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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작가의 블로그에 가보면 그 작가가 자주 가는, 조용하고 분위기 좋고 커피가 예술인 커피숍을 몇 군데 소개하는 글이 있다. 언제 가더라도 마치 내 지정석인 양 정해진 창가 자리에 앉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시계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몇 시간동안 꼼짝도 않고 읽고 있으면 까페 주인이 조용히 다가와 비어버린 커피잔에 커피를 채워주고 스르륵 물러나버리고, 그러다 문득 노트북을 켜거나 흰 종이위에 펜을 들거나 해서 멈추지 않고 누가 불러주는 걸 받아쓰는 것처럼 글을 쓰는 상상.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 속의 커피숍은 내 상상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늘 상상은 상상으로 머무는 법. 커피숍에서 여유롭게 책읽고 글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 핑계겠지만....
글을 쓰는 것은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이었다. 아니 지금도 꿈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 <라이팅 클럽> 책 말미에 해설로 실린 문학평론가 정여울씨의 글 첫부분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비롯한 각종 1인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매일 글을 쓰는 시대'가 도래했다."(316쪽)는 사실이 나를 좌절시킨다. 그런 1인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내가 글을 꽤 잘 쓴다고 자부했었다. 교내 백일장이나 조금 큰 규모의 글짓기 대회에서 작은 상을 받곤 했었던 보잘 것 없는 기억때문이다. 하지만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이 없어서 사진을 찍어 미니홈피에 올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남들 다 하는 미니홈피도 하지 못하고 그저 친구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파도타기하면서 남들의 일상을 훔쳐볼 수 밖에 없었던 그 때, 깨달았다. 사진 한 두장에 곁들인 사람들의 코멘트가 꽤나 훌륭했다는 것. 세상에 이런 짧은 몇 문장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아주 많다는 것. 아니,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글을 잘 쓴다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그 때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이젠 입밖에 그 꿈을 얘기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늘 품고 있다. 글을 막상 쓰진 못하지만 대신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대체해버렸지만.
그래서 그런지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진득하게 앉아 강의를 듣는 데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약간 딱딱한 글짓기 강의 책은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게 된다. 그러다 글쓰기에 온 인생을 건 두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있다기에 얼른 눈을 돌렸다. 소설 속에 글짓기 비법을 마법처럼 녹여 넣진 않았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라이팅 클럽>을 집어들었다.
김작가라고 불리우는 엄마와, 불량스럽기 그지 없는 덩치큰 딸. 둘 다 글쓰기에 미쳐 있다. 김작가는 작은 동네에다가 글짓기 교실을 열어서 초등학생부터 동네 주부들까지 모아놓고 글짓기 강의(?)를 하고, 딸은 동성의 여자 친구들과 사랑에 빠져서 편지를 쓴다.... (참 흔하지 않은 캐릭터이다. 왜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게 삐딱하고 불량스럽고 염세주의자일까? 대부분 착하고 모범적이고 규칙을 잘 지키는 평범한 사람들은 주인공이 될 수 없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사는 게 현실 아닌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 가지 비밀을 가지고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의문이 들었다. 소소한 일상을 그린 영화나 소설이 참 좋지만 사실 큰 임팩트가 있는 게 아니라서 재미가 없기는 하다. 하지만 원래 일상이란 그렇게 재미없는 거니까.) 김작가는 많은 보통의 엄마들처럼 모성애가 강한 엄마가 아니다. 내가 불량소녀가 아니고, 우리 엄마가 모성이 없는 엄마가 아니기에 모녀간의 관계에는 공감하기에 어려운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또한 지극히 가난한 주인공의 집. 우리 집은 풍족하진 않았지만 가난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쌀 살 돈이 없는 것이 어떤 건지 역시 공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어하는, 그렇지만 다 쓰레기일 게 뻔하기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는 그 심정만은 처절하게 공감했기 때문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과연 이 주인공은 자기만의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러지 못하므로 이 주인공만은 소설을 쓰기 바라는 심정 반, 나도 못 그러는 데 이 주인공이 소설을 쓰는 데 성공한다면 내가 너무 못나 보일 것 같아서 이 주인공도 끝까지 소설을 쓰지 못하길 바라는 못된 심정 반.
중고등하교 시설의 주인공이 사회생활을 하고 몇 번의 연애를 하고 미국으로 가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스르륵 이어진다. 그러는 사이 당연히 엄마인 김작가도 나이를 먹어가고. 두 모녀의 삶에 '글쓰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까? 그리고 '엄마처럼은 안 살거야!'라고 외치다가 결국은 엄마가 걸어간 길을 고대로 걸어가고 있는 수많은 딸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미국에서 '라이팅 클럽'을 만든 딸의 모습은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든다.
아주 특별히 이 책이 너무 재밌다고 큰소리치기에는 뭣하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다고 단순히 얘기할 수도 없다.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책을 잡고 꼬박 4시간동안 다 읽어내렸다.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이 가득한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 아니, 책을 읽고 있는 중에 한 줄이라고 글을 쓰고 싶어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은 주인공이 미국으로 떠날 때 김작가가 주인공에게 준 편지이다. 단 다섯줄이지만 얼마나 가슴벅찬지 다 외워서 읊고 다니고 싶을 정도이다. 그 편지 말고도 아무것도 아닌 말들인데도 그냥 가슴을 콕콕 건드려서 포스트잇을 붙여둔 게 대여섯 군데이다. 일요일 오전 반나절이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포스트잇을 붙여둔 부분 중 몇 개만 소개해본다.
""뭐 하긴 뭐 해. 대학도 안 가는데 직장이라도 얻어야 할 거 아냐. 밥값은 해야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어깨 위로 차가운 시베리아 바람이 한바탕 지나가는 것 같았다. 소설이고 뭐고 자정이 되어 한순간에 호박 덩굴로 만든 마차에서 굴러떨어진 공주 꼴이 된 기분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현실, 현실이 문제였다." (100쪽)
"처음에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김작가는 늘 그랬다. 내가 어떤 강 하나를 건널 때는 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차피 강은 흐를 수밖에 없다는 듯이." (141쪽)
"새로 시작한 연애가 끝날 때마다, 눈앞의 연애보다 오래전에 헤어진, 과거의 애인들이 생각나는 건 왜 그럴까. 그때로부터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뒤로 걷고 있는 느낌, 발전이라고는 없는 느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느낌만 든다."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