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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정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백야행>으로 처음 만난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후에 읽게 된 <환야>, <용의자 X의 헌신>, <방황하는 칼날>, <방과후>등 만나는 작품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미야베 미유키 등 일본 추리소설을 한동안 꽤 열심히 읽다가 추리소설 자체를 멀리하게 되었다. 바로 추리소설 자체의 특징인 사람을 서서히 꽉 졸라매는 그 긴장감이 어느 순간 싫어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좋은 추리소설 한 권을 읽고는 다시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다작 작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너무 많은 작품들에 어느 것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다가 아무 거나 골랐는데, 그게 바로 <회랑정 살인사건>이다.
32살의 기리유 에리코는 70대 혼마 기쿠요로 변장하고 회랑정으로 향한다. 그 이튿날, 얼마 전에 죽은 이치가하라 다카아키의 유언장이 공개되는데 이치가하라 가족 모임에 그 관계자로 참석하는 것이다. 사실 에리코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반년 전 회랑정에서 있었던 동반자살사건(그녀의 애인인 사토나카 지로가 전날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애인인 에리코를 목조르고, 자신은 청산가리를 마시고 방에 불지르고 죽은 사건)에서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위장자살을 하고 자연사한 기쿠요부인으로 변장한 것이다. 모두 유언장 내용을 궁금해하지만 그녀는 애인 지로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 복수하기 위해 회랑정에 온 것이다.
이야기는 에리코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70대 기쿠요부인으로, 기쿠요부인은 에리코가 자살하기 전 자신에게 보냈다는 유서를 들고 가족모임에 나타난다. 아마 유서가 공개되면 다카아키의 유산을 상속받는 데 문제가 있을 동반자살사건의 범인을 꾀기 위한 미끼였다. 실제로 그날 밤, 기쿠요부인(에리코)의 방에는 그 유서를 훔쳐낸 사람이 있었다. 유카. 유카가 나가고 난 뒤 유카의 방으로 간 에리코는 그녀가 이미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발견하고 도망쳐나온다.
거대한 유산을 사이에 두고 누가 상속받을 것인가, 욕심에 눈이 먼 가족들의 이야기와 동반자살사건의 진범을 밝히기 위해 여러 사람을 떠보고 다니는 기쿠요 부인. 그 때 발생한 살인사건. 그런데 처음부터 친절한 설명 없이 70대 노부인으로 변장한 에리코의 시점에서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솔직히 내용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리고 이치가하라 집안의 여러 사람들의 가족 관계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 않아서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누가 누구의 딸이고, 형제간이고 하는 것이 파악이 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짚어낸 유카와 나오유키는 삼촌과 조카 사이라는 것 말고는. (어쩌면 몰입이 되지 않아 잘 읽어내지 못한 내 탓이 가능성이 좀 크다는 것을 인정한다.)
'~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나 추리소설입네~'하고 티를 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좀 가벼운 터치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썩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작가의 <백야행>이나 <환야>의 어둡고 몽롱한 분위기와 <용의자 X의 헌신>같이 슬픈 사랑 이야기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나보다. 그런 분위기여도 충분히 책은 술술 읽혀졌는데 이 소설은 그저 술술, 마치 연애소설 읽듯이 그냥 읽어졌다. 물론 여성을 육체적 아름다움의 관점으로만 보는 현대사회를 질타하는 사회의식도 있지만 그건 그저 하나의 소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래저래 솔직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사건의 해결 또는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몇 장에 나온 진범의 한마디는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책을 덮고 진심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걸 보면 나도 뭐라뭐라 해도 이 책에 몰입했던 것 같다. 가족관계를 파악하진 못했지만 주인공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진범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책을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에 만나게 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마음에 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