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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평점 :
하얀 책표지에 한자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배경 위로 '아버지의 편지'라는 정자체의 책 제목. 뭔가 위엄과 무게가 있어 보였다. 이 속에 들어있는 아버지들의 메시지는 책표지에서 느낀 그 위엄과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을까, 호기심에 책장을 열었다.
이황, 유성룡, 박세당, 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등 우리가 익히 이름을 들어보았던 조선시대 학자, 관료들이 자식에게 보낸 편지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을 저술했던 저자 정민님의 이름에 더욱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편지 한통의 내용에 저자가 꼼꼼하게 해설을 달아놓았고, 책 뒷부분에는 모든 내용의 원문을 실어놓아서 혹 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공부꺼리가 될 듯하다.
책에 나오는 조선시대의 아버지들은 본인들이 뛰어난 문인, 학자, 관료들이다 보니 자식들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물론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기대하고 타이르지 않겠냐만은. 대부분의 편지에 마음을 다스려 열심히 글을 읽고 공부하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그 시절에 과거시험도 지금의 대학수능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시험이었을터, 과거시험을 치르고 나온 아들의 성적이 궁금해 미리 아는 사람을 통해 성적을 전해 듣고는 실망하고 아쉬워하는 아버지도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부모 마음이란 것은 똑같은가보다.
무조건 공부만 하라고 다그치지 않고, 이 책은 이런 방법으로 읽고 외우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공부방법까지 제시해주는 엄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들이다. 이식은 아들 면하에게 "글쓰는 재주 같은 것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말고, 날마다 시 한 수나 작은 문장을 지어보는 것"(113쪽)을 권했고, 유성룡은 아들들에게 과거시험에 합격할 만한 좋은 글과 문구만 공부하는 약삭빠른 짓은 하지 말라며 "대저 배움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내게 달린 것이나, 세상과 만나고 만나지 못하고는 운명에 달린 것이다. 오직 마땅히 자기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다하고서 하늘에 운명을 맡길 뿐이다."(89쪽)라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 가슴에 되새길 만한 따끔한 한마디였다.
백광훈의 편지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무리 뛰어난 문인이고 학자라고 하더라도 가난 앞에서는 방법이 없는 법이다. 그는 아들에게 "우리 집의 환곡 갚기도 부족하여 거듭 욕을 당할까 염려되는구나."(56쪽) 라며 섬에 들어가 도토리를 많이 주워서 환곡도 갚고 구황대책으로 삼는 것이 어떻냐고 말한다. 여기에 저자가 해설을 달아놓은 부분이 참 재미있었다. "사람은 다람쥐가 아닌데 도토리로 어찌 온 식구가 한 겨울을 난단 말인가?"(57쪽)
공부, 과거 이야기 말고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아들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다. 이것은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지에 녹아있다. 박지원은 손자가 태어나서 기쁜데 아들이 손자의 생김새를 자세히 적어주지 않는다고 어찌나 섭섭해했는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박지원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렇게나 사랑하고 아끼던 손자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또 "편지를 받아 본 지가 꽤 오래되고 보니, 그립고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구나." (224쪽)라는 직접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요즘 아버지와 자식들간의 서먹서먹하고 불편한 관계에 비하면 오히려 그 당시의 부자지간이 더 도타웠던 것 같다.
요즘은 전화가 워낙 일반적으로 사용되는데다가 목소리가 아니어도 휴대폰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 소식을 전하려면 편리한 수단과 방법이 다양하다. 하지만 마음이 부족해서인지 가족들간의 따뜻한 안부를 묻는 일이 하나의 과제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아버지의 편지들을 읽어보면 부자지간에 어지간히도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는 편지만이 소통수단이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관직 때문에 혹은 공부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끼리 인편에 편지를 부치고, 먹을 것을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고 하는 짧지 않은 시간에 정은 더욱 쌓였던 것 같다.
훌륭한 관료에 학자에 문인들이다 보니 편지글 속에서도 막힘이 없고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특히 박지원의 편지글들은 아들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글이지만 마음에 드는 좋은 글귀가 많았다. 그 중에 한 가지 재밌는 표현이 있었다.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껄껄."(222쪽) 다른 편지들을 보면 원문에 충실히 해석해놓은 듯했는데 '껄껄'은 도대체 원문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궁금했다. 60여페이지에 걸친 원문들은 아마도 내가 보지 않을 것 같은데 이 표현 때문에 이 글의 원문을 찾아보았다. 한문으로는 "好笑好笑"라고 나와 있었다. 술주정꾼인 귀봉에게 손자를 안기지 마라는 얘기를 하면서 박지원 자신도 많이 웃었나보다. 저렇게 웃음소리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깔끔한 책 표지에 원문을 다 실어놓고 하나 하나 해설한 것은 좋기는 좋았으나, 그냥 읽어도 충분히 이해될 만한 쉬운 내용의 편지조차 거의 똑같은 글을 두번 적은 듯한 해설은 조금 아쉬웠다. 꼭 편지 하나에 하나의 해설을 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싶었다. 편지의 주인공의 편지를 쓸 당시의 상황이나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곤란한 편지에 해설이 적혀 있는 것은 이해하는 데 도움도 되고 좋았는데 그런 글에 해설을 좀더 보충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래도 조선시대의 아버지들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마음이 푸근해지고 왠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글을 읽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젊은 아빠들이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요즘 젊은 아빠들은 귀여운 자식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니까 뭐든 안 해주고 싶을까. 조선시대의 엄하면서도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들의 무게 있는 메시지들을 보면서 자신도 아이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 고민도 해보고 한번 아이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