간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뿐 아니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도 있을 터다. 그들의 존재를 간과하고, 미국은 선진국이고, 뉴요커는 좁은 집에 살아도 주변에 공원 등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 넓기에 덜 비참할 거라는 건 성급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결론이 아닐까.


159페이지 /오탈자/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가는 백 년 전에 지어진 기차역의 구조에 덧대어 아름다운 미술관을 건축했다. 기찻길이 다니던 곳은 조각품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기찻길이 다니던 곳'이 아니라 ''기차가 다니던 길'이 올바른 표현 아닐까.


186쪽 
필자는 이 공식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계산 당일 두 그룹의 주가 총액을 구해 봤다. 롯데 그룹은 29.42조 원이었고 현대차 그룹은 100.21조 원이었다. 이 둘은 3.4배의 차이가 난다. 위치에너지 값과 주가 총액이 소수점 첫 번째 자리까지 동일하게 3.4배 차이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비교 공식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옥의 위치에너지와 주가 총액 사이에 상호 적용이 가능한 공식이 있다는 논리인데 지나치게 단순화한 결과이자 결론이다. 어떤 이론, 공식을 적용하고 그 관계를 확인하는데 단 하나의 사례밖에 제시하지 않은 건 둘째다. 첫째로 사옥의 위치에너지는 변하지 않는 수치지만, 주가 총액은 변화한다는 게 간과됐다. 롯데 그룹과 현대차 그룹의 주가 총액이 항상 동일한 비율로 변하지 않는 한 이 공식이 근거를 가질 가능성은 없다. 정말 근거를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국내외 그룹 3곳 이상을 비교 확인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189페이지 
청나라 시대의 변발은 정수리까지 모두 삭발하고 뒷머리만 남겨 놓는 헤어스타일이다. 아마도 권력자가 대머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자신이 머리가 빠지고 위치에너지가 낮아지니 어린아이부터 시작해 온 국민을 대머리로 만드는 헤어스타일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 헤어스타일 권력의 '하향 평준화'라고 할 수 있다.

농담이라고 해도 질이 나쁘다. 추측은 자유다.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지나친 비약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겠다. 우선 변발의 핵심은 삭발에 있는 게 아니라 땋은 머리에 있다. 청나라만의 특징이 아니라 만주족, 일본 사무라이의 촌마게도 유사하다. 논리의 비약을 조금 흉내내면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모두 대머리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이번에도 역시 의도는 추측할 수 있다. 권력의 위치에너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학술, 연구로 증명된 사실 관계없이 무턱대고 내놓은 추측을 그럴듯한 설명을 더해 적는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197페이지 /오탈자/ 
대한민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 쇄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건축적 배경을 살펴보자.

쇄락이 아니라 쇠락이 옳은 표현이다.

글을 쓰다 보면 초보적인 오탈자를 쓰기도 한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적지 않기에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편집 과정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오자를 바로 잡지 못한 건 독자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208페이지 
우리는 정치 집회를 할 때 주로 광화문 광장에 모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적 중심축은 '이순신 동상 - 세종대왕 동상 -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축선상의 중심 공간이 광화문 광장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억지 논리다. 역사적 중심축이 '이순신 동상 - 세종대왕 동상 - 광화문'이라는 논리가 어떻게 생겼을까? 참고로 세종대왕 동상이 현재의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건 2009년 10월이다. 2018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 중 광화문 광장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적 중심축'이 광화문 축선상이라는 결론은 지나치다. 그 이전의 정치 집회와 장소, 민주화의 성지들을 간과하고 수도 서울이라는 요소를 확대해서 해석한 결론을 마치 사실처럼 적는 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책임이 있는 대표 지성인의 자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19 페이지 
우리에게 권력의 상징인 높은 건물이 없는 데는 산악 지형이 많기 때문에 건축물의 구축술이 크게 발전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성을 보더라도 대부분이 '산성'이다. 힘들게 평지에 해자를 파고 성을 짓기보다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악 지형을 이용해 대충 토성만 쌓아도 방어가 되니 굳이 평지에 성곽을 짓지 않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권위를 나타내는 건축물을 만들지 않다 보니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창출될 가능성도 적었다. 높은 산이 많은 지리적 환경 때문에 한반도에 대형 제국이 형성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화가 나기도 하는 견해다. 역사를 재단하는 절대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지역이 더 우수했다거나 열등했다는 견해는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가장 자주 이용되기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 이 부분 역시 저자가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 왜곡이나 다름없는 논리를 용납하기는 어렵다. 지역과 환경의 차이로 인해 건축 양식이나 재료가 달라졌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저자일 것이다. 건축물과 권력, 제국의 형성 사이에는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국이 없는 이유로 높은 산이 많은 지리적 환경을 꼽은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 역사 속에도 제국이라 존재할 만한 중앙집권적 국가는 무수히 등장했다. 제정일치 사회였음이 밝혀진 방대한 영역을 지닌 고대국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와 백제 역시 제국이라 할만한 발자취를 남긴 바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지구라트,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건축물이 지니는 위용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산성이 '대충 쌓은 토성'의 의미에 그치는 것은 아니며,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창출될 가능성이 적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봤던 서양과 달리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추구했던 차이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263페이지 
3차선 이하의 도로가 블록 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3차선 도로는 무단 횡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단 횡단이 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길 건너편을 그냥 건너갈 만큼 가깝게 느낀다는 것을 뜻한다. 교통법규상으로는 문제가 되지만 보행자 중심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단 횡단이 가능한 폭의 길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보행 친화적 도시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 책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의 문제 대부분은 저자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하는 의도로 썼는지는 알만 한 내용들이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 주장과 근거가 과연 적절하고 옳은가 하는 의문이 생겼기에 스스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되묻고 있는 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무단횡단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종종 무단횡단을 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무단횡단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통법규상 문제가 돼'기 때문이 아니다.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가해자로 만드는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보행자 중심의 도시'가 만들어졌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그 전제가 무단횡단이 가능한 구조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모든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언제든 사람이 무단횡단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게 되는 세상이 열린다면 그때는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의향이 있기는 하다. '심리적으로 길 건너편을 가깝게 느'끼는 것도 좋고, '보행 친화적 도시'도 좋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단횡단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84~5페이지 
강북과 강남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서뿐 아니라 강북의 서울숲과 강남의 로데오 거리를 연결하는 보행자 다리가 건설된다면 양쪽에 다 좋은 커다란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런던시는 새 천년을 구상하면서 구도심에 있는 성바울 성당과 새로운 문화 지구로 떠오르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연결하는 보행자 다리를 건설했다. 이 다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지구를 보행자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게 하면서 이 지역 일대를 런던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만들었다. 한강은 템즈강보다 폭이 넓기 때문에 다리 길이도 꽤 길 테니 중간중간 쉴 수 있는 공간과 이벤트를 반들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리를 건너 다다른 목적지에 전시나 공연 또는 자연 등 매력적인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밀레니엄 다리를 건너면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을 적은 이유는 앞서 저자가 비판한 프로젝트 때문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도 해외의 성공 사례를 보고 배우고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세계 첫 시도를 해볼 수 있음에도 여전히 따라 하기만 한다며 비판한다. 그 예로 든 프로젝트가 ‘서울로 7017’과 ‘을지로 세종로 지하공원’이다. 그런데 몇 페이지 뒤에서 저자가 지적한 성공 사례를 보고 배워 따라 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건 자기모순처럼 보인다. 저자의 지적처럼 한강에는 보행자를 위한 다리가 없는 게 사실이다. 저자가 말한 '한강르네상스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세상에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왜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는지 알만 하다.


360페이지 
19세기 조선 한양의 사진을 보면 아직까지도 단층 건물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도시가 아직 고밀화되지 못한 상태였고 상인을 중심으로 한 신흥 계급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농민 중심으로 진행된 1894년 '동학혁명'은 실패한다. 하지만 1970년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우리도 보일러 덕분에 12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었고 1980년대에는 많은 국민이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고밀화된 도시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1987년 6월 항쟁은 성공한다. 이런 내용의 사회학 논물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건축적으로 유추해보면 도시 고밀화와 사회 진화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도시의 고밀화는 신흥 계급을 만들고 사회의 민주화와 진화를 이루어 낸다.

앞서 우리에게 제국이 없는 이유에 이어 몹시 실망한 대목이다. 이 부분 역시 저자의 의도, 메시지는 알 수 있다. 주장하는 바가 있고, 그 주장을 지지하기 위한 근거로 '동학혁명'과 '고밀화된 도시'와 '1987년 6월 항쟁'을 가져온 거다. 하지만 이 논리의 전개는 말도 안 되는 억지다. 일단 동학혁명이 실패한 원인이 '농민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라는 것부터 터무니없다. 내부와 외부에 적을 맞아 중과부적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성공을 아무리 건축적으로 유추한다고 해도 고밀화된 도시가 결정적인 기여라고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혁명 속에 피 흘리는 건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다.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가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도시의 고밀화와 신흥 계급의 출현이 사회 민주화와 진화를 이루었다는 논리의 전개는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으로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는 용납했으나 '민주화와 진화를 이루어 낸다'는 결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361페이지 
건축적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이유는 우리나라의 '온돌' 난방 시스템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도시의 고밀화는 신흥 계급을 만들고 근대화로 이어진다. 온돌을 사용한 우리나라는 단층짜리 주거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고밀화 도시를 만들 수 없었다. 아마 일본도 우리의 온돌 시스템을 수입하였을 테지만 잦은 지진으로 구들장이 내려앉아서 무거운 온돌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가벼운 다다미방에 '화로'를 놓는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덕분에 일본인들은 우리보다 수백 년 앞서서 2층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몇 백 년 전에 지어진 교토의 주거에 이미 2층짜리 주거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지막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저자의 생각, 주장, 추측과 그 생각, 주장, 추측을 지지하기 위한 또 다른 생각, 주장, 추측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의 연구에 의하면 이라거나, 다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라거나, 무엇을 보면이라는 식의 독자 누구든 본문을 읽어 보기만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반대로 논리적 비약은 무수히 발견된다. 이 부분 역시 다르지 않다. 일본이 먼저 근대화를 한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에 수백 년이나 앞서 2층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는 증거는 대지 않았다. 조금만 검색을 해봐도 알게 되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에 이미 중층 건물이 흔했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온돌을 쓰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클 거라고 한다. 오히려 조선 시대에 들어 다층 건물이 줄어들고 단층 건물이 늘었다고 하니 저자의 말은 반만 맞은 셈이다.


비판적 읽기를 마치며, 4시간에 걸쳐 적은 이 생각들이 비틀리고 잘못되었을 수 있음을 생각한다. 누군가 읽고 바로 잡아준다면 말하지 않고, 쓰지 않아 바로 잡을 기회를 잃는 것보다는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후회는 없다. 비판하려는 자는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하는데, 비판하고 싶을 때는 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검열이 비판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어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경우를 여러 번 당해봤기 때문이다. 비판은 오히려 반가운 일이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배운 것이 있다. 주장이나 이론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는 때에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거다. 사실 나는 누구의 말을 인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권위를 가진 사람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조사와 연구는 다른 문제라는 걸 알았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논리적 증명과 설득이 필요한 문제에서는 그 근거와 출처가 확실히 제시될 때 설득력을 지닌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는 그러한 출처와 근거가 거의 없다. 저자의 고민과 주장은 있지만 주장을 받칠 기둥이 허술한 셈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건물을 지을 때 토대와 기둥만큼 중요한 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종의 사상누각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만약 저자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면 저자를 지금보다 더 오해했을 것이다. 저자의 솔직함, 유머 코드를 몰랐다면 더 격한 비판, 비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을 거라는 이야기다. 나는 건축을 잘 모른다. 그러나 건축을 알고 모르고가 결정적이었다면 그 책은 인문학 책이라는 이름을 떼고 팔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비판할 수 있는 여지, 기회를 만들어 주는 책과의 만남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제법 오랜 시간 정체된 시간을 보냈던 나를 깨우는 하나의 계기로 작동한다.


 저자는 '세상을 더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 건축을 한다'라고 한다. 그 목표를 꼭 이루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다툼이 없다고 화목한 게 아니다. 모든 것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을 피해가거나 유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다투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갈라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화목에 닿을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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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2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2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물방울 2018-09-19 14:28   좋아요 1 | URL
다시 읽어봐도 syo님 댓글은 흥미롭네요. :)
이건 농담 반 섞은 진담인데 겸손이 지나치면 무례가 된다고 하더라고요(저도 들은 말입니다만). 잘은 모르지만 단순한 열정과 치밀한 두뇌 모두를 소유하신 분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아침 저녁 일교차가 제법이네요. 건강히 즐거운 독서 이어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