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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열린책들/ 2025년 1월/ 320쪽
이제는 과거의 어느 날이 되었다. 당시에는 정말 지구가 멸망하는 것인가, 결국 인간은 환경파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인가 두려움에 휩싸였던 나날이었다. 2019년 12월, 중국 후안에서부터 시작된 코로나는 발생 2개월부터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수년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낳았다. 그렇지만 코로나는 바쁘다바빠 현대사회를 살고 있던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거리두기와 쉼을 안겨주기도 했다. 포스트 코로나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같은 팬데믹 시대를 지나왔지만 팬데믹이 창궐하던 당시, 우리의 삶은 모두 달랐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군가는 코로나로 혼란에 빠진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 별장으로 떠난 반면, 누군가는 여전히 바이러스의 위험이 도사리는 도시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뉴욕 타임스』 21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친구』의 저자이자 전미 도서상 수상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신작 장편소설 <그해 봄의 불확실성>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더더욱 굳어졌다. 이 소설은 감염병에 따른 봉쇄 조치로 인적이 뜸해진 뉴욕 맨해튼에서 우연히 지인의 반려 앵무새를 돌봐 주게 된 한 나이 든 소설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노년의 소설가는 지인이 아이리스로부터 부탁을 받게 된다. 남편과 함께 부모님을 만나러 집을 떠라 캘리포니아로 떠난 아이리스가 코로나의 유행으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그녀가 키우고 있는 반려 앵무새를 돌봐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애정을 듬뿍 받던 반려 앵무새 유레카는 금강앵무로 사람의 손길이 주기적으로 필요한 동물이었던 것이다. 어린시절 새를 키우고 싶은 갈망을 품고 살았던 주인공은 결국 그 부탁을 수락하고 유레카가 살고 있는 아이리스의 고급주택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녀는 유레카와의 동거를 통해 동물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온화함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코로나시대임에도 서서히 자신의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전임자이기도 했던 베치가 어느 날 다시 그집을 찾은 것이다. 그곳을 떠난 줄만 알았던 베치가 다시 돌아온 것. 다시 말해 주인공과 유레카, 그리고 베치의 의도치 않은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주인공은 인간 혐오주의자에 에코 테러리스트이며 분노 조절 장애를 갖고 있는 베치를 내내 거부하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고 그렇게 늙은 소설가와 Z세대 이상주의자 청년의 불편하고 기묘한 동거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시간이 되어간다.
p.106 도움을 베풀 대상을 찾아내는 것, 그게 많은 병들을 고치는 약이라고 한다. 그게 스트레스와 불안을 완하시키고, 애도와 슬픔, 상실감을 어루만져 준다고 한다.
가족과 친구, 지인들끼리도 서로의 안위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던 코로나시대. 그런데 그때 모르던 두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연결되어 서로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설정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코로나로 분명 잃은 것도 많았지만, 코로나시대의 거리두기로 인해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도통 사라지지 않던 관행들이 어느 정도 자취를 감춘 것은 만족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기를 통해 ‘우리가 남이가~’라는 잘못된 공동체 의식 속에 살던 우리가 조금씩 자기 중심의 삶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도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기후위기를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경고 메세지이기도 했을터.
노년의 작가인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 코로나 팬데믹의 시기에는 여성이면서 노인인 그녀가 겪었던 불평등의 현실이 담기기도 했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비단 인간만이 아닌 전세계의 모든 생물체임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글쓰기에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들을 거듭 되내이며 자신의 글을 완성시키고자 노력하는 작가로서의 모습도 곳곳에 담겨 있었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소설은 두서없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의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초반부 작품에 몰입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것은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어본 내가 그녀의 문체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오는 낯설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p.174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고전 소설들의 핵심을 이루는 결혼 이야기 말이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이상 매력적인 줄거리가 아니었다. 이제는 마지막에 결혼에 골인한다고 해서 만사형통이 될 수는 없었다. 간음이 반드시 파멸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었고, 간통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으며, 사랑에 빠지는 것이 자아를 이해하는 열쇠가 아니었다. 문학은 그런 것들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녀는 많은 작가들과 작품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를 직면하며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노력이 어렵게 읽혔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문학은 그런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