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
루이스 캐럴 원작, 마틴 가드너 주석, 존 테니엘 그림, 최인자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앨리스" 이 캐릭터는 '빨간 머리 앤' 만큼이나 우리에게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이다. 분명 어릴 적 이 동화를 읽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막상 책을 펼쳐들고 읽고 있으니 완전 새로운 내용들이었다. 나는 도대체 앨리스에 대해 뭘 알고 있었던 걸까? 이번에 읽은 '앨리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간단한 동화책이 아니라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 마틴 가드너가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주석을 달아놓은 주석판이다. 북폴리오에서 나온 큼지막한 이 책을 펼쳐들고는 앨리스의 신기하고 엉뚱하고 심오한 여행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상한 나라와 거울 나라 모두 현실세계가 아니고 동물이나 카드, 체스의 말, 괴물 등이 말을 하고 심지어 앨리스와 함께 논쟁을 벌이고 시를 외우는 등의 요상한 나라이다. 그 속에서 겪는 일들이 두 편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굳이 두 개의 이야기로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두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스르르 융합되었다.

어느날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시냇가에 앉아있다가 옷을 입고 회중시계를 들고는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는 토끼를 보고 그를 쫒아간다. 토끼굴로 떨어지면서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앨리스에게는 온갖 신기한 일들이 벌어진다. 우선 앨리스의 몸의 크기가 멋대로 커졌다가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지기를 반복하면서 곤란한 일들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앨리스는 이렇게 말하고 생각한다. "집에 있을 때가 훨씬 즐거웠어.~그렇지만 이런 게 더 흥미로운 인생이잖아! 이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76쪽)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7살짜리 꼬마아가씨가. 완전 현실안주형인 나에게 앨리스의 이런 생각은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최대한 변화가 없고, 늘 무사히 오늘 하루를 넘기기를 바라는 내가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비슷한 예로 거울 나라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헤메게 된 앨리스는 "나는 아직 돌아가지 않을거야. 다시 거울을 통과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럼 모험도 끝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226쪽) 이렇게 말한다. 아,, 점점 부끄러워지고 초라해지는 내 모습이여. 단지 7살 어린이의 재미를 추구하는 행동이라고 폄하를 한다고 해도 재미보다는 실리를 찾는 내 모습이 창피한 건 마찬가지이다.
여왕 말과 함께 있던 앨리스가 주변을 구경하면서 하는 말. "만약 이것이 세상이라고 하면 결국 세상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체스 게임이겠죠. 와,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제가 그 말들 중의 하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235쪽) 정말 그런걸까? 이 세상을 거대한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 안의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팍팍한 현실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재미있어질까? 인생은 하나의 연극이고 나는 그 주인공이다, 는 것과 비슷한 것 같은데 지금 내 고민이나 마음 아픈 일들은 그저 게임이 흥미롭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해서 결국 모든 것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앨리스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앨리스 이야기에서 특별히 큰 줄거리는 없었다. 그저 앨리스가 신비로운 나라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들이 흥미롭게 적혀있었다. 다만 그 속에 담긴 심오하고 깊은 의미를 잘 알아채지 못해서 이해가 더딘 것은 분명했다. 또한 이런 이야기는 영어실력이 월등하다면 원서로 읽어야 제맛일 것이다. 온통 언어유희들의 향연이라서 주석을 읽다보면 그 흐름이 깨지게 마련이고 기발한 언어의 조합들이 영어를 쓰지 않는 나에게는 그저 상관없는 단어들이 질서없이 배열된 것에 불과하게 보였다. 물론 찬찬히 주석을 읽어보면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이용 동화에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단어들을 사용해서 흥미로운 모험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솔직히 주석 부분은 꼼꼼하게 읽지 않았다. 주석판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놓았지만 그 주석이라는 것이 너무 사소한 것부터 너무 심오한 것까지 구별없이 빽빽하게 적혀 있어서 솔직히 눈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 중에서 특별히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던 주석부분이 두군데 있었다. 여왕과 함께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앨리스가 이렇게 달리는 이유가 뭐냐고 여왕에게 묻자 "자,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238쪽) 이런 대답을 듣게 된다. 여기에 달린 주석에는 이 문장만큼 앨리스에서 많이 인용된 문장은 없을 거라고 한다. 대개 급변하는 정치상황에서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정말 그러고 보니 그렇다. 모두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때 같이 움직여야지 그나마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있지 남들보다 뒤처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그렇게 떠들고 있지 않는가. 실제로 뉴스에서 저 구절을 들은 것도 같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앨리스의 말에 한사람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두 사람은 달라. 적절하게 돕는다면, 일곱 살로 남을 수도 있어."(301쪽)라고 말한 험프티 덤프티의 말에 앨리스가 급히 화제를 바꾸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달린 주석에는 이 구절이 앨리스 책에서 가장 미묘하고 신랄하고 놓치기 쉬운 경구라고 하는데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미국인들은 이해했을까? 내가 영어를 쓰지 않아서 모르는 건가.. 

아무래도 이 동화는 어린이용 동화가 아니라 어른용 동화인데다가 그것도 아주 심오한 철학동화인 것 같다. 어릴 때 이 책을 읽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릴 때 읽고는 이해하지 못해서 좌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다 커서 읽은 앨리스는 언제 다시 한번 천천히 정독을 해보면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큼지막하고 이쁜 책이 책장에서 온갖 위용을 다 자랑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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