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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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라디오작가의 블로그에 가보면 그 작가가 자주 가는, 조용하고 분위기 좋고 커피가 예술인 커피숍을 몇 군데 소개하는 글이 있다. 언제 가더라도 마치 내 지정석인 양 정해진 창가 자리에 앉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시계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몇 시간동안 꼼짝도 않고 읽고 있으면 까페 주인이 조용히 다가와 비어버린 커피잔에 커피를 채워주고 스르륵 물러나버리고, 그러다 문득 노트북을 켜거나 흰 종이위에 펜을 들거나 해서 멈추지 않고 누가 불러주는 걸 받아쓰는 것처럼 글을 쓰는 상상.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 속의 커피숍은 내 상상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늘 상상은 상상으로 머무는 법. 커피숍에서 여유롭게 책읽고 글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 핑계겠지만.... 

글을 쓰는 것은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이었다. 아니 지금도 꿈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 <라이팅 클럽> 책 말미에 해설로 실린 문학평론가 정여울씨의 글 첫부분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비롯한 각종 1인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매일 글을 쓰는 시대'가 도래했다."(316쪽)는 사실이 나를 좌절시킨다. 그런 1인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내가 글을 꽤 잘 쓴다고 자부했었다. 교내 백일장이나 조금 큰 규모의 글짓기 대회에서 작은 상을 받곤 했었던 보잘 것 없는 기억때문이다. 하지만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이 없어서 사진을 찍어 미니홈피에 올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남들 다 하는 미니홈피도 하지 못하고 그저 친구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파도타기하면서 남들의 일상을 훔쳐볼 수 밖에 없었던 그 때, 깨달았다. 사진 한 두장에 곁들인 사람들의 코멘트가 꽤나 훌륭했다는 것. 세상에 이런 짧은 몇 문장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아주 많다는 것. 아니,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글을 잘 쓴다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그 때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이젠 입밖에 그 꿈을 얘기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늘 품고 있다. 글을 막상 쓰진 못하지만 대신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대체해버렸지만. 

그래서 그런지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진득하게 앉아 강의를 듣는 데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약간 딱딱한 글짓기 강의 책은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게 된다. 그러다 글쓰기에 온 인생을 건 두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있다기에 얼른 눈을 돌렸다. 소설 속에 글짓기 비법을 마법처럼 녹여 넣진 않았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라이팅 클럽>을 집어들었다. 

김작가라고 불리우는 엄마와, 불량스럽기 그지 없는 덩치큰 딸. 둘 다 글쓰기에 미쳐 있다. 김작가는 작은 동네에다가 글짓기 교실을 열어서 초등학생부터 동네 주부들까지 모아놓고 글짓기 강의(?)를 하고, 딸은 동성의 여자 친구들과 사랑에 빠져서 편지를 쓴다.... (참 흔하지 않은 캐릭터이다. 왜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게 삐딱하고 불량스럽고 염세주의자일까? 대부분 착하고 모범적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평범한 사람들은 주인공이 될 수 없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사는 게 현실 아닌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 가지 비밀을 가지고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의문이 들었다. 소소한 일상을 그린 영화나 소설이 참 좋지만 사실 큰 임팩트가 있는 게 아니라서 재미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원래 일상이란 그렇게 재미없는 거니까.) 김작가는 많은 보통의 엄마들처럼 모성애가 강한 엄마가 아니다. 내가 불량소녀가 아니고, 우리 엄마가 모성이 없는 엄마가 아니기에 모녀간의 관계에는 공감하기에 어려운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또한 지극히 가난한 주인공의 집. 우리 집은 풍족하진 않았지만 가난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쌀 살 돈이 없는 것이 어떤 건지 역시 공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어하는, 그렇지만 다 쓰레기일 게 뻔하기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는 그 심정만은 처절하게 공감했기 때문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과연 이 주인공은 자기만의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러지 못하므로 이 주인공만은 소설을 쓰기 바라는 심정 반, 나도 못 그러는 데 이 주인공이 소설을 쓰는 데 성공한다면 내가 너무 못나 보일 것 같아서 이 주인공도 끝까지 소설을 쓰지 못하길 바라는 못된 심정 반. 

중고등하교 시설의 주인공이 사회생활을 하고 몇 번의 연애를 하고 미국으로 가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스르륵 이어진다. 그러는 사이 당연히 엄마인 김작가도 나이를 먹어가고. 두 모녀의 삶에 '글쓰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까? 그리고 '엄마처럼은 안 살거야!'라고 외치다가 결국은 엄마가 걸어간 길을 고대로 걸어가고 있는 수많은 딸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미국에서 '라이팅 클럽'을 만든 딸의 모습은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든다. 

아주 특별히 이 책이 너무 재밌다고 큰소리치기에는 뭣하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다고 단순히 얘기할 수도 없다.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책을 잡고 꼬박 4시간동안 다 읽어내렸다.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이 가득한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 아니, 책을 읽고 있는 중에 한 줄이라고 글을 쓰고 싶어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은 주인공이 미국으로 떠날 때 김작가가 주인공에게 준 편지이다. 단 다섯줄이지만 얼마나 가슴벅찬지 다 외워서 읊고 다니고 싶을 정도이다. 그 편지 말고도 아무것도 아닌 말들인데도 그냥 가슴을 콕콕 건드려서 포스트잇을 붙여둔 게 대여섯 군데이다. 일요일 오전 반나절이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포스트잇을 붙여둔 부분 중 몇 개만 소개해본다.

""뭐 하긴 뭐 해. 대학도 안 가는데 직장이라도 얻어야 할 거 아냐. 밥값은 해야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어깨 위로 차가운 시베리아 바람이 한바탕 지나가는 것 같았다. 소설이고 뭐고 자정이 되어 한순간에 호박 덩굴로 만든 마차에서 굴러떨어진 공주 꼴이 된 기분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현실, 현실이 문제였다." (100쪽)

"처음에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김작가는 늘 그랬다. 내가 어떤 강 하나를 건널 때는 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차피 강은 흐를 수밖에 없다는 듯이." (141쪽)

"새로 시작한 연애가 끝날 때마다, 눈앞의 연애보다 오래전에 헤어진, 과거의 애인들이 생각나는 건 왜 그럴까. 그때로부터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뒤로 걷고 있는 느낌, 발전이라고는 없는 느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느낌만 든다."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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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회계학
하야시 아쓰무 지음, 오시연 옮김, 김성균 감수 / KD Books(케이디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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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경영학부로 진학을 했다. 1학년 때는 학부생이지만 2학년이 되면 경영학과와 회계학과로 과가 나누어진다. 1학년 때 '회계학기초'라는 과목을 들었는데 어찌나 딴나라 말을 하는 것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결국 F학점을 받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상업'과목을 들었다는 친구는 꽤나 잘 알아들었는데 말이다. 그 때 나와 회계는 인연이 아닌가보다, 라는 생각으로 회계학을 지레 포기해버렸고 꼭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만 어쩔 수 없이 건성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거 몰라도 사는 데 지장없다고 큰소리 뻥뻥 쳤었는데, 막상 회사 생활을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던지, 회사의 돈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아야 실무를 추진할 수 있었다. 뒤늦게 회계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도, 시간도 없어서 대충 눈치로 떼워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 <회계학 콘서트>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고 한 번 읽어볼까, 하다가 읽지 못했었다. 굳이 어려운 걸 굳이 배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실제로 회사에서 '회계'업무를 직접 맡게 되었다. 일은 어떻게 처리해나가고 있지만 기본지식이 없으니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기분은 어찌할 수 없던 차에 <만만한 회계학>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제목처럼 만만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회계학'이 만만할 수는 없으니까. 라면가게와 장어덮밥가게의 이익을 따지거나 호텔의 객실요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거나 하면서 실생활과 근접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설명해주는 부분은 이해하기 쉬워서 좋았다. 그리고 경영자에게 필요한 회계 정보에 대한 이야기들은 왠지 모르게 나를 자극하기도 했다.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곳도 자금 사정이나 내년의 사업전망에 전반적인 수정이 필요한 상황이라서, 경영자가 아닌 실무자의 입장에서 경영자에게 올바른 정보와 기획안을 제시하고 싶은 욕심이 났다. 능력있는 직원이라는 평도 받고 싶고, 실제 우리 회사를 위한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대학에서 배웠던 '관리회계'나 '원가회계', '재무회계' 등 회계의 개념과 쓰임새 등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고, 그 숫자들이 끝이 아니라 그 숫자들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 항상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좀 더 공부하고 싶어지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는가보다. 이 책도 좋은 자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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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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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한 권을 다 읽었다. 대부분 허탈하거나 찝찝한 감정이 남는다. 왜인고 하니, 두꺼운 한 두권의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알기 위해, 혹은 범인이 왜 그랬었나를 알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모든 것이 밝혀지며 결국 끝이 나버린다. '다 읽었다~' 하는 탄성이 아니라, '하~'하는 허탈한 한숨이 나온다. 범인의 동기나 결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추리소설을 만났다.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지기까지 했다. 웃으면서 다시 한번 곱씹어보기도 했다. 추리소설인데 말이지.. <모방범>에서 책을 읽는 행위로도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던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인데 말이지.. 희한한 일이다. 

9월 중순 어느 더운 날, 한 노인이 독극물이 든 우롱차를 마시고 죽고 만다. 이미 네번째 무차별 독살 연쇄살인사건이다. 그 즈음 이마다 콘체른이라는 대기업 홍보실의 사내보를 만드는 스기무라는 사무실의 아르바이트 겐다 이즈미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럴듯한 이력서와는 달리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히스테리를 부려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어 결국 편집장이 그녀를 해고를 시켰는데 그 후부터 이 여성의 행동이 가관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난 기타미라는 사립탐정의 집에서 스친 미치카라는 소녀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스기무라에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얽혀들어 전개된다. 스기무라는 성격이상자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정신나간 겐다 이즈미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미치카가 독극물 우롱차를 마시고 죽은 할아버지에 대해 쓴 글을 읽어봐주고 위로해줘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다. 

<이름없는 독>에는 등장인물들 중 겐다 이즈미와 미치카의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참 좋은 사람들이 나온다. 주인공 스기무라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착하고, 긍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의 장인어른인 이마다 그룹의 회장님은 보통 드라마에 나오는 비정한 아버지나 냉혹한 사업가가 아니다. 딸에게 한없이 부드러운 아버지이고 인간적이며 옳은 말을 하시는 멋진 분이다. 소노다 편집장도 툭툭 내뱉는 말이 못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속마음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여리디 여려서 혼자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겐다 이즈미 이후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오게 된 곤짱도 대책없이 밝은 아가씨로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귀여움을 받는 놀라운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스기무라의 귀여운 딸 모모코나 사랑스러운 아내 나호코, 똑똑한 저널리스트 아키야마 등등 애정을 듬뿍 갖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등장인물들이 여러 명 더 있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다들 밝고 따뜻한 사람들이니 살인사건을 이야기하는 추리소설을 읽고 있지만 억울하거나 찝찝하거나 무섭거나 하는 감정은 잘 들지 않는다. 가족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앞에도 말했듯이, 딱 두명만 이 책에서 이질적인 존재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겐다 이즈미는 단순히 일은 못하면서 성질만 괴팍한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뇌구조에 이상이 있다거나, 처음부터 중요한 어떤 감정적 기능이 결여된 채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인물이다. 정말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 라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만들며, 내 주위에 '보통' 사람들인 가족과 동료와 상사와 친구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또 우롱차 독살 사건의 진범의 경우에는 겐다 이즈미와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한 순간의 분노로 잘못된 상대방에게 독을 뿜어내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겐다 이즈미도 진범도 겉으로만 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다. 그들도 면접을 보고 조금이나마 직장에서 일을 했다. 누가 악인이고 선인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뭘까? 겉으로 가려낼 수 없으므로 더 답답하고 무섭다. 

다만, 새집증후군이나 토양오염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 부분에서는 조금 지루한 감정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긴 그것도 이 소설의 중요한 하나의 소재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책 제목에서 말하는 '독'이란 것이 우롱차 안에 든 청산가리 같은 실제 독도 의미하지만, 작가는 제목 그대로 '이름없는 독'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리라.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책 속에 스기무라의 생김새에 대한 묘사가 없다고 한다. 내 머릿속에는 스기무라가 대충, 얼핏 그려져 있는데 그 말을 읽고 보니 정말 책 속에 정확한 묘사가 한 구절도 없었던 것 같다. 키가 크다,작다 또는 얼굴이 둥글다, 네모지다 등등 한 마디도.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의 <누군가>의 일본어 문고판에는 일러스트레이트가 있다는데, 아주 운좋게도 나에게 원서가 있었다.(아직 읽진 못했지만) 얼른 책을 찾아보니, 내 상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수더분하고 배가 볼록 귀엽게 나온 중년의 아저씨로 상상했는데 그림 속에는 약간 마른 보통 체격의 깔끔한 남자가 있었다. 물론 자세하게 그려진 게 아니긴 하지만. 그 그림을 보고 나니.... 스기무라가 더 좋아졌다! 생각해보니 스기무라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 모모코가 있다. 그럼 아무리 많이 잡아도 30대 후반이다. 아니, 스기무라는 분명 30대 초중반일 것이다. 아, 스기무라는 정말, 너무 좋다. 이렇게 환상에 빠졌다. 

스기무라는 <누군가>에 먼저 등장한 인물인데 작가가 <이름없는 독>에 다시 주인공으로 선보였다. <누군가>는 원서만 들고 있고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몇날며칠이 걸리더라도 꼭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정말 희소식은 앞으로도 스기무라가 등장하는 책이 나올 거라고 한다. 시리즈물로 나오는가 보다. 일본에서도 스기무라가 꽤 통했던 것 같다. 어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사람을 긴장시키는 추리소설을 읽다가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색다른 추리소설을 읽는 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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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정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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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으로 처음 만난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후에 읽게 된 <환야>, <용의자 X의 헌신>, <방황하는 칼날>, <방과후>등 만나는 작품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미야베 미유키 등 일본 추리소설을 한동안 꽤 열심히 읽다가 추리소설 자체를 멀리하게 되었다. 바로 추리소설 자체의 특징인 사람을 서서히 꽉 졸라매는 그 긴장감이 어느 순간 싫어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좋은 추리소설 한 권을 읽고는 다시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다작 작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너무 많은 작품들에 어느 것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다가 아무 거나 골랐는데, 그게 바로 <회랑정 살인사건>이다. 

32살의 기리유 에리코는 70대 혼마 기쿠요로 변장하고 회랑정으로 향한다. 그 이튿날, 얼마 전에 죽은 이치가하라 다카아키의 유언장이 공개되는데 이치가하라 가족 모임에 그 관계자로 참석하는 것이다. 사실 에리코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반년 전 회랑정에서 있었던 동반자살사건(그녀의 애인인 사토나카 지로가 전날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애인인 에리코를 목조르고, 자신은 청산가리를 마시고 방에 불지르고 죽은 사건)에서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위장자살을 하고 자연사한 기쿠요부인으로 변장한 것이다. 모두 유언장 내용을 궁금해하지만 그녀는 애인 지로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 복수하기 위해 회랑정에 온 것이다. 

이야기는 에리코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70대 기쿠요부인으로, 기쿠요부인은 에리코가 자살하기 전 자신에게 보냈다는 유서를 들고 가족모임에 나타난다. 아마 유서가 공개되면 다카아키의 유산을 상속받는 데 문제가 있을 동반자살사건의 범인을 꾀기 위한 미끼였다. 실제로 그날 밤, 기쿠요부인(에리코)의 방에는 그 유서를 훔쳐낸 사람이 있었다. 유카. 유카가 나가고 난 뒤 유카의 방으로 간 에리코는 그녀가 이미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발견하고 도망쳐나온다. 

거대한 유산을 사이에 두고 누가 상속받을 것인가, 욕심에 눈이 먼 가족들의 이야기와 동반자살사건의 진범을 밝히기 위해 여러 사람을 떠보고 다니는 기쿠요 부인. 그 때 발생한 살인사건. 그런데 처음부터 친절한 설명 없이 70대 노부인으로 변장한 에리코의 시점에서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솔직히 내용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리고 이치가하라 집안의 여러 사람들의 가족 관계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 않아서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누가 누구의 딸이고, 형제간이고 하는 것이 파악이 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짚어낸 유카와 나오유키는 삼촌과 조카 사이라는 것 말고는. (어쩌면 몰입이 되지 않아 잘 읽어내지 못한 내 탓이 가능성이 좀 크다는 것을 인정한다.)

'~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나 추리소설입네~'하고 티를 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좀 가벼운 터치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썩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작가의 <백야행>이나 <환야>의 어둡고 몽롱한 분위기와 <용의자 X의 헌신>같이 슬픈 사랑 이야기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나보다. 그런 분위기여도 충분히 책은 술술 읽혀졌는데 이 소설은 그저 술술, 마치 연애소설 읽듯이 그냥 읽어졌다. 물론 여성을 육체적 아름다움의 관점으로만 보는 현대사회를 질타하는 사회의식도 있지만 그건 그저 하나의 소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래저래 솔직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사건의 해결 또는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몇 장에 나온 진범의 한마디는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책을 덮고 진심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걸 보면 나도 뭐라뭐라 해도 이 책에 몰입했던 것 같다. 가족관계를 파악하진 못했지만 주인공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진범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책을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에 만나게 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마음에 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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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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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별 다섯개를 다 줄 수 있을 만한 책을 만났다. 얼마전 우연히 읽게 된 <하늘을 나는 타이어>로 인해 호감을 갖게 된 작가 이케이도 준의 다른 작품을 찾았다. 2007년에 이미 한국에 소개된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이다.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소설가로 전업을 했다. 그래서 은행 쪽 이야기가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장소는 도쿄제일은행 나가하라 지점. 구조 지점장과 후루카와 부지점장 아래 융자과, 업무과, 영업과 등 직원들이 충실하게 업무에 임하고 있다.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마칠 시점에 100만엔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리저리 뒤지고 찾는 중에 성실한 여직원 기타가와의 사물함 속에서 당일 날짜가 찍힌 띠지가 발견된다. 기타가와의 직속 상관인 업무과 대리 니시키는 실제로 돈을 훔치지 않은 부하를 보호하고 혼자서 진범을 찾기로 한다. 뒷날 100만엔은 지점장과 부지점장, 과장들이 분담해서 돈을 채워넣고는 사건은 유야무야 끝나버린다. 띠지에 묻은 지문으로 실제 범인을 찾은 니시키는 범인과 만난 후부터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은행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사람 수가 많으니 각자의 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나가하라 지점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설은 직원 한 명 한 명을 주인공으로 10개의 장에 나누어 사건과 전반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장면전환이 상당히 빠르다는 점이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어떤 장면은 책 두 바닥밖에 묘사되지 않는다. 드라마 속에서 회사 사무실에서 주인공이 한 두마디 하는 걸 보여줬다가 금방 식당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나왔다가 또 금방 집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그러니 책읽는 입장에서는 미사여구가 섞인 장황한 장면 묘사나 감정 묘사에 헤메지 않고 필요한 정보만 캐치하면서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은행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결국 조직의 일원이다 보니 인사발령장 한 장으로 다른 지점으로 날려가버리고 만다. 등장인물들 중 몇 명이 전근으로 사라져버리고 문제를 일으킨 직원 몇 명은 퇴직해버린다. 너무 쉽게 등장인물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황당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현실이 그러하니까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사건 전개에 필요하지 않은 인물이라면 그런 식으로 소설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기도 했다. 

출세에 눈이 멀어 부하직원들을 다그쳐서 실적을 올리기에만 급급한 후루카와 부지점장과 그와는 다른 것처럼 점잖게 행동하지만 사실은 부지점장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구조 지점장. 은행과 그외 영업 쪽 업계에는 실적으로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내가 그 쪽에서 일하지 않아서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만 읽으면 은행에 일하면서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책 속에는 실적에 억눌려 정신병을 얻은 사람도 나온다. 피식 웃었지만 웃을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고객의 손실을 뻔히 알면서도 당장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그깟 고객의 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윗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어찌나 화가 나는지, 내가 은행과 보험회사에 맡긴 돈은 과연 속지 않고 잘 맡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속았는지 속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는 재테크 머리는 남들보다 떨어져서 알아차리지도 못하겠지만. 

이 책에는 반전이 두 가지가 들어 있다. 경마에 빠진 한 남자 이야기와 나가하라 지점에 들이닥친 검사부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번갈아 나오는 부분은 대부분 독자들이 속아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전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와~'하는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책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으로 이 책은 덮고 나서 뒤가 찝찝해져버렸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과연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정말 당연한 것일까? 사실은 '이게' 아니고 '저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나같은 소시민 개인이 은행에 가는 일은 정해져 있다. 예금을 하고 적금을 넣고, 아직 대출을 할 일은 없지만 소액 대출을 할 일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은행에서 만나는 은행 직원은 창구에서 예금, 적금, 공과금 등을 처리하는 여직원들 뿐이다. 하지만 은행은 사실 그 분들뿐만 아니라 뒤쪽에 파티션으로 나뉜 책상에 앉아있는 직원들이 더 많은, 금액이 큰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내면을 조금이나마 이 책으로 알 수 있었다. 은행에 취직한 지인들이 몇명 있다. 그 선배들, 후배들도 책 속에 나오는 고민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파이팅을 보내본다. 

니시키는 과연 죽었을까? 살았을까?......
처음부터 니시키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을까? 관여한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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