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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 한 권을 다 읽었다. 대부분 허탈하거나 찝찝한 감정이 남는다. 왜인고 하니, 두꺼운 한 두권의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알기 위해, 혹은 범인이 왜 그랬었나를 알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모든 것이 밝혀지며 결국 끝이 나버린다. '다 읽었다~' 하는 탄성이 아니라, '하~'하는 허탈한 한숨이 나온다. 범인의 동기나 결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추리소설을 만났다.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지기까지 했다. 웃으면서 다시 한번 곱씹어보기도 했다. 추리소설인데 말이지.. <모방범>에서 책을 읽는 행위로도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던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인데 말이지.. 희한한 일이다.
9월 중순 어느 더운 날, 한 노인이 독극물이 든 우롱차를 마시고 죽고 만다. 이미 네번째 무차별 독살 연쇄살인사건이다. 그 즈음 이마다 콘체른이라는 대기업 홍보실의 사내보를 만드는 스기무라는 사무실의 아르바이트 겐다 이즈미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럴듯한 이력서와는 달리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히스테리를 부려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어 결국 편집장이 그녀를 해고를 시켰는데 그 후부터 이 여성의 행동이 가관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난 기타미라는 사립탐정의 집에서 스친 미치카라는 소녀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스기무라에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얽혀들어 전개된다. 스기무라는 성격이상자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정신나간 겐다 이즈미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미치카가 독극물 우롱차를 마시고 죽은 할아버지에 대해 쓴 글을 읽어봐주고 위로해줘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다.
<이름없는 독>에는 등장인물들 중 겐다 이즈미와 미치카의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참 좋은 사람들이 나온다. 주인공 스기무라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착하고, 긍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의 장인어른인 이마다 그룹의 회장님은 보통 드라마에 나오는 비정한 아버지나 냉혹한 사업가가 아니다. 딸에게 한없이 부드러운 아버지이고 인간적이며 옳은 말을 하시는 멋진 분이다. 소노다 편집장도 툭툭 내뱉는 말이 못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속마음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여리디 여려서 혼자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겐다 이즈미 이후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오게 된 곤짱도 대책없이 밝은 아가씨로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귀여움을 받는 놀라운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스기무라의 귀여운 딸 모모코나 사랑스러운 아내 나호코, 똑똑한 저널리스트 아키야마 등등 애정을 듬뿍 갖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등장인물들이 여러 명 더 있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다들 밝고 따뜻한 사람들이니 살인사건을 이야기하는 추리소설을 읽고 있지만 억울하거나 찝찝하거나 무섭거나 하는 감정은 잘 들지 않는다. 가족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앞에도 말했듯이, 딱 두명만 이 책에서 이질적인 존재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겐다 이즈미는 단순히 일은 못하면서 성질만 괴팍한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뇌구조에 이상이 있다거나, 처음부터 중요한 어떤 감정적 기능이 결여된 채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인물이다. 정말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 라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만들며, 내 주위에 '보통' 사람들인 가족과 동료와 상사와 친구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또 우롱차 독살 사건의 진범의 경우에는 겐다 이즈미와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한 순간의 분노로 잘못된 상대방에게 독을 뿜어내는 것을 보면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겐다 이즈미도 진범도 겉으로만 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다. 그들도 면접을 보고 조금이나마 직장에서 일을 했다. 누가 악인이고 선인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뭘까? 겉으로 가려낼 수 없으므로 더 답답하고 무섭다.
다만, 새집증후군이나 토양오염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 부분에서는 조금 지루한 감정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긴 그것도 이 소설의 중요한 하나의 소재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책 제목에서 말하는 '독'이란 것이 우롱차 안에 든 청산가리 같은 실제 독도 의미하지만, 작가는 제목 그대로 '이름없는 독'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리라.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책 속에 스기무라의 생김새에 대한 묘사가 없다고 한다. 내 머릿속에는 스기무라가 대충, 얼핏 그려져 있는데 그 말을 읽고 보니 정말 책 속에 정확한 묘사가 한 구절도 없었던 것 같다. 키가 크다,작다 또는 얼굴이 둥글다, 네모지다 등등 한 마디도.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의 <누군가>의 일본어 문고판에는 일러스트레이트가 있다는데, 아주 운좋게도 나에게 원서가 있었다.(아직 읽진 못했지만) 얼른 책을 찾아보니, 내 상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수더분하고 배가 볼록 귀엽게 나온 중년의 아저씨로 상상했는데 그림 속에는 약간 마른 보통 체격의 깔끔한 남자가 있었다. 물론 자세하게 그려진 게 아니긴 하지만. 그 그림을 보고 나니.... 스기무라가 더 좋아졌다! 생각해보니 스기무라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 모모코가 있다. 그럼 아무리 많이 잡아도 30대 후반이다. 아니, 스기무라는 분명 30대 초중반일 것이다. 아, 스기무라는 정말, 너무 좋다. 이렇게 환상에 빠졌다.
스기무라는 <누군가>에 먼저 등장한 인물인데 작가가 <이름없는 독>에 다시 주인공으로 선보였다. <누군가>는 원서만 들고 있고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몇날며칠이 걸리더라도 꼭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정말 희소식은 앞으로도 스기무라가 등장하는 책이 나올 거라고 한다. 시리즈물로 나오는가 보다. 일본에서도 스기무라가 꽤 통했던 것 같다. 어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사람을 긴장시키는 추리소설을 읽다가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색다른 추리소설을 읽는 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