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아티스트 Attist X 클래식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최윤영 옮김 / 1984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장 여러 번 읽은 책.

가장 여러 권을 가지고 있는 책.

그 책이 바로 조지오웰의 <1984>다. 그냥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읽고, 권태처럼 읽기가 더뎌질 때 손이 가고, 실증난 듯 읽기가 버거워질 때면 <1984>를 읽게 된다.  거기다 이제는 쉬어가고 싶어질 때까지 손이 가니, 이건 뭐, 달리 할 말도 없다.

 

 이번에 읽은 건 1984 출판사에서 발간된 <1984>다.

출판사 이름이 1984인 걸 보면 이 출판사에서 <1984>를 출간하게 된 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정해져 있던 것 이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든다.

 

 많은 고전들이 그렇지만 <1984>는 어느 출판사에서 출간 되었든 읽을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편애 인지도 모르겠고, 다섯 번을 넘게 읽으면서부터 내용의 전개를 따라가기 보다 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에 집중하다보니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출판사의 것이든 <1984>만은 꼭 읽어보길 권할 수 밖에 없다.

 

 성질 급한 나는 이번에 새롭게 눈에 띈 걸 먼저 적을 수밖에 없다.

이 책 33쪽이다.

- 두 꼬마는 푸른색 바지와 회색 셔츠를 입고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스파이단'의 제복이었다.

 

이 부분에서의 두 꼬마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동'에서 일하는 '파슨스'의 두 아이다. 그런데 두 아이가 입은 옷의 색깔이 예사롭지 않다.

 모두 세 가지, 푸른색, 회색, 빨간색의 색깔들은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색깔이기도 하다. 이 색깔들은 사상을 상징하는 것임과 동시에 계급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푸른색은 윈스턴 스미스와 같은 '당원'의 복장 색깔이다. 또한 흔히 '블루칼라'라고 부르는 '노동자'들의 색깔이기도 하다.

회색은 이 작품 속의 '노동자'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그들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행동하기 전에는 아무런 힘이 없고, 힘을 갖기 전에는 행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무기력층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저 '거기 있을 뿐'인 '어떤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붉은색은 열렬한 당원을 뜻한다. 그들의 당의 사상과 이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그에 반하는 것은 행동에서 사고까지 철저하게 '통제'하고, 스스로 통제하고 통제 당하고 있음을 깨끗이 잊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곧 '당'이며 권력이고, 세계다.

 회색과 푸른색과 빨간색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없지만 경계가 없기에 넘어서는 것도, 넘어설 수 있는 것도 없다.

세계는 완전하고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조금의 혼란도 용납될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1984의 세계다.

 

 이런 생각이 든다.

두 꼬마 굳이 푸른색 '바지'를 입고, 회색 '셔츠'를 입고, 빨간 '머플러'를 입은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아마 조지 오웰은 이런 것을 의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기에 적어볼 뿐이다.

 

 우선 푸른색 바지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다리'처럼 당과 사회를 위해 열심히 끊임없이 일하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회색의 셔츠는 우리의 가슴을 감싸고 있다. 흔히 우리의 감정, 사상을 가슴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른 '헛된' 생각을 하지 말고 당과 사회에 충실하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빨간 머플러는 목에 두르는 것이다. 목은 몸과 머리를 이어주는 부분이다. 만약에라도 다리에서 가슴을 통해 솟아오를 지 모를 불순한 '사상'들은 이 빨간 머플러에서 차단되거나 세척되어 머리에 닿지 않게 된다. 완전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 빨간 머플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고, 아마 그렇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완벽한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당을 위해 끊임없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당의 위협이 될 어떤 사상도 가슴에 품지 않으며, 혹 그런 기미가 있더라도 스스로 통제함으로써 머리는 순수함을 지켜나갈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세 가지 색깔의 옷은 또 다른 것을 상징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완벽한' 존재다. 완벽해 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존재다. 완벽해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푸른색이 될 수도 있고, 회색이 될 수도 있으며, 빨간색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말살될 수 없는 필연적 가능성이고 그 가능성 가운데서 태어나는 것이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와 같은 인물이다.

 

 색깔 이야기는 간략하게 쓰려고 했던 건데, 쓰다보니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번엔 색깔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1984에서 말하는 '전쟁'의 필연적 필요와 '신어', 그리고 '최후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해보기로 한다.

이 세 가지는 하나로 귀결되지만 그 목적은 조금씩 다르다. 먼저 귀결점을 이야기하자면 세 가지는 '확고부동한 권력'을 위해 움직인다. 다만 '전쟁'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신어'는 점점 더 명료해 질 것이고, '최후의 인간'은 결국 사라질 것이란 것만 다를 뿐이다.

 

 골드스타인의 저작이라 일컬어지는 책에서 '전쟁'의 필요성이 언급된다.

242쪽.

- 문제는 세계의 부를 실제적으로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업을 발전시키느냐 하는 데 있었다. 재화는 생산되어야 하지만 분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는 전쟁뿐이다.

 

일단 전쟁의 표면적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업의 발전을 계속하면서 보편적 부를 증가시키지 않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방법을 통해 '전쟁 지속자'들이 원하는 것은 '확고부동한 권력'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이다. 보편화된 부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도록 방치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바로 전쟁인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은 평화'라는 강령이 태어난다.

 끊임없는 전쟁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평화를 강렬히 염원하고 또 의식한다.

 

 '신어'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어휘가 '줄어드는' 언어다. 모호한 표현을 삭제하고 불규칙적인 파생어와 합성어를 제거하는 것으로 인간의 사고를 축소하고,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면을 없애나간다.

 신어에는 '해석'의 여지도, '가능성'도 없다. 그저 그 '의미'가 존재할 뿐이다.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단순해진다.

 

 윈스턴 스미스는 '최후의 인간'이다. 달리 말하면 그 시대의 '최초의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감시당하고, 시험당하고, 박해당하지만 순교할 수는 없는 존재다. 순교하도록 용납하지 않는 것, 당에 반역하는 마음이 조금도 남지 않도록 하는 것, 빅 브러더(난 아무래도 '대형'이란 해석이 좋다)를 사랑하는 것이 이 '최후의 인간'에게 용납되는 단 하나의 결말이다.

 

 우스운 건, 이 결말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윈스턴 스미스 본인 조차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잡힐 것이고, 고문 당할 것이고, 배신할 것이고, 빅 브러더(대형,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그는 뒤에서 날아드는 총알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자유는 예속'이라는 강령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336쪽

- 개인은 오직 그가 개인임을 멈출 때만 권력을 갖게 되지. '자유는 예속'이라는 당의 슬로건을 알고 있지? 그것을 뒤집어 생각해본 적이 있나? 예속은 자유라고, 홀로 있는, 즉 '자유로운 인간'은 언제나 패배하지. 모든 인간은 죽게 마련이고, 죽음은 바로 가장 커다란 패배니까 말이야. 그러나 인간이 철저하고 완전하게 복종을 할 때, 그리하여 자신이 스스로 당이 될만큼 당의 일에 발 벗고 나선다면 그때는 불멸의 전능한 존재가 되는 거야.

 

 전적인 예속을 통해 인간은 완벽해 질 수 있고 영원히 패배하지 않는 '어떤 것', 예를들면 '당'과 같은 존재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다.

 

 전쟁, 무지, 예속은 완벽한 평화, 힘, 자유를 위해 절대적으로 달성되어야 할 목표다. 그렇기에 그것이 슬로건이 된 것이다.

영원을 위해 영원히 지속되고 추구될 목표인 것이다.

 

 나는 왜 <1984>에 매혹되는 걸까.

1984의 세계에 빠져드는 걸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경계하는 것일까?

 

 이번 감상의 결론을 내리긴 글러 버린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1984>의 예언이 현대의 세계에서 많은 부분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과 전쟁을 하고 있는 걸까? 무엇에 무지한 것일까? 우리는 자유로운 것일까?

 

 난 그저 바랄뿐이다.

내가 '최후의 인간'이 되지 않기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 속에서 윈스턴이 겪었던 '고통'을 겪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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