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에 숨어 있는 열두 동물 옛 그림에 숨어 있는 시리즈
이상권 지음 / 현암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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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세계는 오묘해서 모르고 보면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게 무척 많다. 서양화든 동양화든 어느 쪽이나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동양화 쪽이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한다. 이 느낌은 단순히 팔이 안으로 굽는 원리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달리 또 단순히 생각해보면 유일신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서양에 비해 신성을 부여할 여지나, 믿음을 담을 대상이 다양했던 동양 쪽이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게 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책 얘기를 좀 하자면, 이 책은 우리 옛 그림 속에 담긴 열두 동물, 즉 십이지신을 뜻하는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우리에게 친근한 동물들도 있고, 처음부터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동물이 있으며, 지금은 드물거나 사라진 동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마다 태어나는 해를 '띠'로 부여받기에 이 열두 동물들과도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니 자기 띠의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눈여겨 살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열두 동물 가운데 가장 애틋한 동물은 '소'다. 몇 년 간 소를 치며 든 정도 있고, 어린 시절 코뚜레를 한 암소를 끌고 이 논둑, 저 밭둑을 다니며 풀을 먹이거나 꼴을 벤다고 낫질하던 기억이 여전한 까닭이다. 미련하다고 욕도 많이 하지만 소만큼 순전한 짐승이 또 있을까. 짐승이라는 말이 소에게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어미 소를 끌고 가면 송아지는 멀지 않은데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면서도 졸졸 따라온다. 어미 소만 매어두면 멀리 도망가는 일도 없다. 어미와 자식 사이가 그렇게 돈독한 짐승이 또 어딨겠나 했다. 실컷 먹고난 후에는 느긋이 앉아 되새김질 할 때면 입가에 맺히는 흰 거품같은 침도 우습게만 보였지 더럽게 보이지는 않았었다. 가끔 나팔이라도 울리듯 긴 울음을 울기도 하는데 그게 또 듣기 싫지 않았다. 새끼가 팔려 떨어지고 나면 며칠을 목이 쉬도록 울고는 했다. 먹는 것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앉을 틈도 없이 송아지가 떠나간 방향 따라 서성거렸다. 모진 일을 저질렀다는 마음, 생이별 시킨 죄를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목이 쉬도록 울어서 소리가 나지 않을 때쯤 되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길게는 일주일, 짧아도 사나흘은 그렇게 먹지 않고, 울고, 서성거리는 것. 그게 소의 모정이었다. 그런 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순 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럼에도 소고기는 또 먹는다는 거다. 지금까지도 먹어왔고 앞으로도 먹을 것인데, 앞으로도 거기에 어떤 죄의식이나 미안함은 없을 거다. 소는 소고, 소고기는 소고기다라고 말하면 이상할까.


 



사진 속 소년처럼 소를 타고 물을 건넌 적은 없지만 소를 타본 일은 몇 번 있다. 황소의 등판은 넓어서 어른이 타기에도 충분하다. 다만,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밟히기라도 하면 운이 좋아도 뼈가 성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개와 고양이 그림은 어찌나 귀엽게 그려졌던지 꼭 살아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저자도 말하듯 그린 이들은 고양이나 강아지를 무척이나 사랑했을 거다. 그러지 않고는 저렇게 생동감 있게 그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이지신 그림 속 동물들에 대한 책인데 왜 고양이가 있느냐하면 우리나라의 십이지신에는 고양이가 없지만 어떤 나라의 십이지신에는 고양이가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쓰는 십이지신은 중국에서 만든 것이란다. 다른 나라에는 저마다의 십이지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는데, 어떤 나라에는 돼지 대신 코끼리가 들어간다고 한다. 십이지신을 살펴보면 그 나라의 생태까지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는 거다. 


 이 책은 단순히 그림 속 동물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 그려진 사물이나 식물들이 담고 있는 의미도 알려준다. 예를들어 신사임당이 그렸다는 초충도 속에는 수박이 나오는데, 이 수박의 씨와 넝쿨이 다산을 상징한다는 식이다. 

 어쩌면 웃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수박과 다산을 연결 지어둔 구절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 수박이 넝쿨이 너무 뻗어나가거나 열렸다고 그냥 다 크게 두면 채 익기 전에 넝쿨이 시들거나 열린 수박들을 다 키우지 못해 설 익거나 덜 자란 걸 먹게 되는데."하는 생각 말이다. 실제로 수박 농장에서는 한 넝쿨에 하나나 둘 정도 밖에 남기지 않고 나머지는 잘라버린다고 한다. 넝쿨도 너무 무성하지 않도록 억제하고 말이다. 


 22쪽

 호랑이 그림 옆에는 소나무가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호랑이가 나쁜 액운을 막아 주어 소나무처럼 오래오래 산다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야.

 


 호랑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나무도 의미가 있던 거란다. 그것도 호랑이가 액운을 쫓아 오래 산다는 의미라니,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참 심오하다. 


 39~40쪽

 "사람은 말이다, 너무 머리가 좋고, 욕심이 많아서 안 돼. 용은 염라대왕도 마음대로 못하는 엄청난 힘을 가졌는데, 욕심 많은 사람이 용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니?"

 


 다른 동물이나 생물은 용이 될 수 있지만 사람은 용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다. 사람이 욕심이 많고, 머리가 좋기에 용을 시켜주지 않는다는 거다. 하기는 정말 욕심 많은 사람이 용이 되어서 신통을 부려 세상을 어지럽히기가 쉽지 세상을 지키기는 어려울 거다.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는데, 동해 대왕암에 장사지냈다는 신라의 문무왕은 용이 되지 못한 것 아닐까? 음, 역시. 아무리 선하고 어진 임금이라 해도 한 나라의 임금이었다보니 자기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될텐데, 역시 그냥 전설이었겠다. 하기는 애초에 용 자체가 전설 상의 동물인데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하다.


 재미와 즐거움만큼이나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47쪽

 그 이야기는 고구려까지 널리 퍼진 모양이야. 고구려 고분에서도 『복희와 여와』가 발견되었거든. 그 그림에서는 남자인 복희가 해의 신으로 나오고, 여자인 여와가 달의 신으로 나와. 역시 반은 인간이고 반은 뱀이야. 

 


 왜 그런지 모르지만 고대의 유물 혹은 유적 속에서 중국과 공통된 것이 발견되거나 유사한 전설이 있을 때 보통은 그 전설이나 유물의 시작이 중국일 것이라고 여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시작해서 중국으로 갔다가 다시 역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야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다른 나라는 자기 것이 아닌 것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온갖 증거를 만들고 조작하는데, 우리는 있는 것조차 부정하고 외국의 말을 따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림 말고도 그림에 적힌 글을 풀어 설명해주는 부분도 있다.

  57쪽

 이 그림의 오른쪽에는 '물체를 잘 그리려면 남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살아 있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어.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관찰을 많이 해서 사실 그대로를 그려야 한다는 뜻이야.

 


 여기서 설명하는 그림은 말에 편자를 박기 위해 말의 사지를 포박해둔 그림이다. 그러니까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말을 잘 그리려면 말을 많이 관찰해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단순하게만 읽히는 글일까? 

 추측이지만 이 시기에는 막연하고 모호해서 그것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모르게 된 그림보다 대상의 특징이나 형상을 섬세하고 뚜렷이 묘사한 그림이 유행했을지도 모른다. 다르게 말하면 진짜와 비슷하게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문인화 풍의 사군자나 수묵화가 쇠하고 채색을 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진짜와 닮도록' 하기 위해 말이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의 그림을 흉내내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라는 거다. 이때도 유명한 화가가 있었을 거고 저마다 그 혹은 그의 화풍을 따라하려고 애쓰는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풍조에 일침을 가하는 한 마디가 아닐까 하는 거다. 

 흉내만 내서는 진짜를 그릴 수 없다. 네가 보고, 네가 느낀 것을 네 화풍으로 그려야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그릴 수 있다는 말, 아니었을까?


 이 책의 특징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딸아들이나, 손자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로 적었다는 거다. 활자도 크게 인쇄되었고 재밌는 그림이 많아 아이와 함께 읽기에 좋을 책이다. 어른이 읽지 못할 것도 없지만 아이와 함께 읽을 때 더 재밌게 읽힐 거라는 이야기다. 채색화는 서양이 압도적으로 발달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 옛그림도 그 은은함이나 깊은 색감이 결코 서양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다르지만 그것이 수준이 떨어진다거나 나쁜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일깨워준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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