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1쪽의 내용 "30년 전에 자신이 발견한 정리는 기억해도, 엊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할 정도죠. 간단히 말해서, 뇌 속에 80분짜리 테이프가 딱 한 개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아, 80분짜리 테이프 이야기. 하는 혼잣말과 함께 몇년 전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와 얽힌 박사와 나와 루트의 이야기가.

 새삼스런 반가움과 함께 다시 읽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뛰어난 수학자였던 박사는 오래전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사고가 나던 해에서 기억이 멈춰버린 올해 예순 넷의 노인이다.

 뇌에 80분 짜리 테이프가 들어있다는 말이 일러주는 것처럼 80분간만 기억이 이어지며 80분을 넘어선 순간 사고 당시의 47세의 기억으로 리셋되고 마는 병을 앓고 있다.

 '루트'는 열 살 난 '나'의 아들이고(머리가  √¬ 처럼 평평해서 루트라고 박사가 이름지었다.)

 '나'는 스물여덟(열 여덟 살에 루트를 임신하고 루트가 열살이면 스물 아홉일까?), 직업 파출부인 이십대 후반의 미혼모다.

 

몇년 전에도 그랬겠지만 붙임성 좋고 영리하며 배려깊은 '루트'와 홀로 그런 아이를 키워낸 '나' 그리고 절망적인 단절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식지 않는 열정과 깊은 애정을 지닌 '박사'가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들이 그려가는 특별한 인연, 그 깊은 연대감은 인간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수의 역사만큼이나 깊었다.

 

뭐가 그렇게 특별하게 좋았나를 콕 짚어낼 수 없이 은은하고 눅눅한 종이 냄새가 날 것 같은 포근함이 좋았다.

 첫 인사 대신에 파출부의 신발 사이즈를 묻는 주인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전화번호에서 소수를 떠올리는 사람 그 사람이 박사이고, 그런 박사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일 없이 그가 사랑하는 수를 알아가는 일을 진정으로 즐기는 파출부를 난 상상해내지 못하겠다.

 이런 기발한 시작부터가 좋았다.

 

이렇게 수를 사랑하는 박사가 특히 좋아하는 수는 소수다.

 소수라는 것은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 떨어지는 숫자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에도 어떤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것 같다.

 자기 자신은 박사가 되고 1이 자신과 함께 '수'를 공유하는 존재라면 소수라는 묶음은 그들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수학이라는 우리 생활과 전혀 관계없어보이고 멀어보이는 학문이 어떤 이들에게는 관계의 전부가 될 수도 있고,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놀라운 '수'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박사의 첫인상에서 '나'가 발견한 숫자의 의미는 '상대방과 악수하기 위해 내미는 오른손,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코트와도 같다고 했다.

 그야말로 '수'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이고 보호막인 셈이다.

사고로 세상과 단절되고 기억에서도 단절을 경험하지만 여전히 '수'를 통해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박사의 영원한 연인 이야기라든가 소소한 일상은 아껴두기로 한다.

 

사람 냄새가 진하게 나는 책이다.

 그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고, 희망을 가졌고, 사랑을 가졌고, 열정을 가졌고, 배려를 알고, 미래를 믿는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진 그들이 가진 아름다운 것들을 나도 나누어 갖길 원한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 부유하고 풍부한 삶 만이 행복한 삶은 아니다.

박사의 행복이 계산의 어려움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했듯이 단순한 것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기쁨도 우리의 행복도 배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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