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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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다. 그것은 사기다. 위선이다. 기만이다. 사악한 말장난이다. 얼어죽을 쿨. 여자는 운전대에 이마를 짓찧으며 자책했다. 쿨이 모든 걸 망쳐놓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남자를 다시 붙들고 싶었다. 자존심 따위는 상관없었다. 애원하고 협박해서라도 남자의 마음만 되돌릴 수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단 한번의 기회도 주지 ㅇ낳았다. (내가 쓴 것 中)-175쪽

여자는 상처받지 않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갖지 못할 것은 포기할 줄 알아야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차례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해서는 안되었다. 미련이 많을수록 상처가 깊은 법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 될 일이었다. (백조의 호수 中)-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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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가는 초원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니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무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꽃 피우는 나무에게


이리저리 굽어 꺾였지만 천공(天空)을 향해 뻗어가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평범한 대기 속에 꽃을 나눠주고 있었다 꽃을 나눠주고 나눠주어도 꽃이 줄어들지 않는 꽃나무가 있었다 어두운 예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색채였다 간혹 나처럼 옹색한 사람에게는 제일 높은 곳의 꽃을 내려주었다 가도 가도 우러르면 꽃나무 아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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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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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봤으면 대답해주었겠지만, R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R은 그걸 섭섭하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마음과 마음 사이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몹시 어렵기만 하다. (-삼풍백화점)-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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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구판절판


우울증은 내 마음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난장판이며, 정신의 착오일 뿐이었다.-77쪽

오클랜드 도메인의 파라솔 모양 나무 밑에서였다. 정지된 여행의 일상 속에서 문득 우울증이 오고, 바로 그 '멈춤'이 우울증의 원인이었음을 알았을 때 깨달았을 것이다. 생이란 본디부터 그렇게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고 소란스럽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91쪽

타인의 성적 방종에 대해 유독 분노하는 사람은 성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겠지만 그의 내면에도 바람둥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수다스럽고 경솔한 사람을 경멸하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도, 거짓말하는 사람을 경원시하는 정직한 사람도, 저마다의 내면에는 바로 그들이 인정하지 못한채 타인에게 전가하는 바로 그 부정적인 측면이 억압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비난할 때 그 행위는 곧 자신에 대한 비난이 되는 셈이다.-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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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레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던가.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하게 되면, 그게 잘못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누군가 내게 비난을 하고 욕을 하고 훈계를 할 때, 그 앞에서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변명도 해보고, 핑계도 대보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스물 다섯살 때였나. 짝사랑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게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의 걷는 모습도, 냄새도, 농담까지도. 뭐 하나 맘에 들지 않는게 없었다. 그렇게 그를 혼자 좋아하고 있을 때, 후배가 내게 저 오빠 좋아해요, 라고 고백해왔다. 그러니 잘 되게 좀 도와달라는 식이었다. 아뿔싸, 나도 좋아하는데. 내가 그를 ‘먼저 알았고 먼저 좋아했’다는 것 쯤은 후배가 ‘먼저 고백’한데서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 나는 그 둘이 잘 되게 도와주려 애썼다. 사실 내 진실한 마음은 그 둘이 잘되는걸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명이 모여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을 때, 후배는 내게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고백을 할거라고. 나는 그를 불러내줬고, 계속 술을 마셨다. 다음날 후배에게 물어보니 그의 대답은 노, 였다고 한다. 그는 동갑의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후배는 내게 혹시 그게 언니 아니예요? 라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아닐거라고. 그러나 사실은 그러길 바랐다.

이 책 속의 선생님도 아가씨를 먼저 알았고, 먼저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뒤늦게 알게 된 친구가 ‘먼저 고백’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를 말린다. 아가씨를 좋아하지 말라고. 그리고 자신은 아가씨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는 자살한다. 유서에는 선생님을 원망하는 어떤 문장도 없다. 친구가 자살하기 전에도, 친구를 말렸던 자신이 아가씨에게 청혼했단 사실에 대해 내내 불편해했던 선생님은, 친구가 자살하자 그 마음속의 짐을 덜어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가씨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모든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친구의 애인을 뺏어놓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한 여자와 잘되기 위해 친구를 말린 누군가는 평생 편안한 마음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 말할걸. 그때 말했어야 했어. 내가 그러는게 아니었어.
그를 힘들게 하는건 타인의 비난이 아니었다. 원래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는게 아니라 상황이 되면 인간은 모두가 악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행동을 자신이 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기분. 그는 그런 마음상태로 도무지 세상에 나갈 수가 없다.

나도 몇번.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
타인의 어떤 행동들을 보고 경멸해놓고서는 내가 저지른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치를 떨기도 했다. 어떻게 내가 이래, 어떻게…
어쩌면 이 책속에서 선생님이 말했듯이, 그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같은 상황이어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와서 내가 저질렀던 잘못들을 후회해봐야 무얼할까. 다 부질없는 짓. 그저 나는 그 잘못들을 다시 또 반복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내 마음의 빚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늘 무겁다. 내 마음이 무거운 건 다른 누군가의 탓이 아니다. 그저 내가 스스로 알아서 느끼는 것 뿐이다.

어쩌면 마음은 그래서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잘못을 잘못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는 그런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그게 마음이 존재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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