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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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악기는 피아노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악기라서 그렇게 여기는걸지도 모르겠다. 뭐 이제는 악보도 읽을 수 없고 손도 굳어 버렸지만.

초등학교 1학년 말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 우리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한 악보를 주고 열번을 치라고 했으면, 집에 피아노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열번 더 숙제를 내주곤 했다. 그러나 나는 집에 피아노가 없다는 것이 컴플렉스였고, 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이 열번을 치라고 하면 학원에서 열다섯번을 더 쳤다. 당연히 진도가 다른애들보다 빨리 나갔다. 그때는 애들이 집에서는 숙제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학원에서 선생님은 부모님에게 툭하면 전화를 걸어서 나의 재능을 얘기했다. 피아노에 특출한 재능이 있으니 피아니스트를 시켜야 한다는 거였다. 부모님은 나를 별로 피아니스트로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나도 별로 피아니스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했지만, 누가 장래희망이 무어냐 물으면 피아니스트라고 답하기는 했었다. 얼마동안은.

하농을 치기 시작할때부터였다. 모든것들이 지겨워졌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이 열번을 치라고 하면 네다섯번쯤 치고 다 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연히 진도도 안빠지고 실력도 늘지 않았다. 선생님은 더이상 부모님께 전화를 걸지 않았다. 누군가 장래 희먕이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더이상 피아니스트라고 답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재미없었다. 치기 싫었다. 학원에 가기 싫어서 밍기적 거렸고, 결국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인가 다니다 그만두었다.

피아노를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피아노가 한두푼이 아니라 사달라고 졸라봤자 가질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피아노를 가진 친구들은 피아노를 가져봤자 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건 가진자들이 하는 말이었다. 나는 가져야 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생일날, 미국에 계신 이모가 생일선물이라며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전에도 그후에도 한번도 내 생일선물을 챙겨준 적이 없던 이모였는데, 그때 큰 맘먹고 부모님도 사줄 수 없었던 피아노를 사주셨던 것.

얼마동안이었을까, 나와 내동생은 피아노에 들러붙어 서로 자기가 치겠다고 난리였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은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는거야, 나는 의아했다. 그러나 우리 피아노도 곧 그렇게 되고 말았다. 피아노 위에 옷을 던져놓고, 책을 쌓아놓고, 피아노는 그렇게 가구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뤼크가 하는 말이 내게 고스란히 다가와 박혔다.

이제 가구로 사는게 아니라 제대로 살 수 있겠네요.” (P.37)

내가 피아노를 가구가 아닌, 피아노를 ‘제대로’ 대해 준 건 아주 짧은기간이었다. 그것이 몹시 미안했다.

이건 벽장에 넣어둘 수 있는 플루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피아노와 함께 살고, 피아노도 우리와 함께 살죠. 이건 덩치도 커서 무시해버릴 수가 없어요. 마치 가족의 한 사람처럼 말이에요.” (p.48)

아, 대체 나는 나의 피아노에게 무슨짓을 한걸까!

이 책의 저자는 피아노를 다시 제대로 레슨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둘이나 낳은 상황에서도 선생님을 찾고 레슨을 받는다. 나는 이 책에 쓰여진 것처럼 어떤 연주곡을 듣고 누구의 곡인지도 알 수없지만, 어떤 기교를 부리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레슨은 한번 다시 받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버렸다. 다시 쳐봐도 좋지 않을까? 나도 내 피아노를 제대로 대접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너무 늦은게 아닐까?

그러나 이 생각들도 한순간 뿐일거다. 이 책을 읽는 한 순간. 왜냐하면 이 책을 읽고 그 생각을 숱하게 하면서도 나는 피아노 뚜껑을 한 번도 열어보질 않았으니. 초절정 의지박약.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 없이 피아노를 사랑한다. 이제는 가구가 되어버린 나의 피아노를. 그리고 이제는 악보를 못읽어서 쳐줄 수 없는 나의 피아노를, 이제는 손이 굳어 쳐줄 수 없는 나의 피아노를. 나는 언젠가 우리가 조우할거라 믿는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아름다운 책이다. 더할나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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