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2
메리 셸리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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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긴 이야기도 아니고,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건만 다 읽는데 2주가 넘게 걸린 것 같다. 그나마 다 읽고나서 감상을 적으려고 생각하다보니, 이걸로 쓸까, 저걸로 쓸까, 중심으로 삼을 이야기를 정하는 것도 간단히 하지 못하고 있다. 

신에게만 허락됐다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이자, '존재'와 '인간의 의미', '이상과 목적의 추구와 방해와 장애물', 바이런 경의 '괴담 한 편씩 씁시다'에서 시작되었다는 계기.

어느 것으로 시작해도 몇 가지 생각쯤 늘어놓을만 한 그런 작품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오랜 시간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인 줄 알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 같은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이의 이름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영화 < 맨 >의 주인공 로건의 형 이름과도 같은데 뭔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프랑켄슈타인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야망도 있었다. 그 목적에 프랑켄슈타인은 이상을 품었다. 그리고 학문,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연구가 결실을 맺어 한 존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존재가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위치를 망각하고 그 존재의 추악함에 정신을 잃는다. 

아직 생명을 갖기 전에는 그저 단순히 추했던 것이, 생명을 갖게 되는 순간 추악하게 변한 이유는 뭐였을까?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쏟아부은 수고와 노력의 결과물이 그토록 추하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내면의 추함을 엿보았던 것은 아닐까.


버림받은 괴물은 아직 세상을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는 어떤 지적인 기반도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계절을 보내고 세상을 보면서, 비록 가축의 우리에 불과할지라도, 그 속에 숨어지내는 도망자나 다름 없는 존재일지라도 인간의 삶을 지켜보며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통해 의식을 갖춰가며 어쩌면 지극히 작고 소박할 지 모를 소망도 품는다. 하지만 그가 이후 그의 삶을 결정지을지 모를 시도에 들어갔을 때 경험한 인간들의 행동은 그를 자신의 창조주에게 버림 받았던 충격 이후 다시 한 번 절망 속으로 이끌어 간다. 


최초이자 최후의 안식처라고 믿었던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가 부탁하고 설득을 시도하지만 결국 그 모든 시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복수와 증오 뿐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단정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행한 복수만을 보면 분명 추악한 괴물이었다. 외모와 함께 내면까지도 사악하고 이기적이기 그지 없는 그런 악마였다.


우연인지 내일은 어버이 날이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이 날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복수하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또 한 사람의 소중한 존재를 앗아가려 하지 않았을까.


비록 그 추악함이 더 없이 지독할 정도였지만 그는 분명 프랑켄슈타인이 낳은 생명이자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켄슈타인은 명백한 부모가 된다. 하지만 그 부모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후에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갖게 되지만 아직은 여리고 연약했던(내면이든 외면이든) 존재를 혐오한 채 버리고 만다.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고 사랑을 주는 존재로 있었어야 할 존재와의 최초의 교감이 거절과 경멸, 혐오였다면 이제 무엇이 그 존재를 살게 하는 의지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종종 못된 장난을 한다.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거듭거듭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아이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럴거다'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아이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한 행동이 '부모의 관심을 끌기에 적절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함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아이는 이렇다.", "이럴 것이다.", "이래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단정짓고는 그 단정을 전제로 아이를 대한다.

아이가 진심을 전하려고 해도, "너는 어려서 잘 모르지만 그게 사실은 이런 거다"라며 가르치려고만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이의 마음을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이 아이의 마음이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셈이다. 

이러한 강요는 다르게 말하면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이의 마음에 더 없이 커다란 상처를 남기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존재가 '추악하고 사악하며 이기적이다'고 거듭 생각한다. 생각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전하고 다니며, 그 존재를 앞에 두고 몇 번이고 악마니 추악하니 하고 말해버린다. 

자신이 괴물이라고 보고 생각하고 있기에 실제로 그 존재가 받을지 모를 상처나 절망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더 억울할 것은 모든 불행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는 비난에 시달리는 것이다. 자신을 창조하고 버렸던 부모는 그 책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만 책임을 요구하는 창조주를 어떻게 생각했어야 했을까?

그래도 부모이기에, 창조해준 존재이기에 참고, 인내하며, 사랑받으려고 노력해야 했을까?

가슴에 불타는 증오와 미움을 숨기고, 거듭 돌아오는 증오 섞인 경멸의 말을 모두 참아 내야했을까? 그랬더라면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폭언과 멸시, 폭력 속에서 정말 한 순간이라도 평화로울 수 있었을까?


카프카는 <변신>에서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는 기둥에서 일순간 벌레로 변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족들은 그의 존재를 부끄러워 한다. 아버지는 추악한 벌레를 향해 사과를 던져 깊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스스로 죽어주기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공공연히 요구하기도 한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에게 '죽음'을 요구하듯이 말이다.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는 마음대로 사라지기를 요구하는 것, 그것이 마치 창조주이자 부모의 권한인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일이 정말 정당한 것일까? 부모에게 반항하는 자식, 창조주를 거스르는 피조물은 추악하고 이기적인 악마인 것일까?


내일은 어버이 날이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다투고 미워하며, 서로에게 상처주는 말을 거듭해서 주고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다른 존재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더 좋지 않은 건 그러한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그것이 옳지 않다면 그 판단이 옳도록 상대를 도발하고, 유도하기도 한다는 거다. 결국 착한 마음, 선한 의도까지도 악의가 되어버리는 일조차 종종 일어난다. 이것은 처음부터 '당연히 일어날' 결과였을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결말이었을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결과만을 두고 합리화 시킨 억지일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통해서는 빙산의 일각, 그 10% 밖에 알 수 없다. 나머지 90%는 마음을 기울여 들여다 봐야만 알게 되는 거다.

하지만 사람들은 빙하를 두고 이렇게 생각해 버린다.

"나의 갈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

"평화로운 항해를 파괴할 위험."

"목적의 달성을 가로막는 방해."

하지만 사실은 빙하는 그저 바다의 흐름, 조류를 따라 흘러다니는 구름 같은 것일 뿐이다. 그 감정과 인식의 조류를 좌우하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 그가 대하는 상대방이다. 괴물에게는 프랑켄슈타인이었고, 잠자에게는 가족이었으며,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타인들이다. 


<프랑켄슈타인>을 읽는 동안 생각한 것은 이런 거였다. 

이런 추악한 외면을 가진 존재를 만났을 때, 내 마음에도 분명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과 함께 미움과 증오가 일어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염려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가 그렇게 비추고 있을텐데,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궁리였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걸 안다.

결국 나는 나다운 나로 계속 나아가고 살아가야만 한다. 

나를 미워하는 이를 미워할 필요도 없다. 나를 증오하는 이에게 증오로 맞설 필요도 없다.

사악하다고 추악하다고 하는 비난이나 욕설에 일일이 마음쓰고 상처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망망대해에서 월튼은 평생을 찾아 헤맸던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를 만난다. 비록 그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짧았지만 그 경험은 강렬하게 그의 삶을 사로잡는다.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야만 깊은 감동을 주는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그의 마음이 보이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서로에게 들려주고 공유하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통해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소통이자 관계 속에서 행복을 얻는 비결이다.


아직 멀었지만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을 보며 내게 필요한 노력들을 생각했다. 

자꾸만 그 피조물을 두고 괴물이니 사악하니, 악마니 해서 미안한 마음도 든다. 

부모, 자신의 창조주에게조차 버림 받아 평생 이름을 얻지도 못한 채, 추악한 괴물로서 살다 비참하게 홀로 죽어갔을 그에게 애도를 보낸다. 

그의 이름은 하트, 사랑과 동정에 민감했던 심장을 가졌던 존재였던 만큼, 그렇게 불렀어도 좋지 않았을까.


학문과 과학에 대한 열정, 하트(사랑) 속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나자 마자 부서져버린 하트(사랑)으로 상처입은 채 영원히 회복되지 못했던 그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그에게 '하트'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하트 프랑켄슈타인' 지금은 평화 속에서 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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