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몰라도 저는 글을 고쳐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글을 쓰는 방법이란 게 이런 식이죠.
"자, 써볼까?"로 시작합니다.
"끝, 다 썼다."로 끝납니다.
개요도, 퇴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휘갈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제 문제를 찾아봅시다.
네. 줌파 라히리가 밝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제 쓰기 과정에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글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하고 다만 배설하듯 쏟아내기만 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건 '쏟아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뒤처리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책을 읽고 정리를 해나가다 보면 생각이 전복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5년 전까지는 이지성 작가의 글 어디가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4년 전까지, '아프니까 청춘'인 줄 알았습니다. 그즈음에도 연금술사의 '우주가 도와주는 기적'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2년 전까지 김훈 작가의 글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요?
전부 뒤집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어제 한 말, 쓴 글을 '오늘의 나'가 부정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계기'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형성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글을 휘갈겨놓고 수습하지 않았던 데에는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어제의 '불완전한 나'가 쓴 글을 굳이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불완전했던 모습을 증거로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 어떻게 고쳐 쓰면 좋은지 모른다는 대안의 부재가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가 되겠군요.
그렇게 5년 혹은 6년을 써오는 사이에 어쩌면 오만해졌던 거라는 생각이 부끄러움을 더 키웠습니다. 오만할 수 없는, 오만해서는 안 되는 존재의 오만만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또 있을까요.
그래서였습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습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퓰리처 상 수상자 줌파 라히리가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에 도전한 기록이자 도전의 결실입니다. 줌파 라히리는 벵골 출신 이민자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며 벵골어에도 영어에도 애착을 갖지 못한 채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마음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이탈리아어에 매료되면서 처음으로 '주어진 언어'가 아닌 '갈망하는 언어'를 갖게 된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에 그야말로 '몰두'합니다. 마침내는 로마에서 살면서 이탈리아어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죠.
이런 질문을 아주 여러 번 받았다고 합니다.
"퓰리처 상 수상자, 영어 사용자의 최대 영광을 차지한 실력자가 왜 낯설고 생소한 언어에 도전하는가?"
명시적인 답이 없었던 건지, 가볍게 읽은 탓인지 정확한 대답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얻고자 했던 건지는 알만 합니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통해 줌파 라히리를 얻고자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자신 있게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 서툴고 더디며, 기교도 수식도 없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진실된 자기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죠.
줌파 라히리는 분명 이탈리아어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고 느꼈을 겁니다. 처음으로 '나'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겠죠.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건너기'로 시작합니다.
하나의, 제법 큰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 한쪽에서 다른 쪽을 수영으로 충분히 가로지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늘 호수의 얕은 부분에서만 헤엄칩니다. 언제든 헤엄치기를 멈출 수 있는 안전한 곳에서요. 어느 날에 이 사람은 한계를 느낍니다. 더는 얕은 데서만 헤엄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마음을 먹고 이쪽 편에서 저쪽으로 헤엄쳐 나가기 시작합니다. 150번쯤 팔을 저었을 때 호수의 가장 깊은 중심을 지나고 또 그만큼 팔을 저었을 때는 반대쪽에 닿습니다. 너무 쉽게, 간단히 호수를 가로지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좀 자신이 생깁니다. 다시 한번, 이 사람은 호수를 가로질러 저쪽 편에서 이쪽 편으로 헤엄쳐 옵니다. 이쪽이었던 건 저쪽이 되고, 저쪽이었던 건 이쪽이 됩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모든 게 달라졌음을 이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줌파 라히리는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어와의 거리를 좁혀나가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낍니다.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