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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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했다는 말이죠.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시장'의 작용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애덤 스미스의 식탁에 매끼 식사를 차려 올리는 '어머니의 손' 말입니다.


 20년쯤 전 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한 여성이 이혼을 하면서 재산 분할에 대한 권리를 청구했는데, 재판에서 '가사노동'의 가치를 고려한 위자료도 함께 청구했던 거죠. 그런데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재산을 분할할게 아니라 전부 줘야 할 정도였죠. 재판 결과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가사노동'이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죠.


 언제부터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주도하는 개념을 차지하고 있는 경제학만을 보고 배워왔습니다. 경제는 활성화시켜야 하고, 경쟁은 자유로워야 하며, 그를 위해 끊임없이 능력을 계발해야 하고,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말이죠.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 참여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겨왔습니다. 가부장적인 인식도 있었고,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너무 많아 보였으니까요. 같은 교육을 받고, 오히려 더 나은 성적을 내도 직장에서는 더 낮은 급여를 받고, 승진의 기회도 적다는 이야기도 그런 생각을 부추겼습니다.


 솔직히 그런 인식과 차별의 문제들,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들을 단순히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역시 다르다며, 당당한 커리어 우먼들을 내세운 외국 사회를 마냥 아름답다고 믿었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차별들과 불평등하고 부당한 대우는 단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있는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였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는 이런 문제들을 페미니즘 경제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어 선후 관계를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통해서 말이죠.  

 이 '주제'는 앞에서 이야기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의 식탁에 식사를 차려 올리는 '어머니의 손'을 말한 겁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느 집에서나 '여성', 엄마, 할머니, 아내, 심지어는 딸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을 겁니다. 말이 집안일이지, 사실은 이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고, 많은 수고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요리, 청소에서부터 온갖 잡다한 일까지 더하면 하루가 모자라다고도 하죠.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일'을 경제학에서는 '생산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해 왔습니다. 동시에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여성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가치 없는 존재' 혹은 '무능한 존재'로 치부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가정은 물론 사회,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는 누군가는 집안일을 해야만 합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사냥과 채집이라는 활동이 주된 경제활동이었기에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식의 책임 분담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때와 전혀 다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명백히 다르죠. 하지만 경제학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믿는 듯 보인다는 겁니다.


 경제학은 여성의 기여와 가치를 배제했을 뿐 아니라 '경제의 원리'라는 것도 왜곡시켜왔습니다. 경제의 시작은 '경쟁'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무한 경쟁'이라는 말이 귀에 익숙할 겁니다. 경제학은 모든 걸 '이윤 추구'로 수렴시켜버립니다. 경제를 예측하는 사람들, 계획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모델은 이상적인 '경제적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들 경제적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언제나 최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사랑이나 인정, 외로움과 같은 건 느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경제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느낀 적이 있으실 겁니다.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경제적 인간'과 실제적 인간은 너무 다르니까요. 실제적 인간은 잠을 자야 하고, 외로움과 동정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고, 때로는 합리적이지 않은(사실은 거의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존재입니다. 전혀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 같은 정책이 실행되다 보니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경제적 인간' 존재의 비인간성만이 문제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존재의 성별은 '당연히 남성'이며, 남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인식도 함께 있다는 겁니다. 영어에서의 자연(MOTHER NATURE)이라는 표현도, 여성이 상징하는 게 '자연'이라는 인식에서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연은 정복되어야 하고, 수동적이며, 무력하고, 의사를 표현하지도 못한다는 부정적인 면에서 말이죠. 


 그는 그가 제거해 버리고자 하는 현실에 반응해 출현한 존재다. 육체, 감정, 의존성, 불안감, 취약성 말이다. 그것은 수천 년간 사회에서 여성들의 자리라고 말해왔던 특징이기도 하다. 경제적 인간은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것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도피하고, 고뇌한다. 그리고 우리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그의 두려움에 공감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경제적 인간에게 매혹되는 것이다. 
경제적 이론은 도피처가 되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中

 남성들이 만든 이론에, 남성이 중심이 된 경제학과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경제 구조. 잘못된 구조가 먼저인지, 잘못된 인식이 먼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잘못이 잘못이 아닌 것처럼, 오히려 정상적인 것처럼 믿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차별이라는 생각을 못하거나, 차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문제없다며 무시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겁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 다루는 문제점들은 처음 제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지만 해결되지 않고 미뤄져 온 문제입니다. 

 여성 차별, 여성 혐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모든 순간에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조금의 차별도 없이 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표현하는 언어가 그렇게 되어있고, 사회 구조가 그러하며, 집안에서도 명백하니까요. 


 얼마 전 정부에서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악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더 최근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방해, 차단하기 위해서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문건을 작성한 정책 연구원도 있다고 합니다. 나아져야 할 것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조차 나아지게 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수 있는지.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은 경제학의 이론과 적용, 사회 현상들을 두루 돌아보며 곳곳에 숨어있는 '차별'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사실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았던 것들,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전혀 가치 없는 게 아니라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도 제기합니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가정'은 휴식과 재생산의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 돌아와도 휴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생산은커녕, 재 소모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여성'입니다. 누가, 어떤 권리로 여성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의미 없는 일'과 여성을 등식에 넣을 수 있는 걸까요. 


 경제학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명확합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문제들 가운데 애써 무시하고 못 본 척 해왔던 여성 문제를 포함시키는 겁니다.

가정에서의 활동(남성이 하든 여성이 하든)도 경제에 포함시키는 겁니다. 왜 집안일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겼을 때만 경제활동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과 함께 구조도 변해야만 합니다.


 어머니가 없이 태어난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자가 낳은 이는 나를 해칠 수 없다"라며 자만했던 맥베스를 죽인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자에게도 어머니는 있었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저자 카트리네 마르살도 이야기하는 바지만 인간은 연약하게 태어납니다. 보호와 양육이 꼭 필요한 존재로 말이죠. 그 기간이 없다면 인간도, 인간의 사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그러한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해왔습니다. 그렇기에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다치에의 말이자,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태생을 생각한다면, 삶의 시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페미니스트여야 합니다. 아니었다면 되기 위해 애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우리는 평등합니다. 그에 대한 대우 역시 동일해야 합니다. 


 경제는 무한경쟁으로만 돌아가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쟁으로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동정과 이타심, 희생정신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경제는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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