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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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세 편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확히는 두 편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한 편의 안티고네 이야기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세 편의 이야기의 제목이자 실린 순서대로 써 본 것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이 죽고 난 후, 그의 딸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성으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다. 대략 상황을 적어보면 이렇다.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광야로 떠돌아 다니다 콜로노스에서 숨진다. 그 직전에 그의 두 아들 가운데 장자인 폴뤼네이케스가 자신의 동생이 자신을 몰아냈다며 아버지를 찾아온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폴뤼네이케스를 냉정하게 내쳤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더해 돌려보낸다. 그 저주란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저주대로 두 아들은 서로 다투다 서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문제는 왕이 된 크레온이 동생인 에테오클레스는 장례를 치러준 반면 폴뤼네이케스는 들짐승에게 뜯어 먹히도록 시체를 방치하도록 명령했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 시신을 장례 지내지도 묻지도 못하게 한데서 생겨났다. 여동생 안티고네는 오빠인 폴뤼네이케스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결국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오빠의 장례를 치르다 파수꾼에게 붙잡혀 동굴에 갇혀 죽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비극이다. 소포클레스는 셰익스피어만큼 혹은 셰익스피어보다 먼저 비극을 쓴 것으로 따지면 셰익스피어보다 더 단호하게 비극을 완성해버린다. 주요 등장 인물이 모두 죽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신의 의지'가 개입해서 그들을 죽이거나 살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신 앞에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하며 무력했다. 그 무력함이 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일 것 같은 <안티고네>는 이렇게 거의 모두가 죽는 것으로 끝난다.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의 시작인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테바이를 구해낸 영웅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을 섞어 자식까지 낳은 패륜아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란 잘 알려진 것으로 "아침에는 네 발로 다니고, 점심에는 두 발로 다니며, 저녁에는 세 발로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정답이 '인간'인 그 수수께끼다.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나라에 '오염'이 생겨나 희생자가 늘어가고 피해가 커지자 이 오염을 없애기 위해 원인을 캐 나가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 밝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이 한 실수를 알아챈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결로 생을 마친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머리장식으로 눈을 멀게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추방할 것을 크레온에게 부탁하지만 그 결말은 보여주지 않고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지막 이야기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세상을 떠돌아 다니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복수의 여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다. 오랜 방황으로 저주가 풀린 것인지 오이디푸스의 안식이 가까워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테나이의 왕인 테세우스에게 나라의 번영을 약속하며 그 땅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테세우스 외에는 누구도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이디푸스의 축복의 조건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는 <안티고네>에서 알 수 있다. 


 세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적는데 너무 많은 지면을 써버렸다. 그래도 하려던 말은 적어야겠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에게 어떤 악감정을 가졌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성적 욕구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누명이다. 이 책 속의 세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오이디푸스는 모든 행위를 자신의 의지로 행했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신의 의지'가 개입해 있었다. 

 처음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이디푸스를 버리게 만든 것도 '신탁'이었다. 버림받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고향인 줄도 모르고 고향으로 향하게 된 계기도 역시 '신탁'이었다. 이 신탁의 내용은 '오이디푸스가 자라면 그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일 것이며,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그 신탁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모두가 그 신탁을 피했다고 믿었던 생각을 비웃듯이 완전하게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과격하게 굴었던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오이디푸스도 언급하듯이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를 향해 "당신이 내 아버지입니까?"하고 묻지는 않는다.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니란 말이다. "아임 유어 파더"같은 식의 대사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대사인 거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죽이고,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것도 전적으로 왕이 되려는 속셈에서라고 볼 수 없다. 이제 막 나라의 관문을 지나려는 자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면 스핑크스가 자살할지 어떨지 어떻게 알았겠으며 그 나라의 왕비가 왕을 잃고 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계산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신들이 꾸민 음모였다는 것 말고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런 선량한 오이디푸스를 어머니를 범하려는 욕망의 이름으로 삼아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한다. 


 오이디푸스는 비겁한 자가 아니다. 몰상식하지도 않다. 오히려 지극히 선량하며 공정한 인간이다. 그런 공정한 인간이 신이 보기에는 좋은 놀잇감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축복해줄 테니 실컷 골탕 먹어봐." 하는 식인 것도 같다.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성경 속 인물인 '욥'과도 닮아 있다. 

악마의 손에 넘겨져 온갖 시험을 겪는 동안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잃어갔던 욥은 결국 신을 원망하기에 이르렀을 거였다. 물론, 성경 속에서는 악마의 시험을 이겨내고 새로이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얻게 된다. 그러나 재산과 달리 가족은 '보상'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은 무시되었다. 그들이 천국에 갔을 거라고? 천국에서의 삶은 천국에서의 삶이고 지상에서의 삶은 지상에서의 삶이다. 둘은 하나라고 하지만 하나가 아니다. 하나를 빼앗으면서 다른 것을 주겠다고 하다니, 갓난아기도 그런 행위의 부당함을 알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던가.


 오이디푸스 왕은 마지막 순간에 마치 수호신처럼 위상이 회복되지만 자식들조차 그의 임종을 볼 수 없게 된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이 삶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장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저주받아 태어나 축복받은 죽음에 이른다는 게 가능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내게는 그러지 말아주기를 꼭 부탁하고 싶어 진다. 


오이디푸스, 이 가련한 사람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꼬리표를 달아 두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라도 그의 이름에서 콤플렉스를 떼어내 주고 싶다. 


 

 선량한 오이디푸스여, 편안히 잠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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