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 지도 - 2008~2014 변경을 사는 이 땅과 사람의 기록
이상엽 글.사진 / 현암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식적으로 변경은 국경 부근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지만, 밝혀 적으면 북한과 맞대고 있는 것은 국경선이 아니라 군사분계선이다. 그래서 국경선 부근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공간이나 다름없어졌다. 결국 지도상의 국경선은 변경이라고도 하기 힘든 멀고 먼,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는 그 존재조차 희미한, 낯선 공간이 되었다.

 

작가 이상엽은 상식적 변경에 하나의 변경을 더한다. 그 변경은 심상적 변경으로 우리의 관심에서 밀려난 일, 사람, 지역 등이 모두 심상적 변경에 속한다고 한다.

이 책 <변경 지도>는 상식적 변경과 심상적 변경을 모두 담고 있다. 북방 한계선, 민통선, 연평도, 4대강 공사 현상,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그리고 세월호 사건까지 모두 눈과 귀에 익숙하지만 내 일이 아니기에 잊고 지내고, 무관심해지고 말았던 지역과 사건들을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는 거다.

 

작가는 거듭해서 사진의 의미와 존재의의를 묻고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다. 그 고심과 노력이 세계를 떠돌게 한 원동력이었고, 남긴 것이 사진이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단순한 사진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기록물이고, 기억이며, 역사인 셈이다.

사진은 표리부동하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그 안의 의미를 저절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럼에도 작가는 사진 안에 조금이라도 분명한 것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을 그쳐서는 안 된다. 표리부동함에 머물지 않게 하는 것이 작가의 노력이다.

 

상식적 변경에 속하는 지리적 변경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변경 밖에서는 남의 일이나 다름이 없다.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익 논리에 따라 실행되고 중지되며, 변경되고, 움직인다. 하지만 자본주의 논리는 지리적 변경에서의 분쟁을 늘리고 키울 뿐 아니라, 심상적 변경도 늘려 버린다. 이익을 얻는 이가 있으면 이익을 얻지 못하는 이가 있고, 많은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적은 이익에 그쳐야 하는 이도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결국 소위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움직이기에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면 소수의 반대는 묵살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더 있다. 다수소수니 하는 것이 반대자나 찬성자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으며, ‘다수에 선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행하려는 일의 미래보다는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런 식으로 설득하는 거다.

그건 어차피 실행될 일이다. 100원이라도 받겠는가 아니면 받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설사 일이 잘못 되더라도 나는 이것 밖에 안 받았다며 발을 뺄 수도 있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될 때는 하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들이대는 이런 논리는 대개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은 일이 더 많다.

4대강 공사만 해도 그렇다. 그것을 꼭 해야 했을까? 우리의 환경과 자원이 우리 세대만의 것일까? 수천수만 년을 이어온 물길이 끊기고 강은 그 생명을 다해가고 있다. 정부는 이런 저런 성과들에 대한 발표를 하고 있지만 부작용에 대해서는 감추기 급급한 상태고 얼마의 돈이 어디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아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세월호와 용산 재개발 지역의 참사에서 발견할 수 있던 것은 정부의 무능과 언론의 간계와 무책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본주의 논리와 공공의 이익이 변호해주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들, 진상을 요구하는 자들에게는 이런저런 딱지들이 붙었고 번번이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희생자와 피해자에 대한 조롱이 유행하는 세상, 여기가 변경이 아니면 어디가 변경이란 말인가.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 백사장에 외로이 서 있는 왜가리의 처지를 이해해보자. 기계적 공리주의로 신자유주의를 찬양하고 개발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저 왜가리는 유령일 뿐이다. 생명이 생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다.”_82

 

생명을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생명이 이익으로 대체될 수 있는 논리, 보이지 않는 인간들의 생명과 작은 생물들의 생명이 돈 앞에 재가 되고, 흙이 되는 세상, 여기가 대한민국이다.

가만히 있으면 이등이라도 간다는 말은 가만히 있으면 손해가 없다는 말일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가만히 있다가는 이등으로 죽는다는 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될지는 운에 달려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뉴스를 통해, 신문을 통해, 누군가의 전언을 통해 들은 사고와 사건의 피해자 혹은 희생자가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 뇌리 속에는 늘 변경에 밀려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억울하다 말하는 희생자와 피해자들을 비난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말만 들으면 너는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

그런 약속은 위로는 될 수 있지만 믿음이 되기는 어렵다.

 

무력한 시대를 살고 있다.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기록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글 쓰는 사람은 글을 남겨야 한다.

이 기록과 기억이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지금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후에 지금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이 누군가가 기록한 사진이나 글이 될 수도 있다.

 

불의함과 부당함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불의함과 부당함을 인식조차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함께 하면 좋을지 몰라도 모두가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기억해야만 한다.

이 기록들이 그 기억을 증언할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