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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ㅣ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줄평
"내게 있어 사물은 아무래도 좋은 것을 의미했기에 이 이야기 역시 아무래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서야 오래 전부터 욕심내왔던 작품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한 기분이다. 그 시작이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라는 것에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은' 사물 가운데 하나였던 책이 삶으로 뛰어들어온 다음 순간부터 '중요한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사물들> 역시 어떤 신호, 계기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은가? 그런데 생각해보자.
스스로 의미를 두지 않고는 세상 무엇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니던가?
<사물들>을 읽다보면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사물들인지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두 사람, 제롬과 실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둘은 존재도, 시간도 모호하게 그려진다. 오히려 그 둘을 규정하고, 증언하고, 보여주고, 존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들을 둘러싼 '사물들'이다.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부제는 '사물의 증언'쯤으로 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소설 속에서 열거되는 사물들은 거의 모두가 흔하디 흔한, 어디에나 있을 법한, 누구나 갖고 있을, 요즘같은 시대라면 한 번쯤은 봤을 그런 것들이다. 한마디로 시시껄렁한 잡동사니처럼 보인다는 거다. 그런데 이 잡동사니들이 누구의 것인가하면 이야기의 두 주연, 제롬과 실비의 것이다. 그들의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것이기를 바라거나, 그들의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찬가지로 시시껄렁한 잡동사니들이다. 명화와 같은 예술품과 영화같은 것도 등장하지 않느냐며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술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다른 시시껄렁한 잡동사니와 다를 바 없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라는 이야기다.
제롬과 실비는 꿈꾼다. 누구나 흔히 꿈꿀만한 밝고, 희망찬 미래와 충분한 부를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가장 큰 이유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하는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냉담한 화자의 서술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공감 때문이다. 마치 사람의 인생 역시 사물들의 생애처럼 타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무관심하지만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그러한 묘한 인상이 뇌리에 새겨지듯 남는다.
사람과 사람간의 갈등, 그것이 감정적이든 물리적이든 모든 인간 사이의 갈등은 읽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 갈등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피로도 커진다. 하지만 그 모든 갈등을 사물들을 통해 그려낸다면 어떨까?
예를들면 이런 장면을 살펴보자.
하루는 제롬과 실비가 심하게 다툰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기의 저녁을 만들어 식탁에 앉는다. 서로 말을 걸지도 않고 쳐다보는 일도 없이 자신이 만든 저녁을 먹고는 누구는 침대로, 누구는 소파로 가서 잔다. 그러다 며칠 후 그들은 다시 늘 가던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는다.
같은 집에서 살면서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도 서로 각자의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는 건 무척 어색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좁은 집에서 산다. 그리고 풍족하지도 부유하지도 않기에 늘 외식(단순히 끼니를 의미하는 외식이 아니다)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마주 앉기는 하지만 서로 화가 난 상태이기에 말하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좁은 집에서 살기에 멀리 떨어질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고, 다른 누구는 거실의 소파에 눕는 것으로 서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서로 밥을 함께 먹는 것으로 화해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환경, 사물들의 증언을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이나 관계를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심지어 두 사람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까지 사물들은 증언한다.
괜히 '사물들의 증언'이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현재의 나를 '증언하고 있는' 사물들을 살펴봤다.
가구 하나 없는 좁은 방, 그 방의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낯익은 책들, 낯선 책들.
대충 저녁을 때웠음을 티내는 개수대의 설거지거리들과 걸어두지도 개어두지도 않은 옷가지들. 장식품은 커녕 흔한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멀건 벽과 창문에 붙어있는 네 장의 영화 포스터.
세탁 바구니에 대충 던져넣어 둔 빨랫감들과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현관의 운동화들.
사물들이 나와 나의 생활을 증언하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쯤 이르렀을 때 알게 된 것이 있다. 사물들은 결코, '아무래도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누가 어떻게 읽었든 솔직히 이 소설 속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다. '가정'은 희망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애쓰지 않았던 시기의 두 사람을 둘러싼 사물들의 증언은 언제나 현재와 다를 것 없는 고만고만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탈출하듯 떠나며 품었던 희망도, 돌아오며 그렸던 이상도 두 사람을 과거와 분리시키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을 증언하는 사물들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분리 불가능함의 증거다.
우리 삶에는 '무엇무엇일 수도 있다'거나 '이렇게저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식의 가정이 없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증언하는 사물들도 변하지 않는다. 사물에게는 스스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이 변해야 사물도, 사물들의 증언도 변하는 거다.
엉뚱해 보일 수 있지만 <사물들>은 변화를 증언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변하려는 자발적인 의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변덕이나 탈출을 통해 일시적으로 환경을 형성하는 사물들을 변화시킬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물들을 움직이는 주체인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과거와 다를 것 없는 삶으로, 어쩌면 그보다 더 혹독한 삶을 겪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물들은 수동성, 피동성, 불변성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마치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백설공주 속 마녀의 거울같다. 그 거울에 비친 사람의 현재를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 삶을 스스로 바꿔내야만 한다.(어, 이 표현.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전에는 기억력이 나쁜 것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머리도 나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낡아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