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재구성 - 현대 일본이 부끄러워하는 진짜 일본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에 대해서 애번 오스노스가 쓴 <야망의 시대>, 피터 헤슬러의 <컨트리 드라이빙>처럼 통찰력있는 이방인 기자가 자신이 체류한 나라를 예리하게 관찰한 모범적인 책입니다. 저자 패트릭 스미스는 20년 가량 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해왔고 1987~1991년에 해럴드 트리뷴의 도쿄 지국장으로 일본에 체류했더군요.

비록 이 책이 1998년에 출간되었지만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인 지금 읽어도 여전히 타당한 분석이라는 게 일본의 비극인 것 같습니다.

업무상 일본 법을 찾아볼 일이 종종 있는데도 일본국 헌법(소위 '평화헌법')이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고 올해까지 70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저자 패트릭 스미스 덕분에 평화헌법 제9조에 대한 개정 논의에 대해서 아베 신조가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는 딱지까지 붙여가며 '정상국가화'라는 개헌파의 주장을 매도하는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진영의 주장에 대해 마뜩찮아 하면서도 전쟁책임 인정에 소극적인 극우의 손을 들어주기는 했던 애매함을 후련하게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항복 후 미국이 대신 만들어준 헌법을 70년 동안 계속 사용해왔던 국민들이 불쌍하고 극악인 일본 정치인들의 리더쉽이 한심해서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아무리 헌법과 민주주의를 가르쳐봐야 뭐하나요? 1920년대의 짧았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태평양전쟁 종전 직우 몇 달을 제외하고 주권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권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도 없었는데요. 우리나라의 1987년처럼 강렬한 체험은 아닐지 몰라도 외국의 간섭없이 내부적으로 헌법을 개정해보는 경험을 해보길 바랍니다. 저자의 말처럼 일본인들이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권리도 있다고 보고요.

요시다 시게루와 기시 노부스케가 틀을 짠 일본주식회사와 미일안보조약 시스템이 그 수명을 다한 이후에도 나카소네 야스히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시스템 개편이 실패했는데 아베 신조의 이번 시도는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송민순 전 장관의 <빙하는 움직인다>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제1,2차 북핵위기에 대응하는 6자 회담에서 일본 외무성이 보였던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한 집착이 참 바보스러워보였거든요. 일본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러시아가 국외자로서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종종 통찰력있는 조언을 해주던 것과 비교되더군요.

읽으면서 일본이 유럽의 독일과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존재로 남아있는 덕분에 한국이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자율성을 누려온 측면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일본의 정치인들이 일본의 정상국가화에 성공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지금처럼 일본을 지시나 푸대접으로 별생각없이 다룰 수 없겠죠. 그렇게 되면 일본의 하위버전인 한국이 그동안 일본이 맡아왔던 역할을 담당해야할 것이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제주도로 옮겨올 수 있겠죠. 제가 바라는 상황은 물론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일본이 계속 이대로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으라고 저주를 내리기는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었던 일본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책들이 이 책에서 비판하는 소위 '국화회' 의 시각이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만주침략부터 태평양전쟁 종전까지의 시기를 일시적인 일탈로 보고, 일본의 아름다운 '전통'과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잘 착근이 되었다는 시각말이죠.

역자 후기에서 번역자 노시내씨가 술회한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패트릭 스미스의 지적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도 정확히 해당하는 내용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개인성을 억누르고 집단에게 극도의 충설을 바치는 무사 전통, 봉건주의, 계급의식, 외국인 차별, 지역차별(제주도나 전라도차별과 부라쿠나 오키나와 차별에 비교하면 아주..), 텐노와 궁내청(아키히토 천황의 자진 퇴위에 박수를~),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한 '개인성의 충분한 발현이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에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야한다'는 탁견이 패트릭 스미스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이 개인들의 '공적 개성'을 인정하는 근대국가가 되기를 기원하는 애정이 담겨있지요.

이 책에서 인용한 나쓰메 소세키의 강연 중 '제가 말씀드리는 개인주의라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중략) 나는 나의 길을 마음대로 갈 뿐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나름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가피하게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고독한 것입니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의 지적이고요.

일본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줬고, 일본이라는 거울에 한국을 비춰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여행가기 좋은 나라뿐만 아니라 이민가고 싶어지는 나라가 되길 기원합니다.  

---------------

38쪽

맥아더는 일본 평화 헌법을 총사령부의 기념물로 삼고 싶었다. 일본 평화 헌법은 맥아더가 필리핀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1935년에 미국 헌법을 본따 제정된 필리핀 헌법을 모델로 한 것이다.

65쪽

과거 요시다 협정이나 현재 일본이 서방 안보 협조체제 내에서 처한 위치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걸프전에 대해 도쿄가 보여준 어설픈 행동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이 일본에 만들어준 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미국 정부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 관료들은 또 그들대로, 예의상 그와 같은 사실을 드러내놓고 지적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지 오래됐다.

351쪽

731부대는 세균전 부대로, 다른 부대와는 달리 유일하게 텐노의 칙령으로 설치가 허가되었다.

406쪽

일본사회에는 외로움이 만연해 있다. 일본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금방 느낀다.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됨을 뜻한다. '타자'로부터 단절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내면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자기와 진짜 자기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일본인이 스스로를 너무도 철저하게 타자화해왔기 때문이다.

420쪽

부락민의 옛 선조는 동물이나 사람 시체와 관련이 있었다. 동물을 도살하거나 가죽을 무두질하거나 무덤을 팠다. 신토 신앙은 그런 일을 불결함의 상징으로 보았고 부락민의 지위는 그런 시각의 반영이었다.

453쪽

극우가 역사를 부정하고 역사적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에 좀더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느낀다. 백발이 된 노병들은 비록 꺼림칙한 방법으로 표현할지언정 여전히 자존심, 주권, 일본인다음 같은 관념을 지니고 있다. 오직 극우만 홀로 그런 관념들을 대변하면서 희화시키는 현 상황은, '국제주의자'들이 이 부분을 포기해버린 탓이기도 하다.

480쪽

일본은 내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되 대외적으로는 자신과 외국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역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이 이런 사고에 능숙해지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국가적 목표를 발견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과거 페친님을 통해서 나심 탈렙의 <블랙 스완>을 읽고 충격을 많이 받았었죠. 그런데 그 분께서는 <행운에 속지마라>를 더 추천하셨습니다. 절판이라 계속 못구하다가 개정판이 작년 연말에 출간되서 샀습니다. <안티프래질>은 사놓고도 못 읽고 있는데 두툼해서 엄두가 안나네요.

초판과  개정판 모두 번역자가 이 건 교수님이셨군요.  나심 탈렙의 설명이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라 두서없이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한데 문장은 쉽고 간결합니다. 이 건 교수님 말씀대로 번역은 독자를 위한 것이지 원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독성있게 잘 번역해주셔서 좋았습니다.

블랙 스완에서 서술된 아이디어들이지만 좀 더 개인사적인 이야기와 아이디어의 원류 위주로 설명하고 있어서 <블랙 스완>보다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땐 좀 장황하고 현학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계량경제학에서 출발해서 통계학, 인지과학(과학철학), 인지심리학, 진화생물학 등에 대해서 본인이 읽어온 책과  경험한 것들을 간결한 지혜로 풀어놓고 있는데 결국 '인간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우리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기 때문에 금융이나 투자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모두까기의 대가인 나심 탈렙이 제일 싫어하는 세 부류가 MBA 출신 금융인, 언론인, 일반인 서평쟁이인 것 같은데 제가 바로 세 번째 부류라 뜨끔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서평은 책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서평을 쓰는 사람의 지적 수준을 드러낼 뿐이라는 독설이 맞는 말이라 ㅠ.ㅠ

저자가 유이하게 존경(인정보다 더 높은 수준)하는 사람이 칼 포퍼고, 그의 사상을 구현한 조지 소로스인데  저는 칼 포퍼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빌려읽지 마시고 사놓고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서 꺼내서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매일 실제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인지적 편향을 극복하고 있는 나심 탈렙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책을 다시 읽으며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는 효과는 있으니까요.

여담으로 중등과정 수학교육의 핵심 목표가 미적분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에서 확률의 기본을 이해하는 걸로 바뀌는 것이 대다수의 시민들에게는 훨씬 유용하다고 생각되고요.

참고로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적어도 인용한 로젠 로즈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

69쪽

얼마 전 나는 식당에서 이 책의 초고를 읽어준 트레이더 로렌 로즈와 식사를 했다. 우리는 동전을 던져서 밥값을 계산할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내가 져서 돈을 냈다. 그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자기가 확률적으로 절반을 냈다고 말했다.

81쪽

빌려온 지혜는 틀리기 쉽다. 그럴듯한 논평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상식은 18세까지 습득한 오해의 종합체에 불과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85쪽

수학은 사고의 도구이지, 계산의 도구가 아니다.

100쪽

소음과 정보를 구분하자면, 소음은 언론에 비유할 수 있고 정보는 역사에 비유할 수 있다.

147쪽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아니라 돈이다.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얼마를 버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이익이 발생하느냐가 아니라, 그 결과 발생하는 이익 규모다.

287쪽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며 훈계할 때 가장 화가 난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314쪽

충족을 추구하는 사람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대개 충족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그는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았고, 충족을 얻는 순간 멈출 줄 안다. 목표를 달성해도 욕망을 계속 키워나가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혜석, 운명의 캉캉
박정윤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혜석씨의 생애에 대해 몇 년간 자료를 수집한 끝에 펴냈다는 소식에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요? 많이 아쉬웠습니다. 제가 묘사를 기대했던 그녀의 유년기부터의 행적들이 소략하게 몇 문장으로 처리된 부분이 너무 많네요.

그녀의 불꽃같은 삶을 한 권으로 압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굳이 가공의 인물과 다양한 플롯, 액자의 액자 구성이 필요했을까 싶네요. 차라리 분량을 두 세 권으로 늘리는 편이 나았을텐데.

쪽글도 끙끙거리는 주제에 등단하신 작가분께 심한 악담이지만 나혜석이라는 인물의 발굴자라는 왕관을 쓰려는 이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애지중지하는 5만원권의 도안에 나혜석씨가 들어갔어야 하는 사람이라 아쉽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홍익대학교 건축대학의 유현준 교수라는 분께서 쓰신 책. 조금 성의없게 지은 듯한 제목보다는 부제인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이 그나마 좀 낫다. 사내 도서관에 새로들어온 책으로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안봤을 듯 싶다.

우중충한 날씨때문에 팝콘 깨물어 먹으며 읽었다. 캐러멜 팝콘도 달콤했지만(수북히 두 그릇 먹었다 ㅠ.ㅠ) 유학에 건축사무소 실무까지 하셨던 분이 언제 이렇게 다방면의 책을 많이 읽으셨나 탄복했다. 그 지식들이 건축이 아닌 분야에 대한 오지랖이 아니라 본인이 느낀 공간디자인과 도시계획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적절하게 쓰이고 있어서 더 대단하다고 느꼈다.
"제1장 왜 어떤 거리는 걷고 싶은가"를 처음 보면서부터 감탄했다. 주관적인 인상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논리적으로 정량분석을 통해 간결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정말 아름다웠다. 마야 린의 베트남 기념관 현상 설계 공모작에 대한 부분도 버금갔고.

건축에 문외한들을 대상으로 한 비슷한 책을 여러 권 읽어봤다. 외국사람이 쓴 책도 있었고. 하지만 이 책이 개중 가장 빼어나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정반대쪽인 도시계획과 건축에서 출발해서 도시를 이해하고자 접근해온 이 책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중에 이 분이 우리나라의 주요 신도시들의 도시계획에 대한 비평을 책으로 엮어주시면 꼭 사봐야지.
정말 좋은 분석들이 많은데 이 책의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몇 단락만 추려서 인용하느라 혼났다. 스승의 날 기념으로 이 책을 한 권 사서 교수님께 선물해드려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중고] 티셔츠 경제학
피에트라 리볼리 지음, 김명철 옮김 / 다산북스 / 2005년 11월
평점 :


 

표지사진은 탄자니아의 만제스 시장에 진열되어 잇는 미국인들이 입던 헌 티셔츠

조지타운대에서 국제 비즈니스와 국제금융을 가르치던 저자 피에트라 리블리는 1999년 2월 어느 추운 날 교정에서 반세계화시위를 하는 학생들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잘못 알고 있음을 말해주고 싶어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쓰면서 저자는 세계화 논쟁의 양 진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함께 인간의 생존환경 개선에 공조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저자는 1999년 봄 플로리다주 포트 로더데일 해변의 월그린 매장에서 5.99달러짜리 티셔츠를 하나 산다.그 티셔츠의 일생을 추적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서부 텍사스의 목화농장에서 수확된 목화 수확물 중 면사를 짜는 린트 500그램이면 티셔츠 3장을 짤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는 동물사료, 튀김용 기름, 셀룰로오스 등으로 소비되고. 조면기를 거쳐 볼륨을 줄이기 위해 잔뜩 압착된 린트는 트럭과캘리포이나 롱비치 항구를 통해 상하이의 면방적공장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그 옆의 재봉실에서 만들어진 티셔츠는 다시 미국으로 수출되고, 나중에 구매자가 수거함에 버리게 되면 수거업자에 의해 분류되어 아프리카까지 세계각지로 수출되어 다시 팔린다.

 

언뜻 보면 굳이 책 한 권이 필요할까? 싶은 단순한 내용인데 이 책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이 과정에서 자유무역과 비교우위에 따른 완전경쟁시장의 작동을 막는 무수한 '정치적인' 요인들이 작동하는 구조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밝힌 결론대로 "티셔츠의 일생은 분명 경쟁적인 국제시장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그러한 영향을 촉발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경쟁적인 시장보다는 시장을 회피하려는 수단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치열한 경쟁시장은 누구든- 이를 찬미하는 사람들조차 피하고 싶어한다. 티셔츠가 생산되는 각 단계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승리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경쟁을 회피하려는 노력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경쟁 그 자체보다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내가 대학 새내기시절 세계화에 대해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읽던 시절 저자가 이 책을 쓰고 있었던 셈인데 이미 내 생각이 돌고 돌아와 저자가 말하는 바와 유사한 생각을 갖게 된 시점에서 이 책을 만나다니.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좋은 책이고번역 출판한 때가 2005년인데 벌써 절판이라는게 좀 의외다.

 

이 책을 통해서 인도 - 영국 - 뉴잉글랜드(미국) - 남부 피드먼드(미국) - 일본 - 한국/대만 - 중국 - 베트남 - 방글라데시로 이어지는 대항해시대 이후의 면직물 산업의 국제적인 흐름에 대해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부가적인 소득이고.

 

---------------

 

83쪽

 

2002년도 농업법은 목화 재배농들에게 1파운드당 최소 72.24센트의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2004년 중반 목화의 세계 평균 가격은 1파운드 당 38센트였기 때문에 미국의 목화 재배농들은 목화의 시장 가격보다 2배 가량을 더 받았다.

 

140쪽

 

전 세계 여공들은 다른 대안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처음 공장을 찾는다.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온순할 수 밖에 없다. 노동력 착취 공장은 이상적인 노동자의 특성을 지성이나 창조성이 아닌 온순함에서 찾는다.공장은 대안이 없는 젊은 여성들에게 선택권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기술을 습득한 뒤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도 한다.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온순함을 길러온 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 선택권을 얻고 난 뒤에는 차츰 과거의 수동적인 모습을 잃어간다. 어느 나라, 어느 공장에서든 여성들은 상관에게 맞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스스로의 선택권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섬유업계에서 이상적이라가 생각하는 노동자의 모습은 잃어갔지만, 독착성, 결단력,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산업에는 적합한 노동자가 되어 갔다. 바닥을 향한 경쟁이 진행되는 동안 기업들은 다른 분야로 사업을 옮겨갔으며 섬유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72쪽

 

대체적으로 의류 수업에 대한 제한 및 규제는 재무부, 상무부, 하원, 미국 통상대표부, 범정부간 협의체인 섬유협정 이행위원회는 물론 수백 명의 로비스트와 변호사들에 의해 문서화되고, 관리되고, 집행된다. 실제로 어떤 연구서는 11개의 박스와 수십 개의 화살표가 그려진 도표를 실어 섬유 및 의류 무역에 정부가 어떻게 간섭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2002년 초, 미국 섬유 및 의류 수입자 협회의 홈페이지에는 일, 시간, 분 초 단위로 MFA의 시한을 표시하는 시계가 있었다. 2005년 1워 1일 MFA의 만료가 예정된 시간에서 의류 수입업자들은 그들이 싸워야만 했던, 미국 역사상 가장 복잡한 무역 보호정책의 남은 수명을 정확히 계산해볼 수 있었다.

 

182쪽

 

면직물 및 의류 수입을 제한한, 미국의 정책은 뜻하지 않게 무역 상대국으로 하여금 상품의 품질을 더욱 향상시키고,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 같은 대중적인 인조직물 및 모직물 판매에 전력을 다하도록 했다.

 

196쪽

보호무역제도로 수천 개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살아남은 일자리는 각종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관계한 워싱턴의 로비스트들과 관료들의 자리였다.

 

203쪽

 

미국의 쿼터제가 가져온, 가장 부정적인 결과는 엉뚱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쿼터는 사실상 옵션이며, 투자자라면 누구나 알듯이 옵션은 가치가 있다. 전 세계 수십 개국에 쿼터를 할당함으로써 미국은 자국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권리인, 가치있는 옵션을 마치 선물인 것처럼 분배해버렸다.

(중략)

만약 중국이 쿼터를 팔아 벌어들인 9억 5백만 달러의 수입을 2003년 실직한 98,000명의 미국 섬유업계 노동자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노동자 한명 당 적어도 9,000달러 이상을 직업훈련 등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213쪽

 

1600년대 후반 영국 의회는 수입 면제품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여름에는 면직물이 좋다고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자들과 모직업계를 옹호하는 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렸다. 오늘날 미국의 사정과 마찬가지로, 모직업계는 이권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예를 들어 1689년 의회에 도입된 법령에 따르면 면직품은 오직 여름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모든 성자들의 축일부터 성수태고지의 축일까지 누구나 양모 말고는 다른 어떤 의류도 착용할 수 없다.) 또한 모직업계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 특정 집단의 의복을 법률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모든 치안판사, 재판관, 대학생, 교수들은 반드시 모직물로 만든 가운을 일년 내내 입어야만 한다.)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직업계는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법령을 변경했다. 또 다른 법령에는 5파운드 이상의 수입이 잇는 하녀들은 오로지 모직 모자만 써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1700년대에 이르자 의회는 오직 한 집단에만 모직옷을 가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직물을 입어도 간지러움을 느끼지 못했고, 하녀들보다도 더 권리가 없는 집단이었다. 법령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었다.

 

"어떤 시신이건 오로지 양모 외에는 매장될 때 어떠한 수의도 입힐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짤막한 시가 지어졌다.

 

"살아 있는 이들은 견딜 수 없었기에

결국은 죽은 이가 입어야만 했네."

 

246쪽

 

어떤 구제 티셔츠는 특히 유럽, 뉴욕, LA에서 인기가 좋다. 예를 들어 서니의 고객들은 1970년대 락밴드 티셔츠에 기꺼이 고액을 지불한다. 따라서 작업자들은 이런 티셔츠를 잘 골라내어 '빈티지'로 분류해놓아야 한다. 롤링 스톤스의 티셔츠를 아프리카로 보내는 것은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다. 아프리카 소비자들은 롤링 스톤스를 모를 뿐 아니라 눈에 띄게 낡고 찢어진 티셔츠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상급의 롤링 스톤스 티셔츠(예를 들어 1972년 밴드 퉈)는 빈티지 상점에서 300달러 가량에 팔린다. 만약 그런 티셔츠가 아프리카향 화물에 섞인다면 스터빈 일가는 큰 손해를 보게 된다.

 

269쪽

 

어떤 사람들은 자선의 목적으로 기증된 옷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무료로 기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입을 금지해도 미툼바 거래를 근절할 수 없듯이 이러한 생각은 실효성이 없다. 아무리 막는다 하더라도 기증된 옷들은 은밀하고 재빠르게 미툼바 시장으로 보내어진다. 조사 결과, 기증된 옷은 진정 옷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보다는 바로 미툼바 시장으로 보내어짐이 밝혀졌다. 또한 아시아 난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옷들도 속속 시장으로 향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자선활동은 필요한 사람에게 옷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시장을 따라가지 못한다. 에드 스터빈과 제프리 밀론지 같은 사람이 없다면 기증된 옷들은 대부분 창고에서 썩기 마련이다. 순수한 자선활도에 의해서는 기증된 옷을 분류하고, 등급을 매기고, 배분하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재난 구호 조직들은 옷을 재난 지역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275쪽

 

미국의 지독한 소비열은 구제옷의 공급뿐만 아니라 해상 운송비에도 영향을 미친다. 2003년도 미국의 무역적자는 5,32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로 인해 미국으로 들어오는 화물 운송비가 미국에서 나가는 화물 운송비보다 비싸지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 나가는 화물운송비는 다른 지역의 화물 수요도 반영한다. 그러므로 미국과 커다란 무역불균형을 보이는 나라는 화물 운송비 역시 불균형을 보이게 된다.

 

2003년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1,240억 달러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중국으로의 수출보다 약 5배 많았다. 5만 파운드의 옷을 실을 컨테이너를 뉴저지에서 중국까지 실어 나르는데 약 400달러가 드는데 이는 브루클린에서 뉴저지 항까지의 트럭 운송비가 비슷한 수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