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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평점 :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이영애, 김희애, 김혜수 주연의 주말드라마를 몇번 본 적이 있다. 당시에 아주 잘생긴 임성민(그 드라마를 찍으면서 사망했다)이 남자 주연이었고, 세 여자가 모두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식의 줄거리였던 것 같은데, 또다른 남자로는 손창민(아마도?) 그리고 송병준(이름이 맞나?음악하는 머리 지저분한 남자)이 등장했던 것 같다. 그 드라마에서 이영애는 까탈스런 직장 여자쯤으로 나왔던 것 같은데, 어느날 이영애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때문이었는지, 혹은 업무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백화점엘 간다. 백화점에를 가서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어야 할 정도로 쇼핑을 하고, 혼자서 백화점 식당가에 가 밥을 먹는다. 그 장면을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가 하면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 그런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 어린시절, 저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인가? 하고 갸웃하면서 신기해했다. 그리고 사실은 이해가 안됐다. 왜저러지? 돈아까운줄 모르고. 그리고 어떻게 혼자 쇼핑을 하고 밥을 먹지? 나이 들어 돈 벌면 저렇게 되나? 하는 생각들을 대체적으로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 삼십대 중반인 내가, 그러고 있다.
분명 몇년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내게 백화점은 피곤한 장소였다. 등산하는 것 보다 더 피곤하게 만드는 곳이 백화점인 것 같았다. 백화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향수냄새들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주르륵 진열된 나에게는 도저히 맞지 않는 고가의 옷들. 그런것들을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졌고, 나는 그런것들과 도무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백화점에 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백화점에서 옷을 사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할인매대에서 핸드백을 산다. 구두를 산다. 그리고 정상매대에서는 유일하게 화장품을 산다. 그리고 속옷을 산다. 물론 시장에 가는 것보다 돈이 더 든다. 나는 신용카드를 내밀고 일시불이요, 혹은 할부요, 라고 말한뒤에 백화점 점원들의 공손한 서비스를 받고, 돈을 지불할 때 누리는 그 잠깐의 권력에 푹 빠져 그 순간을 즐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화장품이 아니고, 핸드백이 아니고, 아마도 그것들을 내 손에 건네받기 위해 신용카드를 지불하는 그 짧은 순간, 그 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매장을 돌아서 나오자마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미쳤어, 이거 어떻게 갚지? 돌았어. 미친거야. 난 정말 미친걸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것들을 반품하지는 않는다. 쇼핑백을 안고 푸드코트로 간다. 푸드코트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쇼핑백을 옆자리 의자에 두고 혼자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과정까지 마쳐야 비로소, 나는 그날 혹은 그날까지의 모든 스트레스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이제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밥을 먹는’ 코스가 조금 더 업그레이드 되어서, 그 밥의 상세메뉴까지 정해져 있다. 순대볶음. 순대볶음을 혼자 앉아서 먹어야만 완벽해지고 완전해진다.
나는 최근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러나 감당해야 할만한 일을 저질러버렸고, 지금은 어떻게든 견디고 있지만 아마도 곧 무너져버릴 것 같다. 벼르고 별렀다가 어제, 백화점엘 갔다. 나는 어제 백화점에 달려가서 목걸이를 샀고, 영양크림을 샀다. 엄마에게 줄 아이크림을 샀고, 백화점 점원의 속삭임에 넘어가 미백 에센스를 샀다. 오, 신이시여. 모공에센스도 샀다.
두려워졌다. 나는 이것들을 어떻게 갚아나갈 것인가. 대체 왜 나는 지금 이 백화점에 와서 1층을 싹쓸이 하고 있는것인가, 대체 왜. 괜찮아, 넌 이래야 했어. 너가 매일 이러는 것도 아니잖아, 어쩌다 한번 뿐이잖아. 나는 나의 ‘지르는 자아’와 대화한다. 너무 돈을 많이 썼어. 밥은 집에 가서 먹어, 엄마가 김치찌개 해두었대. 아니야, 그러면 너는 오늘 그 미친 지름을 완성하지 못하는 거야. 밥도 여기서 먹어, 순대볶음 먹으라고. 그래, 일단 먹으면서 생각하자. 완성은 하고보자. 그래서 나는 무거운 쇼핑백을 옆에 둔 채로 앉아서 순대볶음을 시켜 혼자 먹었다. 아, 역시 이래야 해, 이게 완전해. 그러다가 불끈, 다시 카드값 걱정이 튀어나온다. 내가 내 월급을 아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이지? 이 고민을 친구에게 문자로 말하자 할부로 긁으라고 말한다. 아, 그래, 나 할부로 했다. 할부. 다행이다. 이 금액이 모두 한꺼번에 빠져나가지 않는다. 3개월에 거쳐 빠져나갈 것이다. 나는 괜찮다.
집에가서 샤워를 하고 미백크림을 바르면서, 아 젠장, 내가 언제 미백하고 싶어했던가…나는 미백에 관심조차 없는데…했다. 오, 신이시여. 왜 정신은 늘 집에 퍼질러 앉아야만 드는겁니까, 대체 왜요! 잔인하십니다. 그러면 앞으로 그러지 말거라, 나의 ‘절약하는 자아’가 나와 나에게 충고한다. 나는 알았다고 수긍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또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이 되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면, 그때 나는 나의 ‘지르는 자아’를 불러내서 함께 백화점에 갈 것이라는 걸.
이 책은 조경란의 백화점에 대한 책이다. 그녀가 백화점에 대해 가진 생각이 나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녀와 나는 백화점을 좋아한다. 정상매대를 이용할 수는 없지만 할인매대에서 뭔가 건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내가 조경란과 같다, 고 말할수는 없다. 그녀는 어린시절 가난했다고 말했지만, 공부도 못했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세계 여러도시를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한 외국에 교수로 불려가기도 한다. 이게 무슨 교수라고 했더라..기억이 안나네. 여튼, 그녀가 프랑스를, 미국을, 일본을 돌아다니며 백화점에 갔던 기억들을 불러내어 쓴 글을 읽노라면 나는 다시 슬금, 뒤로 빠진다. 위화감이 느껴진다. 이때는 ‘못난이 자아’가 튀어나온다. 나는 가진게 별로 없다는, 부족한게 많은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컴플렉스가 가져다 주는 못난이 자아. 이 못난이 자아는 그래서 부자들의 이야기에 거부반응을 느끼게 한다. 이런건 어쩔 수 없는 일.
조경란이 말하는 브랜드, 그것이 특히 가구나 머그컵 같은것에 대한 것일때는 난 외계어를 듣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괜찮은 에세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이 책 자체가 괜찮아서라기 보다는, ‘지르는 자아’와 함께 백화점에 달려가는 내가 비정상은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음, 역시 그 이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