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을유세계문학전집 67
메리 셸리 지음, 한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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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이 '괴물' 혹은 '악마'라 부르는 그의 발자취를 다시 따라가봤다.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어 한번 더 감상을 적어본다.

물론 새로 을유문화사의 번역본을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출판사가 다르다고 해서 감상이 달라진다거나 꼭 다시 새로 쓰고 싶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이 감상은 앞서 적은 문예출판사 감상과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버림 받은 이후 악의 화신이 되어 프랑켄슈타인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나간다. 그는 이것을 '정당한 복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프랑켄슈타인 역시 이 복수에 대한 복수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괴물을 쫓는다.


이 괴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래 인정 많고 착한 존재였어. 하지만 불행하기 때문에 악마가 되었지."_116쪽

이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는데 필요한 건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이야기를 한 번 더 읽어보는 것 뿐이었다.


괴물은 인간을 믿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만들어 준 프랑켄슈타인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의 추악한 모습에 떨다 도망쳐버린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괴물은 사라져 버린다.


두 번째는 괴물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그가 '보호자'라고 칭했던 사람들과 함께 지낸 오두막에서의 시간이다. 함께라고 말하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괴물은 눈이 먼 아버지와 불행하지만 힘써 일하는 펠릭스, 그리고 펠릭스의 누이 애거서의 세 가족을 보며 희망을 품는다. 언젠가는 그의 추악한 외모를 극복하고 그들의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그들을 위해 땔감을 구해다 주는 일을 거듭한다. 그는 자신의 '보호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지만 어느 날 눈이 먼 아버지를 통해 가까워지려던 그의 시도가 중간에 돌아온 펠릭스와 그의 아내 사피, 애거서와 마주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실패도 이렇게 처참할 수 없는 실패였다. 그는 추방당했고 오두막에 살던 가족은 떠났다. 괴물은 절망에 빠져서 오두막에 불을 지른 후 떠난다.


세 번째는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떠나서 제네바로 향하던 숲에서였다.

괴물은 물에 빠진 소녀를 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다해 구해낸다. 하지만 곧 소녀를 따라온 남자가 쏜 총에 맞고 사경을 헤메다 며칠만에 깨어난다. 결국 그는 "모든 즐거움은 비참한 내 신세를 모욕하는 비웃음 같았고, 내가 즐거움을 누리며 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었지."(_본문 164쪽)라고 말할만큼 슬픔 속에서 비참함으로 떨어져 내린다.


네 번째가 그의 첫번째 범죄인 윌리엄의 살해에 얽힌 이야기였다. 

그를 만든 창조자도, 그의 보호자였던 오두막의 가족도, 그가 구해준 소녀를 따라온 남자도, 모두 그를 혐오스러운 괴물로 여겨 미워했다. 하지만 한 번 더 희망을 품기를 "어린아이는 편견이 없고 얼마 살지 않았으니 추악한 외모에 대한 두려움도 모를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에게 붙잡히자 마자 소리를 지르며 욕하기 시작했고,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에 목을 졸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괴물이 첫 번째 살해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었다. 계절이 한 바퀴 넘어 돌만큼의 시간이 걸렸고, 네 번의 희망이 짓밟혔고 그 모든 시도가 상처가 되어 죽음보다 깊고 큰 아픔을 남겼다. 

동정하지 않을 수 없어지는 이유다.


괴물에 비해 오히려 인간은 시도함도, 인내심도 적다. 자신에게 나쁘게 굴었던 사람은 단 한 번의 용서도 없이 그들의 곤란이나 어려움을 모른체 하고 못 본 척하는 게 인간이다. 그에 비하면 추악한 이 괴물은 얼마나 선량한가?

그는 선량했지만, 불행이 악마로 만들었다는 고백이 눈물 가득한 비명처럼 들린다.


무책임이나 인간의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겉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시도하고 노력하는 자의 고난을 들여다봐야만 한다는 생각은 다시 읽어보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던 부분이다. 왜 처음에 읽을 때에는 괴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시도와 노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나 역시 괴물의 사악함과 복수를 부르는 복수에 눈이 멀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이나 아픔은 쉽게 느끼고 들여다보면서, 다른 이에게 그 아픔을 봐달라고, 이해해달라고, 치유해달라고 요구하기를 잘한다. 하지만 자신이 상처주고 아프게 하는 존재의 비명에는 귀를 막아둔 것처럼 외면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사이의 비극은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로 상처받고, 기대와 실망으로 '복수심'에 가까운 미움을 품으며, 그 복수의 총구를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돌리는 일은 또 얼마나 많던가.


우리는 다르기에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르기에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모두는 다르지만 닮아있다. 외모가 아니더라도 생각이 닮아있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상처나 아픔이 닮아 있으며, 그것마저 다르더라도 원하는 것은 닮아 있기 마련이다. 

다른 것이 보이겠지만 닮은 것도 찾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동류, 저마다 외로움 하나나 둘 씩은 품고 가끔은 눈물로 베개를 적시다 잠이드는 세상에 하나 뿐인 존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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